신문의 한 줄, 유튜브의 한 장면, 누군가가 보낸 메시지 하나가 마음 깊은 곳에 내려앉는다. 처음에는 사실인지 아닌지를 따지게 된다. 자료를 비교하고, 보도를 살피고, 논리적으로 들여다본다. 그러나 어느 순간 판단보다 먼저 통증이 찾아온다.
교회의 이름이 세상 앞에서 무너질 때가 있다. 목회자의 이름이 죄와 함께 불릴 때가 있다. 하나님의 이름이 조롱의 문장 속에 섞여 들어갈 때가 있다.
그때 마음은 단순히 화가 나는 것이 아니다. 슬프다. 무겁다. 그리고 부끄럽다.
최근 한 대형교회 담임목사와 관련된 불륜 의혹과 재판 보도가 공개되면서, 그 파장은 신문과 유튜브를 통해 빠르게 퍼져 나갔다. 몇 년 전부터 이 문제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던 사람들도 있었지만, 이번에는 그 일이 더 공식화된 형태로 드러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이런 일은 단지 한 사람의 스캔들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교회 전체의 신뢰를 흔든다. 세상 사람들은 목회자 한 사람을 보며 교회를 판단하고, 교회를 보며 하나님을 조롱한다. 그러니 이 문제는 단지 윤리적 사건이 아니라 영적인 사건이다.
그 일을 두고 기도하던 어느 날 밤, 마음이 무너졌다. 너무 아파서 통곡하게 되었다. 그리고 3일 동안 금식하게 되었다. 몇 명이라도 함께 하나님 앞에 엎드려 회개하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페이스북에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무너진 한국교회를 위한 참회의 금식기도 제안]
사랑하는 믿음의 동역자 여러분께.
요즘 한국교회의 현실을 바라보며 깊은 슬픔과 무거운 마음으로 이 글을 씁니다.
반복되는 목회자들의 타락과 도덕적 추락, 세상 앞에서 무너져 내린 교회의 신뢰,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이 조롱받는 현실 앞에서 마음이 너무 아픕니다.
특별히 교회를 섬긴다고 말했던 목회자들의 죄와 탐욕, 음란과 교만, 권력과 성공을 좇아갔던 모습들은 한국교회를 깊이 병들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누군가를 향해 손가락질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목회자들의 죄는 단지 몇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기도하지 못했고 거룩을 잃어버렸으며 성공주의와 세속화를 묵인해 온 한국교회 전체의 아픔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비난보다 참회의 눈물이 필요한 때입니다.
정죄의 언어보다 회개의 무릎이 필요한 때입니다.
그래서 저는 먼저 하나님 앞에서 3일 금식기도를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한국교회의 참회와 회개, 그리고 회복을 위한 릴레이 금식기도에 함께하실 분들을 찾고 있습니다.
한 끼 금식도 괜찮습니다.
짧은 시간의 기도도 괜찮습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한국교회를 위해 눈물로 기도해 주실 분들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먼저 회개했으면 좋겠습니다.
강단의 거룩을 잃어버린 죄를.
십자가보다 성공을 추구했던 죄를.
성령보다 인간의 능력과 시스템을 의지했던 죄를.
교회를 세상의 영광으로 채우려 했던 죄를.
목회자들이 하나님의 두려움보다 사람의 박수와 권력을 더 사랑했던 죄를.
그리고 그러한 모습들을 보면서도 함께 아파하며 기도하지 못했던 우리의 무관심까지도 하나님 앞에 내려놓았으면 좋겠습니다.
한국교회는 다시 거룩을 회복해야 합니다.
다시 십자가 앞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다시 눈물의 기도를 회복해야 합니다.
작은 한 끼의 금식과 한 사람의 눈물이
무너진 한국교회를 다시 세우는 시작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금식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한 질문이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왜 오늘날의 교회가 이렇게 되었을까. 이것은 단지 한국교회만의 문제인가. 아니면 미국교회와 전 세계 교회들이 함께 겪고 있는 시대적 징후인가.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문제가 생긴 것인가.
하나님의 집에서 시작되는 일
종말론과 관련하여 우리가 반드시 주목해야 할 말씀이 있다.
베드로전서 4장 17절이다.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여기서 하나님의 집은 교회다.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공동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말한다.
마지막 때가 되면 많은 사람들이 먼저 세상의 재난을 떠올린다. 전쟁, 기근, 지진, 전염병, 경제적 붕괴, 국제 질서의 혼란, 기독교를 향한 핍박 같은 것들을 생각한다. 물론 성경은 그런 일들을 말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보다 먼저 주목해야 할 일이 있다.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이 말은 무섭다. 그러나 동시에 깊은 소망을 품고 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버리셨기 때문에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다. 교회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마지막 때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위해 교회를 다시 정결하게 하시기 위해 심판하신다.
그렇다면 왜 베드로는 이 말을 했을까. 왜 하나님은 마지막 때의 첫 번째 스텝을 세상이 아니라 교회로부터 시작하시는가.
그 질문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한 단어 앞에 서게 된다.
값싼 은혜.
값싼 은혜라는 병
디트리히 본회퍼는 1937년에 그의 대표작 『나를 따르라』, 혹은 『제자도의 대가』로 알려진 책을 썼다. 그 책에서 그는 “값싼 은혜”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값싼 은혜는 회개를 요구하지 않는 용서의 설교이며, 교회 권징 없는 세례이며, 고백 없는 성찬이며, 제자도 없는 은혜이며, 십자가 없는 은혜이며,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 없는 은혜이다.
이 말은 당시 독일교회를 향한 외침이었다.
독일에서 기독교는 오랫동안 국가교회의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태어나면서 부모의 신앙을 따라 세례를 받았고, 자연스럽게 기독교인이 되었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일이기보다 사회적 정체성에 가까워졌다.
그 결과 제자도의 강조가 약해졌다.
사람들은 기독교인이었지만,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도록 부름받았다는 감각은 희미했다. 예배는 있었지만 순종은 약했고, 은혜는 말했지만 십자가는 흐려졌다.
그런 상황 속에서 히틀러가 등장했다. 독일의 재건과 민족주의를 내세운 그의 통치 앞에서 독일교회는 분별력을 잃었다. 많은 교회가 저항하지 못했고, 어떤 교회는 순응했으며, 어떤 이들은 지지하기까지 했다.
본회퍼는 그 뿌리를 값싼 은혜에서 보았다.
회개 없는 은혜. 제자도 없는 은혜. 십자가 없는 은혜.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 없는 은혜.
그것은 복음처럼 보였지만 복음이 아니었다. 은혜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안에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대가가 사라져 있었다.
복음은 결코 값쌀 수 없다
사실 “값싼 은혜의 복음”이라는 말은 모순이다.
복음은 결코 값쌀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음을 주시기 위해 치르신 대가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다. 죄 없으신 그분에게 인류의 모든 죄를 담당하게 하셨다. 십자가 위에서 그 아들에게 모든 진노와 저주와 심판이 쏟아지게 하셨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고 절규하실 때에도, 하나님은 그 고통을 외면하시는 듯한 침묵 속에 계셨다. 그 침묵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두려운 대가를 치르고 주어진 것인지를 보여 준다.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의 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은 결코 값싼 것이 될 수 없다.
그러나 현대교회는 어느 순간 은혜를 값싸게 만들기 시작했다. 물론 모든 교회가 그렇다는 말은 아니다. 지금도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자신을 희생하며 하나님 나라를 위해 자기 절제와 순교적인 삶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현대교회 안에는 값싼 은혜가 복음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큰 영향을 미친 것이 사실이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신다.” “그저 예수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 “죄를 범하면 회개하면 된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 말들이 전부 틀린 것은 아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은 복음의 핵심이다. 회개하면 용서받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안에서 예수님의 주권과 제자도의 부르심, 십자가의 길이 사라질 때 생긴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다고 말하면서, 그분을 주님으로 따르지 않는 신앙. 용서는 원하지만 순종은 원하지 않는 신앙. 천국은 원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통치는 거부하는 신앙. 은혜는 말하지만 자기 부인과 십자가는 말하지 않는 신앙.
이것이 값싼 은혜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한국교회 안에서도 이런 변화는 조용히 일어났다.
과거 순복음교회 시대에 많이 불렸던 찬송 가운데 “부름 받아 나선 이 몸”이 있다. 그 찬송의 3절 가사는 원래 이렇게 이어진다.
“존귀 영광 모든 권세 주님 홀로 받으소서 멸시 천대 십자가는 제가 지고 가오리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
이 가사는 참으로 귀하다.
존귀와 영광과 모든 권세는 주님 홀로 받으시고, 나는 멸시와 천대와 십자가를 지고 가겠다는 고백이다. 그리고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겠다는 고백이다.
이것은 제자의 고백이다. 십자가를 아는 사람의 노래다. 자기 이름보다 주님의 이름을 더 사랑하는 사람의 찬양이다.
그런데 어느 시점에 이 가사가 바뀌어 불리기도 했다.
“멸시 천대 십자가는 예수님이 지셨으니.”
물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맞다.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은 예수님이시다. 그러나 예수님은 동시에 우리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의 십자가를 면제해 주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의 길을 열어 준다.
원래 가사를 쓴 이호운 목사는 1969년에 이미 세상을 떠났고, 작곡자인 이유선 장로가 여의도순복음교회 측에 원래 가사대로 불러 달라고 항의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 작은 가사 변경은 어쩌면 현대교회의 한 단면을 보여 준다.
멸시와 천대와 십자가를 내가 지겠다는 고백에서, 예수님이 이미 지셨으니 나는 은혜를 누리기만 하면 된다는 방향으로 조금씩 이동한 것이다.
물론 은혜는 누려야 한다. 그러나 은혜를 받은 사람은 주님을 따른다. 참된 은혜는 제자를 만든다. 십자가의 은혜는 십자가의 사람을 만든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는 삶. 이것이 사라질 때, 교회는 은혜를 말하면서도 점점 미지근해진다.
미지근한 라오디게아 교회
요한계시록 3장에서 예수님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말씀하신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차지도 않았고 뜨겁지도 않았다. 미지근했다. 예수님은 그 미지근함을 견디기 어려워하셨다.
예수님은 미지근한 신앙을 역겹다고 느끼신다. 차라리 차든지 뜨겁든지 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라오디게아 교회는 자신들이 어떤 상태인지 몰랐다.
그들은 말했다.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신다.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자기 인식과 주님의 평가가 완전히 달랐다. 그들은 부요하다고 생각했지만, 주님은 가난하다고 하셨다. 그들은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주님은 그들이 눈멀고 벌거벗었다고 하셨다.
이것이 값싼 은혜가 만들어 내는 가장 위험한 결과다.
자신이 괜찮다고 생각한다. 부요하다고 생각한다. 은혜 안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주님의 눈에는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상태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신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심판은 사랑 없는 분노가 아니다. 책망은 버림의 표시가 아니다. 징계는 포기의 언어가 아니다.
주님은 사랑하시기 때문에 책망하신다. 사랑하시기 때문에 징계하신다. 사랑하시기 때문에 회개하라고 부르신다.
왜 하나님은 교회를 먼저 심판하시는가
왜 마지막 때 하나님의 집에서부터 심판이 시작되는가.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의 피값으로 세우신 복음이 값싼 은혜의 복음으로 변질되는 것을 그냥 보실 수 없기 때문이다.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의 피다. 그런데 교회가 그 복음을 값싼 위로와 종교적 안정감으로 바꾸어 버렸다. 예수님을 왕으로 선포하기보다, 예수님을 내 삶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도구처럼 소개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보다 죽어서 천당 가는 복음을 훨씬 더 많이 말했다. 제자의 길보다 축복받는 길을 더 많이 말했고, 자기 부인보다 자기 성취를 더 많이 말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교회를 먼저 다루신다.
값싼 은혜를 가르친 사람들을 다루신다. 그것을 받아들인 사람들을 다루신다. 그대로 살아온 교회를 다루신다. 특별히 교회 지도자들을 다루신다.
하나님은 세상을 심판하시기 전에 먼저 자신의 집을 정결하게 하신다. 복음을 회복하시기 위해서다. 십자가를 회복하시기 위해서다. 왕이신 예수님의 주권을 회복하시기 위해서다.
교회가 먼저 회개해야 한다. 교회가 먼저 복음의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 교회가 먼저 미지근함에서 깨어나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집에서 시작되는 심판의 의미다.
마지막 때의 순서
마지막 때의 흐름을 생각해 볼 때, 우리는 몇 가지 순서를 보게 된다.
먼저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이 시작된다. 교회가 흔들리고, 감추어진 것이 드러나고, 값싼 은혜의 구조가 무너지고, 하나님께서 교회를 정결하게 하신다.
그와 동시에 세상에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징조들이 나타난다.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한다. 처처에 기근과 지진과 전염병이 일어난다. 국제 질서는 흔들리고, 사람들의 마음은 두려움으로 가득해진다.
그리고 그 속에서 두 가지 일이 동시에 일어난다.
전 세계적인 핍박. 그리고 전 세계적인 부흥.
핍박은 교회를 무너뜨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성경과 교회 역사는 반복해서 보여 준다.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 된다. 핍박 속에서 교회는 더 정결해지고, 복음은 더 선명해지며, 성도들은 더 깊은 헌신으로 나아간다.
마지막 때의 대부흥은 값싼 은혜에 길들여진 교회를 통해 오지 않는다. 그 부흥은 왕이신 예수님께 온전히 순복한 사람들을 통해 온다. 십자가를 알고, 제자도를 알고,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사람들을 통해 온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4장 14절에서 말씀하셨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여기서 천국 복음은 단순히 죽어서 천당 가는 복음만을 말하지 않는다. 헬라어 원문의 의미를 따라 말하면 “그 왕국의 복음”이다.
왕국의 복음.
이 말은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말하는 것만으로 충분한가. 죽어서 천국 간다고 말하는 것만으로 충분한가.
물론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는다. 이것은 복음의 핵심이다. 그러나 왕국의 복음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왕국의 복음은 이렇게 묻는다.
이 세상 나라가 전부가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 하늘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나라가 있다. 예수님은 그 나라의 왕이시다. 당신은 이분을 주님과 왕으로 인정하고, 그분의 통치 아래 들어가겠는가.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다. 이것이 왕국의 복음이다.
왕이신 예수께 복종하는 사람들
마태복음 24장 14절의 말씀은 단순히 복음 전도 프로그램이 전 세계에 퍼진다는 뜻만이 아니다. 왕국의 백성들이 살아내는 복음, 왕이신 예수님의 주권 아래 온전히 순복하는 사람들이 증거하는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된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찾고 계신다.
고린도후서 10장 3절에서 6절은 영적 전쟁의 본질을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육신으로 행하나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그리고 이어서 말한다.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너희의 복종이 온전하게 될 때에 모든 복종하지 않는 것을 벌하려고 준비하는 중에 있노라.”
여기에도 순서가 있다.
먼저 우리의 복종이 온전해져야 한다. 그 후에 모든 복종하지 않는 것을 벌할 준비가 된다.
하나님은 자신에게 온전히 복종하는 사람들을 찾고 계신다. 그런 교회를 찾고 계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 이 세상을 치유하고 다스리기 원하시기 때문이다.
마지막 때의 대부흥은 이런 사람들을 통해 일어난다.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들에게 성령을 물 붓듯이 부으시고, 그들을 통해 왕국의 복음을 온 세상에 증거하게 하신다.
이런 사람들이 마지막 때의 주인공들이다.
유명한 사람들이 아닐 수 있다. 큰 플랫폼을 가진 사람들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 복종한 사람들이다. 자기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시킨 사람들이다. 자기 삶의 우선순위를 하나님의 나라와 의에 둔 사람들이다.
심판은 절망이 아니라 회복의 시작이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집에서부터 심판을 시작하시는 것은 절망이 아니다. 패배가 아니다.
물론 그 과정은 아프다. 감추어진 죄가 드러날 때 교회는 수치를 겪는다. 지도자들의 타락이 폭로될 때 성도들은 상처를 받는다. 세상은 교회를 조롱하고, 하나님의 이름은 모욕당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더 깊이 보면, 하나님께서 교회를 버려두지 않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포기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흔드시는 것이다. 마지막 때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를 이루시기 위해, 먼저 교회를 정결하게 하시는 것이다.
심판은 무너뜨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회복시키기 위한 것이다. 징계는 끝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다시 세우기 위한 것이다. 흔드심은 패배가 아니라 정결의 과정이다.
하나님은 훼손된 복음을 회복하고 계신다. 값싼 은혜로 변질된 복음을 왕국의 복음으로 다시 세우고 계신다. 교회를 다시 십자가 앞으로 부르시고, 다시 제자의 길로 부르시고, 다시 왕이신 예수님의 통치 아래로 부르고 계신다.
그리고 그 교회를 통해 세상을 치유하고 다스리시려 한다.
이것은 우리 앞에 펼쳐질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를 촉진시키는 일이다.
먼저 그의 나라를 구하라
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 33절에서 말씀하셨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 말씀은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변하지 않는 우선순위가 되어야 한다.
먼저 그의 나라. 먼저 그의 의.
하나님의 나라가 먼저다. 예수님의 통치가 먼저다. 그분의 의가 먼저다. 나의 성공보다, 나의 안전보다, 나의 이름보다, 나의 사역보다, 나의 계획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가 있어야 한다.
주기도문도 마찬가지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이 기도는 단순한 예배 의식 속의 문장이 아니다. 이것은 왕국 백성의 가장 중요한 기도 제목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고,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기도다.
값싼 은혜는 이 기도를 약화시킨다. 왕국의 복음은 이 기도를 삶의 중심에 세운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를 그 왕국의 백성으로 부르고 계신다.
단순히 구원받은 개인으로만 살라고 부르시는 것이 아니다. 죽어서 천국에 갈 사람으로만 부르시는 것이 아니다. 지금 이 땅에서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하고, 그분의 통치 아래 살아가며, 그 왕국의 복음을 증거하는 백성으로 부르고 계신다.
교회가 흔들릴 때
교회가 흔들릴 때 우리는 두려워할 수 있다.
익숙했던 것이 무너지고, 존경했던 사람들이 넘어지고, 감추어진 죄들이 드러나고, 세상이 교회를 조롱할 때 마음은 흔들린다. 그러나 그때 우리는 더 깊이 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흔드시는 것은 무너뜨리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드러내시는 것은 수치를 주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책망하시는 것은 버리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시고 징계하신다. 하나님은 자신의 집을 정결하게 하신다. 하나님은 값싼 은혜를 걷어 내고 왕국의 복음을 회복하신다.
그러므로 지금은 손가락질보다 회개의 때다. 비난보다 금식과 기도의 때다. 다른 사람의 죄를 구경하는 시간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미지근함을 들여다보는 시간이다.
나는 왕이신 예수께 복종하고 있는가. 나는 값싼 은혜에 안주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십자가 없는 은혜를 원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고 있는가.
이 질문 앞에 서야 한다.
마지막 시대, 하나님이 교회를 흔드시는 이유는 분명하다.
교회를 버리기 위해서가 아니다. 교회를 다시 세우기 위해서다.
값싼 은혜를 끝내고 왕국의 복음을 회복하기 위해서다. 미지근한 교회를 깨워 이기는 교회로 세우기 위해서다. 세상을 향한 마지막 대부흥과 대추수를 준비하기 위해서다.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이 시작된다.
그러나 그 심판은 끝이 아니다. 그것은 거룩한 시작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교회를 흔드신다. 그리고 그 흔드심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을 부르신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사람들. 예수님을 구주만이 아니라 왕으로 모시는 사람들. 자기 생각과 욕망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시키는 사람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되, 왕국의 복음을 살아내는 사람들.
그들을 통해 마지막 때의 부흥은 올 것이다.
그리고 그 부흥은 값싼 은혜의 부흥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왕국의 복음이 회복되는 부흥일 것이다.
예수님께서 물에서 올라오실 때, 성령께서 비둘기 같은 형상으로 그분 위에 임하셨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아버지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그 장면은 얼마나 영광스러웠을까. 이 땅의 사람들은 그 의미를 다 알지 못했을지라도, 하늘의 천사들은 숨을 죽이고 그 순간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하늘 가득 환호성이 울려 퍼졌을 것이다.
드디어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 가운데 모습을 드러내셨다.
드디어 오랜 기다림이 끝나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가운데 가까이 왔다.
드디어 성령의 한량없는 기름 부으심을 입으신 예수님께서 놀라운 일을 시작하시게 되었다.
이제 곧 병든 자들이 일어나고, 귀신에게 눌린 자들이 자유를 얻고, 죽은 자들이 살아나며, 하늘의 권능이 땅 위에 나타나리라. 천사들은 그렇게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요단강에서 시작된 이 영광이 곧바로 능력의 사역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성령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이끌어 가셨다.
마태복음은 조용히 “성령에게 이끌리어 광야로 가사”라고 기록하지만, 마가복음은 더 강한 표현을 쓴다.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그 말에는 지체함이 없다. 머뭇거림도 없다. 성령께서 예수님을 즉시, 강하게, 거의 강권하듯 광야로 몰아가신 것이다. 하늘이 열리고 아버지의 음성이 들린 바로 그 다음 장면이 광야였다.
우리가 기대하는 순서는 대개 이렇지 않다. 성령의 불을 받으면 곧바로 능력의 사역이 열릴 것이라고 생각한다. 베드로가 성령을 받고 설교하자 삼천 명이 회개했던 것처럼, 바울이 주님을 만난 뒤 이방인의 사도로 쓰임 받은 것처럼, 교회사 속에서도 조지 휫필드, 존 웨슬리, 찰스 피니, D. L. 무디, R. A. 토레이, 길선주, 이성봉, 조용기 목사님과 같은 사람들이 성령의 권능을 받고 놀라운 사역으로 들어간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곧바로 사역의 현장으로 가지 않으셨을까.
왜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을 사람들 앞으로 보내기 전에, 아무도 없는 광야로 몰아가셨을까.
마지막 아담이 걸어가신 저주의 땅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보아야 한다.
고린도전서 15장은 예수님을 “마지막 아담”이라고 부른다.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지만,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셨다고 말한다. 또 첫 사람은 땅에서 나서 흙에 속한 자이지만,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다고 말한다.
예수님은 마지막 아담이시다. 첫 사람 아담이 죄로 열어놓은 저주의 역사를 끝내기 위해 오신 분이다. 동시에 예수님은 둘째 사람이시다.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셔서, 그분을 믿는 모든 사람들을 새로운 피조물로 세우시는 하나님의 새 공동체의 시작점이 되신 분이다.
그 일을 이루시기 위해 예수님은 아담이 넘어졌던 자리와 연결되는 자리로 들어가셔야 했다. 아담이 죄를 범함으로 무너진 인간의 역사를 다시 붙들기 위해, 예수님은 그 실패의 깊은 결과 속으로 들어가셔야 했다.
아담이 시험을 받았던 곳은 에덴동산이었다.
그곳은 완전한 낙원이었다. 먹을 것이 부족하지 않았고, 마실 것이 부족하지 않았고, 기온도 환경도 인간이 살기에 완전했다. 온갖 과일나무가 아름답게 자라고 있었고, 죄의 그림자는 아직 땅 위에 드리우지 않았다. 배고픔도 없었고, 목마름도 없었고, 죽음의 냄새도 없었다. 모든 것이 충만했고, 모든 것이 선했다.
그런데 아담은 그 완전한 자리에서 넘어졌다.
그리고 그 결과 땅은 저주를 받았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말씀하셨다.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라.”
에덴의 풍요는 깨어졌고,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기 시작했다. 인간은 땀을 흘려야 먹고 살 수 있게 되었다. 흙에서 난 사람은 다시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존재가 되었다.
광야는 바로 그 저주의 흔적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땅이다.
사람이 살기 어려운 곳.
물이 없는 곳.
열매가 없는 곳.
길이 없는 곳.
생명이 메마른 곳.
어쩌면 아담이 범죄하기 전의 세계에는 우리가 아는 의미의 광야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광야는 죄로 인해 황폐해진 세상의 상처 같은 곳이다. 생명이 물러간 자리, 저주가 남긴 빈자리,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는 오래 버틸 수 없는 자리다.
아담은 낙원에서 시험을 받았다. 모든 것이 만족한 자리에서, 배고픔도 목마름도 없는 완전한 조건 속에서 시험을 받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셨다. 저주받은 땅, 황폐한 자리,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에서 사십 일을 금식하신 후 시험을 받으셨다.
첫 사람은 풍요 속에서 넘어졌고, 마지막 아담은 결핍 속에서 이기셨다.
첫 사람은 동산에서 무너졌고, 둘째 사람은 광야에서 서셨다.
첫 사람은 먹을 것이 많은 자리에서 금지된 열매를 붙들었고, 예수님은 아무것도 없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말씀만 붙드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광야는 단순한 고독의 장소가 아니었다. 그곳은 구속사의 전장이었다. 아담의 실패가 남긴 저주의 땅 한복판에서, 마지막 아담이 새 인류의 길을 여시는 자리였다.
광야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곳
하나님의 백성에게 광야는 언제나 특별한 장소였다.
모세는 출애굽의 사명을 받기 전, 광야에서 사십 년을 보냈다. 애굽 왕궁에서 익힌 힘과 자신감이 깨어지는 시간이었고, 자신의 육신의 능력으로는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배워가는 시간이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도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기 전, 광야에서 사십 년을 보냈다. 그곳에서 그들은 낮아졌고, 시험을 받았고, 자기 마음이 어떤지 드러났다. 만나를 먹으며 인간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배워야 했다.
다윗도 왕으로 세워지기 전, 광야를 지나야 했다. 사울의 칼을 피해 도망 다니며, 동굴과 들판과 황량한 땅 사이를 전전했다.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지만 곧바로 왕좌에 앉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광야에서 하나님만 피난처로 삼는 법을 배웠다.
엘리야도 이세벨의 위협을 피해 광야로 들어갔다. 로뎀나무 아래에서 죽기를 구할 만큼 지쳤지만, 하나님은 그 광야에서 그를 먹이시고 다시 일으키셨다. 그리고 세미한 음성으로 그를 만나 주셨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에게 광야는 단순히 척박한 땅이 아니었다. 그곳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낮추시고, 빚으시고, 다시 부르시는 장소였다.
히브리어로 광야를 ‘미드바르’라고 한다. 흥미롭게도 이 단어는 ‘말씀하다’는 뜻을 가진 ‘다바르’와 소리가 맞닿아 있다. 그래서 광야는 단지 아무 말도 없는 빈 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자리처럼 느껴진다.
사람의 소리가 사라지는 곳.
익숙한 의지처가 무너지는 곳.
자기 힘으로 길을 만들 수 없는 곳.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기 시작한다.
누가복음 3장은 세례 요한의 등장을 이렇게 기록한다. 디베료 황제가 통치하고,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있으며, 헤롯과 빌립과 루사니아가 각 지역을 다스리고,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했다고 말한다.
세상에는 황제가 있었다.
총독이 있었다.
분봉 왕들이 있었다.
대제사장들이 있었다.
권력의 중심에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정치와 종교의 높은 자리에는 이름 있는 자들이 앉아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궁궐로 먼저 가지 않았다. 성전 권력의 중심으로 먼저 가지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은 빈 들에 있는 요한에게 임했다.
광야는 그런 곳이다.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는 곳이지만 하나님께서 주목하시는 곳이다.
사람의 말이 줄어드는 곳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는 곳이다.
세상의 중심에서는 멀어지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중심으로 가까이 들어가는 곳이다.
길이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길이 되시는 주님
하나님은 지금도 당신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광야로 이끄신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려는 사람들, 하나님께서 깊이 다루시려는 사람들, 하나님께서 더 가까이 만나시려는 사람들을 때로는 광야로 데려가신다. 그것은 버림이 아니다. 폐기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더 깊이 빚으시는 시간이다.
바울도 그러했다.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 그는 곧바로 대중적 사역의 무대로만 나아간 것이 아니었다. 그는 아라비아로 갔다. 광야의 시간 속에서 주님 앞에 머물렀다. 그 시간 동안 그는 훗날 신약성경 여러 권을 기록할 만큼 깊은 복음의 계시를 받았다.
광야에는 한 가지 특징이 있다.
광야에는 길이 없다.
만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이 나를 어딘가로 이끄시는 것 같은데, 그곳에 가보니 새로운 길이 보이고, 새로운 문이 열리고, 사람들의 도움과 기회가 기다리고 있다면 그것은 광야가 아닐 수 있다.
광야는 사방이 막힌 곳이다.
앞도 막혀 있고, 뒤도 막혀 있고, 오른쪽도 왼쪽도 막혀 있다. 땅을 보아도 길이 없고, 사람을 보아도 답이 없다. 그래서 결국 하늘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데, 이상하게도 그 하늘마저 막힌 것처럼 느껴지는 때가 있다.
기도해도 응답이 없는 것 같고, 말씀을 읽어도 가슴에 들어오지 않는 것 같고, 사람을 만나도 위로가 되지 않는 시간이 있다.
그때 우리는 묻는다.
하나님, 왜 저를 여기로 몰아오셨습니까.
왜 길이 없는 곳으로 데려오셨습니까.
왜 이렇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리로 저를 밀어 넣으셨습니까.
그러나 광야에는 하나님의 목적이 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광야로 이끄실 때는, 그 광야에서 이루시려는 일이 있다. 그 목적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사람은 쉽게 그곳을 빠져나오지 못한다. 발버둥을 치면 시간이 더 길어질 때도 있다. 광야에서 가장 빠른 길은 항복이다. 자기 힘을 내려놓고, 자기 방식을 내려놓고, 자기 계산과 욕심을 주님의 발 앞에 내려놓는 것이다.
그 시간은 결코 쉽지 않다.
광야 한복판에 있을 때는 그곳이 아름답게 보이지 않는다. 모래는 뜨겁고, 바람은 차갑고, 마음은 메마르고, 내일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지나고 나서 돌아보면 알게 된다. 광야는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었다. 그것도 이전과는 다르게, 훨씬 깊이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었다.
하나님의 음성이 더 생생해지는 곳.
내 자아의 소리가 작아지는 곳.
내가 붙들고 있던 것들이 얼마나 약한지 드러나는 곳.
그리고 하나님 한 분만으로 사람이 살 수 있다는 것을 배우는 곳.
광야는 아픈 곳이지만, 지나고 나면 가장 복된 곳이 된다.
광야에서 깨어지는 것과 다시 들리는 음성
나에게도 그런 시간이 있었다.
1988년 가을이었다. 그것은 어떤 윤리적인 죄 때문은 아니었다. 매일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살던 사람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큰 문제가 없어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더 깊은 곳을 만지셨다. 그것은 죄의 행위라기보다 자아의 문제였다.
석 달 동안 하나님은 나를 깊이 다루셨다.
그 시간은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지금 돌아보면, 그 시간은 제 신앙생활 가운데 가장 축복된 시간이었다. 만일 그 시간이 없었다면 나는 참된 영적인 것이 무엇인지 몰랐을지도 모른다. 익숙한 종교 언어를 말하고, 매너리즘에 빠져 설교하고, 목회를 하나의 직업처럼 감당하는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겉으로는 목회자였지만, 속으로는 삯꾼 목자처럼 살아갔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종종 목회자들을 만나면 그 이야기를 들려준다.
하나님께서 광야로 몰아가시는 시간은 무의미하지 않다고. 그 시간은 고통스럽지만, 가장 복된 시간이 될 수 있다고. 그곳에서 사람은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고, 자기 안에 남아 있던 욕심과 자아를 보게 되며, 정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이 되어가기 시작한다고.
신명기 8장은 이렇게 말한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광야는 마음이 드러나는 곳이다.
풍요로울 때는 잘 보이지 않던 마음이 광야에서 드러난다. 사람이 많을 때는 숨길 수 있던 마음이 홀로 남겨졌을 때 드러난다. 길이 있을 때는 믿음처럼 보였던 것이 길이 사라질 때 진짜 믿음인지 드러난다.
광야는 우리를 낮춘다.
광야는 우리를 시험한다.
광야는 우리 마음이 어떤지를 드러낸다.
광야는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광야의 목적은 우리를 망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우리를 부수기만 하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낮추시되 다시 세우신다. 비우시되 다시 채우신다. 꺾으시되 새롭게 빚으신다.
광야에서 우리는 마침내 알게 된다.
주님만이 길이시다.
예수님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말씀은 광야에서 더 선명해진다. 길이 보이는 곳에서는 그 말씀이 아름다운 교리처럼 들릴 수 있다. 그러나 길이 전혀 없는 곳에 서면, 그 말씀은 생명이 된다.
주님이 길이시다.
길이 없어서 절망하는 곳에서, 주님 자신이 길이 되신다. 문이 닫혀 낙심하는 곳에서, 주님 자신이 문이 되신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느끼는 곳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다시 보여주신다.
통과하고 나서 돌아보면
혹시 지금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이 나를 광야로 이끌고 계신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아니면 이미 광야 한복판에 들어와 있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사방이 막혀 있고, 아무리 둘러보아도 길이 보이지 않고, 기도해도 하늘이 닫힌 것처럼 느껴지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먼저 조용히 물어보아야 한다.
하나님, 왜 저를 이 광야로 이끄셨습니까.
이 시간 속에서 무엇을 낮추기 원하십니까.
제 마음의 무엇을 보게 하시려는 것입니까.
제가 붙들고 있던 어떤 욕심과 자아를 내려놓기 원하십니까.
이 광야에서 제가 들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광야는 사방이 막혀 있기 때문에 주님만 바라볼 수밖에 없는 곳이다. 그래서 광야는 고통스럽지만 복되다. 사람이 만든 길이 사라졌기 때문에, 하나님이 내시는 길을 보게 된다. 내 힘으로 만들었던 문들이 닫혔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여시는 문을 기다리게 된다.
그러므로 광야에 있다고 해서 좌절하지 않아도 된다.
낙심하지 않아도 된다.
버림받았다고 단정하지 않아도 된다.
오히려 조용히 기대해도 된다.
하나님께서 나를 새롭게 만나 주실 수 있다.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실 수 있다.
하나님께서 내 안의 욕심과 자아를 다루실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이 시간을 통해 나를 더 아름답게 빚어 가실 수 있다.
광야에서는 서두르지 않는 것이 좋다. 자꾸만 빠져나갈 길만 찾다 보면, 정작 그곳에서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놓칠 수 있다. 때로는 잠잠히 주님의 발 앞에 엎드리는 것이 가장 깊은 순종이다.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제가 도망치지 않겠습니다.
제가 발버둥치기보다 항복하겠습니다.
제가 제 욕심과 자아를 주님의 발 앞에 내려놓겠습니다.
이 광야에서 제게 말씀하여 주옵소서.
광야는 처음에는 황량한 곳으로 보인다. 아무것도 없는 곳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그곳은 가장 깊은 만남의 자리가 된다. 지나고 나서 돌아보면, 우리는 이상한 고백을 하게 된다.
그때가 참 아팠지만, 그때 하나님을 만났다.
그때는 길이 없었지만, 그때 주님이 길이심을 알았다.
그때는 모든 것이 막힌 줄 알았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나를 당신께로 더 가까이 부르고 계셨다.
통과하고 나서 돌아보면, 광야만큼 아름다운 곳은 없다.
그곳에서 우리는 낮아졌고, 깨어졌고, 울었다. 그러나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바로 그곳에서 우리의 자아가 무너졌고, 바로 그곳에서 주님만이 길이심을 배웠다.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다시 빚으셨다.
예수님께서 하늘의 음성을 들으신 후 광야로 들어가셨듯이, 우리도 때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로 광야에 들어간다. 사랑받기 때문에 광야가 없는 것이 아니다. 사랑받기 때문에 광야에서도 버려지지 않는 것이다.
그곳은 사람이 오래 머물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따뜻한 집도 없고, 식탁도 없고, 누군가의 위로도 없었다. 바람은 거칠었고, 돌들은 말이 없었고, 낮과 밤의 온도는 사람의 몸과 마음을 시험하듯 오르내렸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사십 일을 금식하셨다. 그리고 그 끝에서 시험을 받으셨다.
우리는 이 장면을 너무 익숙하게 읽을 때가 있다. 예수님이시니까 당연히 이기셨겠지, 하고 쉽게 지나가 버린다. 그러나 이 시험은 결코 가벼운 시험이 아니었다. 실제로 넘어질 가능성이 전혀 없는 형식적인 절차가 아니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참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이 시험은 실제적인 시험이었다. 배고픔도 실제였고, 외로움도 실제였고, 사탄의 유혹도 실제였다.
만일 예수님께서 그 세 번의 시험 가운데 단 하나라도 넘어지셨다면, 인류의 구원은 사라졌을 것이다. 우리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영원한 절망과 고통뿐이었을 것이다. 빛은 꺼지고, 소망은 닫히고, 모든 사람의 운명 위에는 완전한 어둠만 남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광야의 시험은 단순히 예수님 개인의 경건한 승리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온 인류의 운명이 걸린 자리였다. 하늘과 땅이 숨을 죽이고 지켜보는 자리였다. 아담이 실패한 자리에서 마지막 아담이 서 계셨고,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넘어졌던 자리에서 참 이스라엘이 홀로 서 계셨다.
그런데 이 광야의 시험을 제대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먼저 그 직전에 있었던 장면을 보아야 한다.
요단강에서 열린 하늘
예수님은 서른 살이 되실 때까지 나사렛에서 자라셨다. 성경은 그 긴 세월에 대해 거의 침묵한다. 열두 살 때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셨던 사건, 그리고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는 말씀 외에는, 그분의 나사렛 생활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는다.
그 침묵은 오히려 깊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서 서른 해 가까운 시간을 평범한 동네의 한 사람처럼 사셨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나사렛의 먼지 나는 길을 걸으셨고, 요셉의 집에서 자라셨고, 마리아의 손길 아래에서 식사를 하셨고, 동네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셨다.
그러다가 때가 되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찾아가셨다. 요단강가에는 회개의 세례를 받으려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죄를 고백하는 사람들, 새 출발을 갈망하는 사람들,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들 사이로 예수님께서 조용히 걸어오셨다. 그리고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
마태복음은 그 장면을 이렇게 기록한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물에서 올라오시는 예수님 위로 하늘이 열렸다. 성령께서 비둘기같이 임하셨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아버지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이 장면은 단순히 세례식의 한 장면만이 아니다. 이 말씀 속에는 깊은 아버지의 인정과 선언이 담겨 있다. 마치 하나님 아버지께서 온 하늘과 땅 앞에서 예수님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다.
“너는 내 아들이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를 기뻐한다.”
사람들이 열어주지 못한 인정의 문
유대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의식 가운데 하나가 있다. 남자 아이가 열세 살이 되었을 때 맞이하는 바르 미츠바, 여자 아이가 열두 살이 되었을 때 맞이하는 바트 미츠바이다. ‘미츠바’는 계명이라는 뜻이다. 모세오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계명들, 전통적으로 613개의 계명을 가리킨다. 바르 미츠바는 이제 그 아이가 하나님의 계명 앞에 책임 있는 존재로 서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 의식은 단지 한 아이가 나이를 먹었다는 기념이 아니다. 아버지와 공동체가 그 아이를 인정하는 자리다. 이제 너는 언약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는 사람이라는 선언의 자리다. 유대인들에게는 결혼식과 더불어 평생 가장 중요한 통과의례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의 생애를 조심스럽게 바라보게 된다.
예수님은 어떤 모습으로 태어나셨는가.
요셉과 마리아는 정혼한 사이였다. 오늘날의 약혼보다 훨씬 더 무거운 법적 관계였다. 정혼은 히브리적 배경에서 거룩하게 구별된 관계를 뜻하는 키두쉰과 연결된다. 그 뿌리에는 ‘거룩하다’, ‘구별되다’는 의미가 있다. 정혼한 남녀는 아직 함께 살지는 않았지만, 이미 법적으로는 부부와 같은 관계로 여겨졌다. 만일 그 상태에서 남자가 죽으면 여자는 단순히 처녀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과부로 여겨질 정도였다.
바로 그때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를 찾아왔다. 그리고 마리아는 처녀의 몸으로 성령으로 잉태하게 되었다.
이 사실을 마리아가 홀로 감당했을 때, 그녀의 마음은 얼마나 떨렸을까. 하나님께 순종한다고 말했지만, 그 순종의 길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니었다. 사람들의 눈, 동네의 수군거림, 요셉의 충격, 앞으로 닥쳐올 오해와 고통이 모두 그 길 위에 놓여 있었다.
요셉 역시 마리아의 임신 소식을 들었을 때 깊은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는 의로운 사람이었고, 마리아를 공개적으로 부끄럽게 만들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래서 조용히 그 관계를 정리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밤, 꿈에 주의 사자가 나타났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요셉은 순종했다. 마리아를 데려왔다. 그러나 예수님을 낳을 때까지는 동침하지 않았다. 이렇게 예수님은 이 땅에 태어나셨다.
그러나 요셉과 마리아가 알고 있는 진실을 다른 사람들이 알았을까.
아마도 사람들의 눈에는 전혀 다르게 보였을 것이다. 정혼한 여자가 아이를 가졌다. 그것만으로도 마을 사람들의 입에는 많은 말이 오르내렸을 것이다. 사람들은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신비를 알지 못했다. 그들의 눈에는 마리아가 정혼 기간 중에 부정한 일을 저지른 것처럼 보였을 가능성이 컸다.
예수님께서 자라나는 동안, 그분을 둘러싼 이 오해의 그림자가 완전히 사라졌을까.
요한복음 8장을 보면, 유대인들이 예수님과 논쟁하는 장면이 나온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지만, 그들의 행동은 아브라함의 자손답지 않다고 말씀하셨다. 오히려 그들의 아비가 마귀라고까지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들은 분노 속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음란한 데서 나지 아니하였고 아버지는 한 분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
이 말은 단순한 자기변호처럼 들리지 않는다. 그 안에는 예수님을 향한 오래된 비난의 그림자가 스며 있는 듯하다. 유대인의 배경과 표현을 살려 번역한 성경에서는 이 구절을 “우리는 사생아가 아니다”라는 뉘앙스로 옮기기도 한다.
그 말 속에는 날카로운 가시가 있다.
“우리는 너와 다르다.”
“우리는 부정한 출생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이런 비난이 실제로 예수님을 향해 던져졌다면, 예수님의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은 결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히 평온하기만 한 시간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사람들의 오해 속에서 자라셨다. 하늘의 독생자이셨지만, 땅에서는 사생아라는 의심과 수군거림을 감당하셨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바르 미츠바 의식에 정식으로 참여할 수 있었을까.
전통과 공동체의 시선 속에서, 아버지의 인정과 축복을 받아야 하는 그 자리에서, 예수님은 온전히 환영받으셨을까. 어쩌면 사람들은 예수님을 향해 완전한 인정의 문을 열어주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육신의 아버지의 이름으로, 공동체의 이름으로, 깨끗한 출생의 이름으로 누군가를 인정하는 그 자리에서 예수님은 소외되셨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요단강에서 하늘이 열렸다.
사람들이 열어주지 않았던 문을 하나님께서 여셨다. 사람들이 망설였던 인정을 하나님께서 친히 선언하셨다. 땅의 공동체가 온전히 말해주지 못했던 축복을 하늘 아버지께서 직접 말씀하셨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이것은 예수님의 하늘로부터 온 바르 미츠바와도 같았다. 사람의 의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식이었다. 땅의 아버지가 아니라 하늘 아버지께서 친히 베푸신 인정의 자리였다. 사람들이 붙여준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불러주신 이름이었다.
너는 내 아들이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자다.
너는 내가 기뻐하는 자다.
아들에게 부어진 성령의 기름
그리고 그 자리에서 성령께서 임하셨다.
예수님은 이미 태생적으로 성령 안에 계신 분이었다. 그분의 내면은 하나님과 완전한 친밀함 가운데 있었다. 그래서 어린 시절부터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랑스러워 가셨다. 그분 안에는 하나님을 향한 순전함과 거룩함이 흘러넘쳤다.
그러나 요단강에서 임하신 성령의 역사는 또 다른 차원의 기름 부으심이었다. 그것은 공적 사역을 위한 성령의 임재였다. 위로부터 임하시는 능력,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에게 눌린 자를 자유케 하며, 하나님 나라를 나타내는 사역적 기름 부으심이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까지 성경은 그분이 어떤 기적을 행하셨다고 말하지 않는다. 요한복음 2장의 가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이 예수님의 첫 번째 표적으로 기록된다. 어린 시절 예수님이 장난처럼 기적을 행했다는 위경의 이야기들이 전해지기도 하지만, 성경은 그런 이야기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성경이 보여주는 예수님의 기적은 요단강에서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받으신 이후, 하나님 나라의 공적 사역 안에서 나타난다.
요한복음 3장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에게 성령을 한량없이 주신다고 말한다. 사도행전 10장은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고, 그분이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다고 증언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함께하셨기 때문이다.
이 장면을 바라보면, 우리는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단순히 어떤 종교적 감정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것은 하늘 아버지의 유업이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시는 선물이다. 아버지께서 사랑하는 자에게 부어주시는 능력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겠느냐.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누가복음은 이 말씀을 더 분명하게 풀어준다.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아버지는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고 싶어 하신다. 세상의 아버지들도 부족하지만 자녀를 위해 좋은 것을 준비한다. 어떤 유대인 가정에서는 아이의 바르 미츠바를 위해 오랜 시간 재정을 모으고, 아이가 성장하여 사회로 나아갈 때 큰 축복의 선물로 전달하기도 한다. 그것은 단순한 돈이 아니다. 아버지가 자녀의 미래를 위해 준비한 마음이다.
그렇다면 하늘 아버지는 어떠하실까.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녀에게 주시기 원하시는 가장 귀한 유업은 성령이다. 성령의 임재, 성령의 능력,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다. 세상의 어떤 재정적 축복보다 더 깊고, 어떤 인간적 인정과 격려보다 더 완전한 선물이다.
시편 133편은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아름다움을 노래한다. 그 모습은 아론의 머리에 부어진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을 타고 옷깃까지 흘러내리는 것 같다고 말한다. 또한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리는 것 같다고 말한다. 그리고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신다고 한다. 곧 영생이다.
기름은 흘러내린다. 머리에 부어진 기름은 수염으로, 옷깃으로 흘러간다.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은 한 사람에게만 머물지 않고,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흘러간다. 예수 그리스도께 부어진 성령의 기름 부으심은 그분의 몸 된 교회 안으로 흘러간다. 머리 되신 그리스도께 임한 기름은 몸 된 우리에게까지 내려온다.
야고보서도 병든 자가 있으면 교회의 장로들을 청하고, 그들이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기도하라고 말한다. 기름은 단순한 상징물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와 치유와 회복을 바라보게 하는 믿음의 표지다. 우리는 기름 자체를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름이 가리키는 성령의 임재와 능력을 의지한다.
오늘, 우리의 영적인 바르 미츠바
그러므로 요단강에서 예수님께 일어난 일은 우리에게도 깊은 초대가 된다.
우리에게도 하늘 아버지의 음성이 필요하다.
사람들의 인정만으로는 살 수 없다. 육신의 아버지가 아무리 좋은 말을 해주어도, 그것만으로 영혼 깊은 곳의 갈증이 다 채워지지 않는다. 반대로 육신의 아버지에게서 충분한 축복을 받지 못한 사람도 있다. 인정받지 못하고 자란 사람, 사랑한다는 말을 듣지 못한 사람, 존재 자체를 기뻐한다는 축복을 받아보지 못한 사람도 있다.
그러나 하늘 아버지는 말씀하신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너는 내 사랑하는 딸이다.
내가 너를 기뻐한다.
그 음성이 한 사람의 영혼 위에 임할 때, 인생은 다시 시작된다. 세상이 붙인 이름이 벗겨지고, 상처가 붙인 이름이 무너지고, 죄책감과 수치심이 속삭이던 거짓 이름들이 힘을 잃는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이름이 남는다.
사랑받는 자.
기뻐하심을 입은 자.
하나님의 자녀.
그때 우리는 영적인 바르 미츠바와 바트 미츠바의 자리로 들어간다. 사람의 인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정 앞에 선다. 세상의 축복이 아니라 하늘의 축복을 구한다. 육신의 아버지가 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깊고 완전한 축복을 하나님 아버지께 구한다.
그리고 그 축복의 중심에는 성령이 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구해야 한다. 단순히 감동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다. 더 화려한 종교적 체험을 얻기 위해서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삶을 살아내기 위해서다. 광야를 통과하기 위해서다. 시험 앞에서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다. 마귀에게 눌린 사람들을 자유케 하고, 상한 마음을 위로하고, 하나님 나라의 선한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다.
예수님은 요단강에서 아버지의 음성을 들으신 후, 곧바로 광야로 가셨다. 사랑받는 아들이라는 선언은 시험이 없는 삶으로 인도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선언은 광야를 통과할 수 있는 힘이 되었다.
이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광야가 없어진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었다는 것은 시험이 사라진다는 뜻도 아니다. 오히려 때로는 아버지의 음성을 들은 바로 그 사람이 광야로 인도된다. 그러나 그는 혼자가 아니다. 하늘의 음성을 품고 간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입고 간다. 아버지의 인정 안에서 시험을 마주한다.
우리도 그렇다.
우리의 인생에도 광야가 있다. 사람들이 몰라주는 시간, 오해받는 시간, 배고픔과 외로움의 시간,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 시간이 있다. 그러나 그 광야에 들어가기 전에, 아니 그 광야 한복판에서라도 우리는 다시 들어야 한다.
너는 내 사랑하는 자다.
내가 너를 기뻐한다.
그리고 우리는 구해야 한다.
아버지, 제게 성령을 주옵소서.
아버지, 제게 하늘의 기름 부으심을 주옵소서.
예수님께 부어진 그 성령의 능력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안에 흐르게 하옵소서.
오늘이 우리의 영적인 바르 미츠바, 바트 미츠바의 날이 되기를 소망한다. 하늘 아버지께 직접 축복을 받는 날, 세상이 주지 못한 인정을 하나님께 받는 날, 육신의 아버지의 축복보다 더 깊고 완전한 하늘의 축복을 받는 날이 되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그 축복이 단지 말로만 끝나지 않기를 소망한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으로 우리 안에 실제가 되기를 소망한다. 우리의 마음에 임하고, 우리의 가정에 흐르고, 교회 안에 흘러가며, 병든 자와 눌린 자와 상한 자들에게까지 흘러가기를 소망한다.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하늘 아버지의 음성을 들으셨던 것처럼, 우리도 오늘 그 음성 앞에 서야 한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너는 내 사랑하는 딸이다.
내가 너를 기뻐한다.
그 음성을 들은 사람은 광야를 지나갈 수 있다.
그 음성을 들은 사람은 시험 앞에서 다시 설 수 있다.
그 음성을 들은 사람은 더 이상 사람의 인정만을 구걸하며 살지 않는다.
그는 하늘 아버지의 축복을 받은 사람으로 살아간다.
그리고 그 사람의 머리 위에, 삶 위에, 사명 위에 성령의 기름이 조용히 흐르기 시작한다.
이 말씀은 원래 시편 기자가 극심한 고난과 하나님의 압도적인 다루심 속에서 고백한 시적 표현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영적인 세계의 한 중요한 원리를 묵상하게 한다.
깊은 것이 깊은 것을 부른다.
영적인 것이 영적인 것을 부른다.
선한 것은 선한 것을 부르고, 악한 것은 악한 것을 부른다.
이것을 우리는 “영적 공명의 법칙”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공명이라는 것은 같은 성질의 울림이 서로 반응하는 것이다. 한쪽에서 어떤 울림이 일어나면, 같은 성질을 가진 다른 쪽도 함께 울린다. 영적인 세계에도 이와 비슷한 원리가 있다. 사람의 내면에 무엇이 있느냐에 따라 그 사람은 어떤 것에 끌리고, 무엇에 반응하고, 어떤 세계와 연결된다.
사람 안에 빛이 있으면 빛을 향해 나아간다. 그러나 사람 안에 어둠이 있으면 어둠과 반응한다. 사람 안에 진리에 대한 갈망이 있으면 진리를 향해 나아가지만, 사람 안에 죄를 붙들고 싶은 마음이 있으면 빛을 피하고 어둠 속에 머무르려 한다.
사람은 자기 안에 있는 것과 공명한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3장 20절과 2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악을 행하는 사람은 빛을 싫어한다. 왜냐하면 빛 앞에 서면 자기 안의 어둠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반대로 진리를 따르는 사람은 빛으로 나아간다. 왜냐하면 그 안에 있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람은 결국 자기 안에 있는 것과 공명한다. 내 안에 있는 것이 나의 끌림을 만들고, 나의 끌림이 나의 선택을 만들고, 나의 선택이 나의 삶의 방향을 만들어 간다.
그러므로 영적인 삶에서 중요한 것은 단지 겉으로 어떤 행동을 하느냐만이 아니다. 내 안에 무엇이 있느냐가 중요하다. 내 영혼의 깊은 곳에 무엇이 자리 잡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왜냐하면 깊은 것은 깊은 것을 부르기 때문이다.
어둠은 어둠을 부른다
1969년 8월 8일 밤, 미국 사회를 충격에 빠뜨린 끔찍한 사건이 있다.
자정 무렵, 텍스 왓슨이라는 남자가 운전하는 포드 자동차가 베벌리힐즈의 한 주택가에 도착한다. 그 차에는 텍스 왓슨 외에도 세 명의 젊은 여성이 타고 있다. 당시 텍스 왓슨은 23살이고, 나머지 여성들도 19살에서 22살 사이의 젊은 사람들이다.
그 시간에 스티븐 패런트라는 고등학생이 그 건물의 관리인을 방문했다가 돌아가고 있었다. 그는 전자시계와 라디오 같은 물건을 팔기 위해 그곳에 들렀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이 네 사람이 담을 넘어 집 안으로 침입하려 하고, 떠나려던 스티븐 패런트를 발견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 어린 청년을 총으로 쏘아 죽인다.
그 집 안에는 몇 사람이 있었다. 파티가 끝난 뒤 두 사람은 각자 방으로 들어가 잠들어 있고, 두 사람은 거실에서 쉬고 있었다. 그런데 침입자들은 그들을 칼로 잔혹하게 공격했다. 그날 밤 가장 마지막으로 죽은 사람이 샤론 테이트다. 샤론 테이트는 당시 헐리우드의 떠오르는 배우이고, 영화감독 로만 폴란스키의 아내였다. 무엇보다 그는 임신 8개월이 넘은 상태였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칼에 찔려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마지막 순간까지 애원했다고 전해진다. “제발 아기만은 살려 달라.” 그러나 그 간절한 애원도 그들의 잔혹함을 멈추게 하지 못한다. 이 사건은 당시 미국 사회 전체를 충격에 빠뜨린 가장 끔찍한 살인 사건 가운데 하나가 된다.
원래 목표가 아니었던 사람들
이 사건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중요한 점이 있다.
그날 모두 5명이 살해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들이 원래 죽이려고 했던 사람은 그 5명 가운데 아무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날 죽임당한 사람들은 그 살해 계획의 직접적인 대상이 아니다.
이 살인을 사주한 사람은 찰스 맨슨이다.
맨슨은 자신을 따르는 추종자들을 거느리고 있던 인물이다. 그가 원래 분노를 품고 있던 대상은 테리 멜처라는 음악 프로듀서다. 테리 멜처는 비치 보이스 같은 유명한 음악가들과도 연결되어 있던 프로듀서다. 찰스 맨슨은 음악가로 인정받고 싶어 하고, 자신의 음악을 담은 데모 테이프를 보냈지만 인정받지 못한다. 그는 그 일에 분노하고, 그 분노가 결국 살인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문제는 테리 멜처가 이미 그 집에서 이사한 뒤라는 것이다. 그는 사건이 일어나기 몇 달 전에 다른 곳으로 이사했다. 그 집에는 당시 로만 폴란스키와 샤론 테이트가 살고 있었다. 로만 폴란스키는 영화 촬영을 위해 유럽에 나가 있고, 샤론 테이트와 손님들만 그 집에 있었다. 그런데 찰스 맨슨의 추종자들은 그 집을 테리 멜처의 집으로 생각하고 침입하고, 결국 전혀 다른 사람들이 잔혹하게 죽임을 당한 것이다.
비극 앞에서 던져지는 무거운 질문
여기서 우리는 아주 무거운 질문 앞에 선다.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이시다.
하나님은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이시다.
주님은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신다.
한 사람의 생명은 천하보다 귀하다.
그렇다면 왜 이 5명은 그렇게 애꿎게 죽임을 당하는가?
이것은 그냥 우연인가?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매우 조심해야 한다.
어떤 비극을 두고 “그 이유는 이것이다”라고 단정하는 것은 위험하다. 고난당한 사람들의 죽음 앞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판결을 내려서는 안 된다. 욥기의 친구들이 바로 그 일을 했다. 그들은 욥의 고난을 보고 너무 쉽게 원인을 단정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말을 책망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사건을 두고 “그들이 이런 이유 때문에 죽었다”고 말할 수 없다. 그것은 우리의 권한이 아니다.
영적인 세계는 중립적이지 않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외면해서도 안 된다. 영적인 세계는 중립적이지 않다. 인간의 선택은 반드시 파장을 일으킨다. 죄는 죄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어둠은 어둠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사람이 심은 것, 문화가 심은 것, 영적으로 열어 놓은 문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파장을 만들어 낸다.
그 파장이 언제,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돌아오는지 우리는 다 알 수 없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둔다고.
깊은 것이 깊은 것을 부른다.
어둠은 어둠을 부른다.
악한 것은 악한 것을 부른다.
비극을 단정하지 말되, 영적 원리는 외면하지 말라
비극을 단정하지 말되, 영적 원리는 외면하지 말라
여기서 우리는 균형을 가져야 한다.
한쪽으로는 조심해야 한다. 특정한 사건, 특정한 비극, 특정한 죽음을 놓고 “이것은 반드시 어떤 죄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라고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도 누가복음 13장에서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죽은 사람들을 두고, 그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죄가 많아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다른 한쪽으로는 영적인 원리를 외면해서도 안 된다.
성경은 분명히 죄에는 열매가 있다고 말한다. 불순종에는 결과가 있다고 말한다.
악을 심으면 악한 열매가 있고, 육체를 위해 심으면 썩어질 것을 거두며, 성령을 위하여 심으면 영생을 거둔다고 말씀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극의 원인을 함부로 단정하지 않으면서도, 영적인 세계의 원리는 두려운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이 사건의 정확한 영적 원인은 하나님만 아신다. 그러나 이 사건은 우리에게 두려운 질문을 던진다. 내가 무엇을 심고 있는가? 내가 무엇과 공명하고 있는가? 내가 어떤 세계에 마음을 열고 있는가?”
이것이 중요하다.
우리의 선택은 영적 파장을 만든다
죄는 개인적인 문제로만 끝나지 않는다
우리는 흔히 죄를 개인적인 문제로만 생각한다. 내가 혼자 마음속으로 품은 생각, 내가 혼자 보는 것, 내가 혼자 즐기는 것, 내가 혼자 선택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죄를 그렇게 가볍게 보지 않는다.
죄는 반드시 파장을 일으킨다.
욕망은 반드시 방향을 만든다.
반복된 선택은 반드시 길을 만든다.
열어 둔 문은 반드시 무엇인가를 불러들인다.
처음에는 작은 호기심처럼 보일 수 있다. 처음에는 단순한 문화생활처럼 보일 수 있다. 처음에는 그저 재미로 보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내 안의 어둠과 공명하기 시작하면, 그것은 단순한 오락으로 끝나지 않는다.
사람은 자기가 계속 바라보는 것을 닮아간다.
사람은 자기가 반복해서 듣는 것에 영향을 받는다.
사람은 자기가 즐기는 것과 영적으로 연결된다.
마음은 영적인 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의 눈과 귀와 마음을 지키라고 말씀한다. 잠언 4장 23절은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말씀한다.
왜 마음을 지켜야 하는가? 마음은 단지 감정의 장소가 아니기 때문이다. 마음은 영적인 문이다. 마음은 공명의 자리다. 내 마음이 무엇을 사랑하느냐에 따라 내 삶의 방향이 달라진다. 내 마음이 무엇에 반응하느냐에 따라 내가 어떤 세계와 연결되는지가 달라진다.
빛을 사랑하는 마음은 빛으로 나아간다.
어둠을 즐기는 마음은 결국 어둠으로 끌려간다.
빛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
예수님은 요한복음 3장에서 분명히 말씀하신다.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악을 행하는 사람의 특징은 단지 죄를 짓는 것이 아니다. 빛을 싫어한다는 것이다. 말씀을 불편해한다. 책망을 싫어한다. 회개의 자리로 나아오기를 거부한다. 왜냐하면 빛 앞에 서면 자기의 행위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리를 따르는 사람은 다르다.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진리를 따르는 사람은 완벽한 사람이 아니다. 죄가 전혀 없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빛으로 나아간다. 말씀 앞에 선다. 회개한다. 자기 안의 어둠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피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어둠 속에 머무는 것보다 빛 가운데 고침받는 것을 더 원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복과 저주를 가르는 중요한 차이다.
복과 저주를 가르는 차이
복 있는 사람은 죄가 전혀 없는 사람이 아니다.
복 있는 사람은 빛으로 나아가는 사람이다.
저주의 길에 서 있는 사람은 단지 실수한 사람이 아니다.
저주의 길에 서 있는 사람은 빛을 미워하고 어둠을 붙드는 사람이다.
영적 공명의 법칙은 바로 여기서 작동한다. 빛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은 점점 더 빛의 세계와 공명한다.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은 점점 더 하나님의 뜻과 공명한다. 기도의 자리를 지키는 사람은 점점 더 성령의 인도하심과 공명한다.
그러나 죄를 숨기고, 어둠을 즐기고, 불순종을 합리화하는 사람은 점점 더 어둠과 공명한다. 처음에는 작은 타협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것이 삶의 분위기가 되고, 결국 삶의 방향이 된다.
무엇과 공명하고 있는가?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나는 지금 무엇과 공명하고 있는가?
내 마음은 무엇에 반응하고 있는가?
나는 빛을 향해 가고 있는가, 어둠을 향해 가고 있는가?
나는 진리를 사랑하고 있는가, 아니면 진리가 드러내는 불편함을 피하고 있는가?
우리가 매일 보는 것, 듣는 것, 생각하는 것, 즐기는 것, 가까이하는 사람들, 반복해서 머무는 분위기들은 모두 우리 안에 어떤 울림을 만든다. 그 울림은 우리의 영혼을 형성하고, 우리의 영혼은 다시 우리의 선택을 만들어 낸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단지 교회에 나오는 문제만이 아니다. 내 영혼이 무엇과 연결되어 있는가의 문제다. 내 영혼이 무엇을 부르고 있는가의 문제다. 내 안의 깊은 것이 무엇을 향해 울고 있는가의 문제다.
깊은 것이 깊은 것을 부른다.
내 안에 말씀의 깊이가 있으면 말씀의 세계가 열린다.
내 안에 기도의 깊이가 있으면 하나님의 임재를 향한 갈망이 일어난다.
내 안에 거룩함의 깊이가 있으면 죄가 불편해진다.
내 안에 사랑의 깊이가 있으면 하나님의 긍휼이 흘러나온다.
그러나 내 안에 욕망의 깊이가 있으면 유혹이 쉽게 들어온다.
내 안에 분노의 깊이가 있으면 다툼이 반복된다.
내 안에 음란의 깊이가 있으면 음란한 것들이 계속 나를 끌어당긴다.
내 안에 교만의 깊이가 있으면 하나님의 말씀조차 내 기준으로 판단하게 된다.
결국 영적인 삶은 내 안의 깊이를 무엇으로 채우느냐의 싸움이다.
빛을 심고, 생명을 부르라
복과 저주는 어느 날 갑자기 임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 그것은 오래전부터 심겨 온 것들의 열매다. 우리가 무엇을 심었는지, 무엇을 사랑했는지, 무엇과 공명했는지가 시간이 지나 열매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부터 빛을 심어야 한다. 말씀을 심어야 한다. 기도를 심어야 한다. 순종을 심어야 한다. 거룩함을 심어야 한다. 선한 것을 심어야 한다.
누군가의 병이 나았을 때, 오랫동안 바라던 일이 이루어졌을 때, 막혔던 길이 열렸을 때, 사람들은 그제야 감사라는 말을 꺼낸다. 마치 감사는 좋은 소식 뒤에 따라오는 작은 그림자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감사는 그렇게 늦게 도착하는 감정이 아니다. 성경은 감사의 자리를 훨씬 더 깊은 곳에 둔다. 상황보다 깊은 곳, 감정보다 깊은 곳, 심지어 삶의 형편보다 더 깊은 곳에 감사의 뿌리를 내린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18절에서 말한다.
“범사에 감사하라.”
범사에.
모든 상황 속에서.
해가 비치는 날뿐 아니라 비가 내리는 날에도.
기도가 응답된 것처럼 보이는 날뿐 아니라, 하늘이 침묵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날에도.
이 말 앞에서 사람은 자연스럽게 멈칫한다. 좋은 일이 있을 때 감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모든 상황 속에서 감사하라니. 인생에는 좋은 일만 일어나지 않는다. 억울한 일도 있고, 오래도록 설명되지 않는 실패도 있다. 믿었던 사람에게서 받은 상처도 있고, 마음 깊은 곳에 가라앉은 배신의 기억도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되지 않는 일들이 있다.
그런데 어떻게 감사할 수 있을까.
어떻게 모든 상황 속에서 감사할 수 있을까.
성경은 그 대답을 억지 웃음에서 찾지 않는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된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라고 쉽게 말하지도 않는다.
성경은 감사의 가장 깊은 뿌리를 한 가지 사실에서 찾는다.
내가 존재한다는 것.
하나님께서 나를 있게 하셨다는 것.
감사는 거기서 시작된다.
감사의 가장 깊은 자리
하박국은 감사하기 어려운 시대를 살았다.
그가 바라본 들판에는 열매가 없었다. 무화과나무는 무성하지 않았고, 포도나무에는 열매가 없었다. 감람나무에는 소출이 없었고, 밭에는 먹을 것이 없었다. 우리에는 양이 없었고, 외양간에는 소가 없었다.
그것은 단순히 생활이 조금 불편해진 정도가 아니었다. 당시 농경 사회에서 그것은 삶의 바닥이 무너지는 일이었다. 내일의 식탁이 사라지는 일이었고, 가족의 생존이 흔들리는 일이었다. 땅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고, 나무는 침묵했고, 외양간은 비어 있었다.
사람은 그런 상황에서 쉽게 말할 수 없다. 감사하겠다고, 기뻐하겠다고,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없다.
그런데 하박국은 그 자리에서 고백한다.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그의 감사는 환경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환경은 감사의 근거를 하나씩 지우고 있었다. 감사할 이유를 찾으려 하면 오히려 감사할 수 없는 이유들만 눈앞에 쌓였다.
그런데도 하박국은 감사했다.
그는 상황보다 더 깊은 곳을 보고 있었다. 무너진 밭보다, 비어 있는 외양간보다, 사라진 열매보다 더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보고 있었다. 그의 감사는 조건에서 올라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 시각에서 솟아난 것이었다.
진짜 감사는 조건에서 나오지 않는다.
존재에 대한 깨달음에서 나온다.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신다
다윗은 시편 139편에서 더 깊은 자리로 내려간다.
그는 자신의 존재를 바라본다. 자신의 삶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묵상한다. 그리고 하나님께 말한다.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다윗은 자신이 우연히 이 세상에 던져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존재는 아무렇게나 조합된 결과가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모태에서 그를 지으셨다. 그의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부터 하나님은 그를 보셨다.
물론 사람의 탄생 이야기는 언제나 깨끗하고 완전하지만은 않다. 그 안에는 인간의 죄와 실수가 개입되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축복받지 못한 임신 속에서 태어난다. 어떤 사람은 버림받은 이야기 속에서 태어난다. 어떤 사람은 폭력과 아픔의 기억 속에서 생명을 얻는다.
사람의 눈으로 보면 모든 것이 복잡하다. 어떤 탄생은 불완전해 보이고, 어떤 시작은 상처투성이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람의 실수와 죄가 생명의 마지막 설명이 될 수는 없다.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허락과 계획 없이 이 땅에 태어나는 존재는 없다. 사람의 이야기가 아무리 깨어져 있어도, 하나님은 그 깨어진 이야기 속에서 생명을 부르신다. 그리고 그 생명은 우연이 아니다.
생명의 탄생 자체를 생각해 보아도 그렇다. 수억 개의 정자 가운데 단 하나가 난자를 만난다. 그 하나가 지금의 나를 있게 했다. 만일 다른 하나가 난자를 만났다면 지금의 나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와 조금 다른 버전의 내가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전혀 다른 사람이 태어났을 것이다.
다른 얼굴.
다른 목소리.
다른 성격.
다른 기질.
다른 생각.
다른 삶.
그 수많은 가능성의 바다 속에서 하나님은 지금의 나를 존재하게 하셨다.
그 사실 앞에서 사람은 조용해진다. 내가 여기 있다는 것. 지금 이 이름으로, 이 얼굴로, 이 몸과 이 기질을 가지고 존재한다는 것. 그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러므로 감사는 내가 무엇을 가졌는가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감사는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에서 시작된다.
하나님께서 나를 있게 하셨다.
그것이 감사의 첫 문장이다.
나를 받아들이는 믿음
그러나 사람은 자기 자신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거울 앞에서 자신의 얼굴을 미워하기도 하고, 자신의 성격을 부끄러워하기도 한다. 어떤 기질은 너무 예민하다고 느껴지고, 어떤 조건은 불공평하다고 느껴진다. 어떤 출발점은 너무 늦었고, 어떤 배경은 너무 초라하다고 생각한다.
마음속에서 오래된 질문들이 들려온다.
왜 나는 이렇게 태어났을까.
왜 나는 저 사람처럼 되지 못했을까.
왜 내게는 저런 재능이 없을까.
왜 내 삶은 이런 자리에서 시작되었을까.
그 질문들은 평소에는 조용히 숨어 있다. 그러다가 누군가와 자신을 비교하는 순간, 마음 깊은 곳에서 다시 고개를 든다. 마치 오랫동안 닫혀 있던 서랍을 열었을 때 먼지가 피어오르듯이, 그 질문들은 다시 떠오른다.
그러나 믿음은 그 자리에서 다른 말을 듣는 것이다.
하나님은 실수로 나를 만드시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모습이 아닐 수는 있다. 내가 선택한 조건이 아닐 수는 있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출발점일 수는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 나를 지으셨다.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가나안 땅을 분배받을 때,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땅을 고르지 않았다. 제비뽑기로 각 지파의 기업이 정해졌다. 어떤 땅은 넓어 보였고, 어떤 땅은 척박해 보였을 것이다. 어떤 지파는 마음에 들었을 것이고, 어떤 지파는 아쉬웠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땅은 우연히 떨어진 땅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줄로 재어 주신 땅이었다.
그래서 다윗은 고백한다.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내게 줄로 재어 주신 구역을 다시 바라보는 것이다. 내 삶의 자리, 내 몸, 내 기질, 내 조건, 내 출발점을 하나님 앞에서 다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은 체념이 아니다. 운명을 받아들이는 무력한 태도도 아니다. 이것은 믿음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아시고, 나를 지으셨고, 나를 이 자리에 두셨다는 사실을 신뢰하는 것이다.
나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것.
나의 삶의 자리를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으로 받아들이는 것.
그곳에서 감사가 시작된다.
관점이 인생을 결정한다
자신의 존재를 감사로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삶의 사건들을 바라보는 눈도 달라진다.
같은 컵에 콜라가 반쯤 담겨 있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반밖에 없네.” 다른 사람은 말한다. “아직 반이나 남았네.”
콜라의 양은 그대로다. 바뀐 것은 컵이 아니라 시선이다.
인생도 그렇다. 사건 자체가 우리 인생의 전부를 결정하지 않는다. 더 깊이 들어가 보면, 그 사건을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우리의 삶을 결정한다.
가나안 정탐꾼들이 그랬다. 열두 명은 같은 땅을 보았다. 같은 포도송이를 보았고, 같은 성읍을 보았고, 같은 사람들을 보았다. 그 땅은 포도 한 송이를 두 사람이 메고 와야 할 만큼 풍성한 땅이었다.
그러나 열 명은 그 땅을 악평했다.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보다 자신들이 본 거인들을 더 크게 보았다. 약속의 땅을 보고도 두려움을 말했다. 풍성함을 보고도 위험을 말했다. 같은 현실 앞에 섰지만 전혀 다른 해석을 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같은 사건 속에서 절망을 본다.
어떤 사람은 그 사건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본다.
인생의 성공과 실패는 환경 자체보다 그 환경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요셉이 배운 하나님의 시각
요셉의 인생은 그 사실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 준다.
그는 형들에게 미움을 받았다. 미움은 말로만 끝나지 않았다. 형들은 그를 애굽에 노예로 팔았다. 낯선 땅, 낯선 언어, 낯선 집에서 그는 종이 되었다.
그는 성실했다. 보디발의 집에서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성실함이 곧바로 보상으로 돌아오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다.
요셉의 인생은 한동안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의 연속이었다. 누군가 어두운 방 안에서 그의 삶의 불을 하나씩 꺼 버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어둠의 시간을 지나며 요셉은 하나님의 시각을 배웠다. 그는 사건만 보지 않았다. 사건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되었다.
세월이 흐른 뒤, 요셉은 자신을 팔았던 형들을 다시 만난다. 그 순간 요셉은 과거를 복수의 재료로 사용할 수도 있었다. 형들의 죄를 하나하나 꺼내어 그들 앞에 놓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다른 말을 한다.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그리고 다시 말한다.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요셉은 형들의 죄를 부정하지 않았다. 형들은 실제로 그를 팔았다. 그 배신은 실제였고, 그 상처도 실제였다.
그러나 요셉은 그 위에서 일하시는 더 큰 하나님의 섭리를 보았다. 인간의 악한 선택 위에서도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는 길을 열고 계셨음을 보았다.
그는 사건 자체보다 사건 안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았다.
이것이 믿음의 해석이다.
고난 속에서 배우는 감사
예레미야애가도 같은 길을 걷는다.
예레미야는 고통을 모른 척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고초와 재난을 기억했다. 쑥과 담즙 같은 시간을 기억했다. 마음은 낙심되었다. 가슴에는 무거운 돌이 내려앉은 것 같았다.
그는 고난을 가볍게 말하지 않았다. 아픈 것은 아픈 것이었다. 무너진 것은 무너진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예레미야는 고난 자체를 바라보다가, 그 고난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은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을 보았다.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았지만 끝나지 않았다. 아직 진멸되지 않았다. 아침마다 새로워지는 하나님의 성실하심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말한다.
“사람은 젊었을 때에 멍에를 메는 것이 좋으니… 주께서 그것을 그에게 메우셨음이라.”
무거운 멍에조차 하나님의 허락과 섭리 안에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깨닫는 사람은 고난을 단순한 저주로만 보지 않는다. 그 속에서 하나님을 배운다. 자신을 배운다. 믿음을 배운다.
그리고 어느 날 알게 된다. 고난은 나를 끝내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나를 더 깊은 곳으로 데려가기 위해 허락된 시간이었다는 것을.
십자가를 앞두고 드린 감사
감사의 완전한 본은 예수님께서 보여 주셨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 제자들과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나누셨다. 그 자리에서 떡을 드셨고, 잔을 드셨고, 감사 기도를 드리셨다.
그 감사의 자리 뒤에는 배신이 있었다. 체포가 있었다. 조롱이 있었고, 채찍이 있었고, 십자가가 있었다.
예수님은 그것을 알고 계셨다.
자신이 팔릴 것을 아셨다.
제자들이 흩어질 것을 아셨다.
베드로가 부인할 것을 아셨다.
십자가의 고통도 아셨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감사하셨다.
유월절 만찬 후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를 건너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셨다. 밤하늘에는 니산월의 보름달이 떠 있었을 것이다. 성전에서는 어린양들의 피가 흘러 수로를 따라 기드론 시내로 내려가고 있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그 피가 흐르는 시내를 건너가셨다.
그분은 알고 계셨다. 자신이 바로 그 어린양의 길을 걸어가고 있음을. 자신이 곧 찢기고 부어질 것을. 그러나 그 길 끝에 구원이 있음을.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시면서도 감사하셨다.
그 감사는 상황에 대한 감사가 아니었다. 고통이 좋아서 드리는 감사가 아니었다. 그것은 아버지의 뜻을 신뢰하는 감사였다. 십자가 너머에 있는 구원을 보는 감사였다.
감사는 좋은 상황에 대한 반응이 아니다.
감사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의 언어다.
모든 감사의 뿌리
결국 감사는 이렇게 깊어져 간다.
먼저 나의 존재 자체에 대한 감사가 있다.
그 감사는 내 삶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감사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 감사가 깊어질 때, 우리는 마침내 범사에 감사하는 자리로 나아간다.
감사는 감정의 문제가 아니다.
존재와 믿음의 문제다.
내가 우연히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믿는 사람. 하나님께서 나를 지으셨고, 나를 보셨고, 나를 이 자리에 두셨다는 것을 믿는 사람. 내 삶의 모든 과정 속에서도 하나님이 일하고 계신다는 것을 믿는 사람.
그 사람은 결국 감사하게 된다.
사도 바울은 다시 우리에게 말한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조금 낯선 단어다. 오래된 서랍 속에 넣어 둔 단어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이 단어 안에는 역사를 바라보는 성경의 깊은 눈이 담겨 있다. 경륜이란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세상을 운영하시는 방식이다.
세상은 그냥 흘러가지 않는다.
시간은 우연히 쌓이지 않는다.
역사는 바람에 날리는 신문지처럼 아무 방향 없이 굴러가지 않는다.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이시다. 그리고 그분은 자신의 뜻을 따라 세상을 이끌어 가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물어야 한다. 지금 우리는 어떤 시대를 살고 있는가. 앞으로 이 세상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하나님은 이 시대 가운데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
신약성경 가운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와 미래에 대해 가장 집중적으로 말하는 책은 요한계시록이다. 그리고 구약성경 가운데 요한계시록과 가장 깊이 연결되는 책은 다니엘서다. 요한계시록은 다니엘서와 따로 떨어진 책이 아니다. 요한계시록은 다니엘서의 연장선에 있다. 다니엘서에서 봉인된 것이 요한계시록에서 열린다.
다니엘서 마지막 부분에서 하나님은 계시의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다니엘에게 마지막 때의 특징을 말씀하신다.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
다니엘 12장 4절 말씀이다.
여기에는 마지막 때를 보여 주는 두 가지 표지가 있다. 하나는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한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지식이 더한다는 것이다.
빨리 왕래하는 시대
백여 년 전만 하더라도 미국에서 한국까지 오려면 배를 타고 수십 일을 가야 했다. 바다 위에서 긴 시간을 보내야 했다. 파도와 바람과 어둠을 지나야 했다. 한국에 도착해도 끝이 아니었다. 제물포항에서 전라도 지역으로 가려면 말을 타고 일주일을 가야 했다.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사람은 하루 안에 전 세계 거의 어느 곳이든 갈 수 있다. 공항에 가서 비행기를 타고, 몇 시간 자고 일어나면 다른 대륙에 도착해 있다. 예전에는 평생 한 번도 가 보지 못할 곳을 이제는 출장처럼 다녀온다.
길은 짧아졌고, 세계는 작아졌다.
사람들은 빠르게 움직인다.
도시와 도시 사이, 나라와 나라 사이, 대륙과 대륙 사이를 바쁘게 오간다.
비행기, 고속철도, 자동차, 인터넷, 스마트폰. 이 모든 것이 인간의 이동과 연결 방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우리는 늘 어딘가로 가고 있고, 동시에 어디에도 머물지 못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지식이 폭발하는 시대
또 하나는 지식의 폭발이다.
인류가 보유하고 있는 지식의 총량이 두 배가 되는 기간을 생각해 보면, 이 시대가 얼마나 빠르게 변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과거에는 지식이 두 배가 되는 데 수십 년이 걸렸다. 1990년대에는 약 25년 정도가 걸린다고 말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속도가 훨씬 빨라졌다. 인공지능과 디지털 기술의 발달로 인해 지식은 인간이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앞으로는 지식의 총량이 며칠 단위로 폭증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지식은 많아졌다. 정보는 넘친다. 사람들은 손바닥 안의 작은 화면으로 세계의 소식을 읽고, 전쟁을 보고, 재난을 보고, 시장을 보고, 누군가의 삶을 본다. 그러나 그렇게 많은 것을 보면서도 정작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모른다.
많은 지식이 반드시 지혜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많은 정보가 반드시 진리를 의미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알기 때문에 더 깊은 혼란 속에 빠져 있다.
기후의 변화도 심상치 않다. 어느 여름, KTX를 타고 지방으로 내려가던 중 한 방송에서 기후 재난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한 전문가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지구는 더운 것이 아니라 끓고 있다.”
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마음에 남았다. 더운 것이 아니라 끓고 있다. 단순히 여름이 더워졌다는 말이 아니었다. 질서가 흔들리고 있다는 말이었다. 하늘과 땅과 바다의 리듬이 어긋나고 있다는 말이었다. 자연의 균형이 무너지고, 인간이 살아가는 환경 자체가 급격하게 변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이런 시대를 살면서 우리는 묻게 된다.
지금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
마지막 때는 어떤 방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가.
마지막 때의 두 흐름
많은 사람들이 마지막 때를 생각하면 먼저 재난을 떠올린다. 처처에 기근과 재난이 있고, 난리와 전쟁의 소문이 들리고, 지진과 전염병이 일어나고, 기독교에 대한 심각한 핍박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맞다. 성경은 그렇게 말한다. 마지막 때에는 세상이 흔들린다. 인간이 의지하던 것들이 흔들리고, 나라들이 흔들리고, 자연이 흔들리고, 사람들의 마음이 흔들린다.
그러나 또 다른 흐름도 있다. 마지막 때는 땅끝까지 복음이 전파되는 대부흥과 대추수의 시대이기도 하다. 수많은 영혼들이 주께 돌아오고, 열방 가운데 복음이 선포되며, 마지막 추수가 일어난다.
그렇다면 마지막 때는 재난과 심판의 시대인가. 아니면 부흥과 추수의 시대인가.
대답은 둘 다이다.
마지막 때에는 이 두 가지 일이 동시에 진행된다. 한편으로는 세상이 흔들리고, 전쟁과 기근과 재난과 핍박이 일어난다. 다른 한편으로는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되고, 전례 없는 대부흥과 영혼의 추수가 일어난다.
마치 한쪽 하늘에는 검은 구름이 몰려오고, 다른 한쪽 하늘에는 새벽빛이 비치는 것과 같다. 세상은 어두워지지만 하나님의 빛은 더 선명해진다. 심판의 소리는 커지지만 구원의 문도 활짝 열린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이 본격적으로 일어나기 전에, 하나님께서 가장 먼저 행하시는 일이 있다.
전쟁보다 먼저.
기근보다 먼저.
핍박보다 먼저.
대부흥과 추수의 거대한 물결보다 먼저.
하나님께서 먼저 손을 대시는 곳이 있다.
그곳은 세상이 아니다.
그곳은 권력자들의 궁전도 아니다.
그곳은 이방 민족들의 도시도 아니다.
그곳은 하나님의 집이다.
하나님의 집에서 시작되는 심판
베드로전서 4장 17절은 이렇게 말씀한다.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하나님의 집.
그것은 교회를 말한다.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공동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사람들을 말한다.
마지막 때 가장 먼저 시작되는 일은 세상의 심판이 아니다. 하나님은 먼저 자신의 집을 다루신다. 먼저 교회를 다루신다. 먼저 하나님의 백성을 정결하게 하신다.
이것이 마지막 때를 위한 하나님의 경륜이다.
우리는 이 말씀을 오늘날 전 세계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과 연결해서 보아야 한다. 지난 몇 년 동안, 세계적으로 큰 영향력을 가졌던 교회와 사역자들 가운데 충격적인 사건들이 계속해서 드러났다. 한때 전 세계 젊은이들의 예배 문화에 큰 영향을 끼쳤던 글로벌 교회 운동 안에서도 지도자들의 도덕적 실패와 리더십 문제가 드러났다.
또한 세계적인 기도운동과 선교운동 안에서도 오랫동안 존경받던 사역자들과 관련된 문제들이 드러났다. 겉으로는 거룩하고 강력해 보였던 사역의 내부에 감추어진 죄와 왜곡된 권위 구조가 드러난 것이다.
한국 교회도 예외가 아니다. 대형교회와 교단 지도부, 선교단체와 청년 사역의 영역에서 여러 논란과 스캔들이 이어졌다. 어떤 곳에서는 리더십 세습과 권력 집중의 문제가 제기되었고, 어떤 곳에서는 성적인 문제와 재정 문제, 권위주의적 운영이 드러났다. 어떤 사역자는 마지막 때와 부흥을 말했지만, 그 사역의 내면에는 조작과 왜곡, 권력화의 문제가 드러났다.
물론 우리는 개별 사건을 함부로 단정하거나 정죄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더 큰 흐름은 보아야 한다. 전 세계적으로, 동시다발적으로, 교회와 사역의 내부에 감추어져 있던 것들이 드러나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몇몇 지도자의 실패만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집을 흔들고 계신 것이다.
왜 하나님은 먼저 교회를 다루시는가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왜 하나님은 이 일을 가장 먼저 행하시는가.
왜 세상을 심판하시기 전에 교회를 심판하시는가.
왜 악한 세력과 불의한 권력과 타락한 문화를 먼저 치지 않으시고, 자신의 집을 먼저 다루시는가.
베드로전서 4장 17절과 18절은 이렇게 이어진다.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떠하며,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서리요.”
하나님은 세상을 심판하시기 전에 먼저 교회를 다루신다. 복음을 알지 못하는 자들을 심판하시기 전에, 먼저 복음을 안다고 말하는 자들을 다루신다.
왜냐하면 교회가 먼저 정결해져야 하기 때문이다.
교회가 먼저 주님께 복종해야 하기 때문이다.
교회가 먼저 심판을 통과해야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의와 진리를 선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린도후서 10장 3절에서 6절은 이것을 영적 전쟁의 언어로 설명한다.
“우리가 육신으로 행하나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바울은 계속해서 말한다.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6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너희의 복종이 온전하게 될 때에 모든 복종하지 않는 것을 벌하려고 준비하는 중에 있노라.”
순서가 중요하다.
먼저 “너희의 복종”이 온전하게 되어야 한다. 그 다음에 “모든 복종하지 않는 것”을 벌할 준비가 된다. 다시 말해 교회가 먼저 그리스도께 복종해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이 먼저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정렬되어야 한다. 그래야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이 시작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교회를 정화하신다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께 온전히 복종하는 교회로 만드신다는 뜻이다. 그 준비가 될 때, 하나님은 그 다음 단계로 세상을 향한 심판과 부흥과 추수의 역사를 시작하신다.
심판은 버림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심판이라는 단어를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집에서 시작되는 심판은 교회를 멸망시키기 위한 심판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교회를 버리시기 위한 심판이 아니다.
이것은 정결케 하시는 심판이다.
사랑의 심판이다.
회복을 위한 심판이다.
하나님은 교회를 포기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다루신다. 사랑하시기 때문에 흔드신다. 마지막 때에 교회를 통해 이루실 일이 너무 크기 때문에, 먼저 교회 안에 있는 불순물을 드러내신다.
감추어진 죄를 드러내신다.
왜곡된 권위를 드러내신다.
사람의 야망과 욕심으로 세워진 구조를 드러내신다.
겉으로는 화려하지만 속은 무너진 사역이 있다. 숫자는 많지만 그리스도의 성품은 없는 공동체가 있다. 능력은 말하지만 거룩은 잃어버린 사역자들이 있다. 부흥을 말하지만 자기 왕국을 세우는 리더십이 있다.
하나님은 그것을 더 이상 그냥 두지 않으신다.
이 과정은 아프다. 두렵다. 그리고 때로는 수치스럽다. 그러나 이것은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만이 아니라,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나님은 마지막 때에 정결한 교회를 원하신다.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이기는 자들을 원하신다.
이기는 자들을 얻기 위한 흔드심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일곱 교회에 말씀하신다. 그 말씀의 반복되는 결론은 이것이다.
“이기는 자는.”
예수님은 마지막 때의 교회 가운데 이기는 자들을 찾으신다. 하나님의 집에서 시작되는 심판을 넉넉히 통과하는 자들. 흔들림 속에서도 주님께 끝까지 순종하는 자들. 죄와 타협하지 않고 정결함을 지키는 자들. 사람의 평가보다 주님의 눈을 두려워하는 자들.
이들이 바로 이기는 자들이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정결한 신부로 준비된 사람들이다. 마지막 때 전 세계를 휩쓸게 될 대부흥의 주역들이다.
하나님은 왜 이 시대에 전 세계 교회들을 흔드시는가. 왜 유명한 사역들을 흔드시고, 거대한 구조를 흔드시고, 감추어진 죄를 드러내시는가.
이기는 자들을 얻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은 마지막 때의 부흥을 아무에게나 맡기지 않으신다. 영혼의 대추수를 감당할 그릇은 정결해야 한다. 능력보다 중요한 것은 순종이다. 은사보다 중요한 것은 거룩이다. 영향력보다 중요한 것은 깨어짐이다.
하나님은 깨어진 자를 찾으신다. 자신을 높이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자를 찾으신다. 사람들의 박수와 인정을 구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잃어버린 영혼을 위해 우는 자를 찾으신다.
웨일즈의 밤
120년 전, 이 원리를 보여 주는 한 사람이 있었다. 에반 로버츠.
그는 웨일즈 부흥의 중심 인물로 알려져 있다. 1904년 10월 31일, 모리아 채플 교육관에서 17명의 청년들과 함께 기도회가 시작되었다. 아주 작은 모임이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 작은 기도회에서 부흥이 시작되었다.
당시 에반 로버츠는 26살의 청년이었다. 그는 탄광에서 광부로 일하며 13년 동안 부흥을 위해 기도해 온 사람이었다.
1903년, 그는 하나님께서 웨일즈에 강력한 부흥을 주셔서 아주 짧은 시간에 10만 명을 하나님께로 인도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행하시기 전에 먼저 에반 로버츠 자신을 다루셨다.
1904년에 들어서면서 그는 자기 안에 갈등이 있음을 보게 되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과 사람들이 원하는 것 사이에서 흔들리는 마음이 있었다. 하나님의 뜻을 원한다고 말하면서도 사람들의 인정과 기대를 의식하는 마음이 남아 있었다.
그해 9월, 그는 친구들의 권유로 세트 조슈아라는 무명의 사역자의 집회에 참석했다. 그 집회에서 세트 조슈아가 이렇게 기도했다.
“Lord, bend us.”
주여, 우리를 굴복시켜 주소서.
그 순간 성령께서 에반 로버츠에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이것이 바로 네게 필요한 것이다.”
그의 가슴은 터질 것 같았다. 온몸은 심하게 떨렸다. 그는 기도했다.
“Lord, bend me. Bend me.”
주여, 나를 굴복시켜 주소서. 나를 꺾으소서.
그는 하나님 앞에 고꾸라졌다. 눈물이 시냇물처럼 흘러내렸다. 그 기도가 응답되었을 때, 하늘로부터 사랑과 평화와 기쁨이 임했다. 잃어버린 영혼들에 대한 연민이 강물처럼 그의 안에 밀려왔다.
그 후 그는 새벽 1시에 일어나 여러 시간을 기도하곤 했다. 당시 그의 기도는 단 하나였다.
“Lord, bend the church to save the world.”
주여,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교회를 굴복시켜 주소서.
이 기도 끝에 웨일즈 부흥이 일어났다.
부흥은 단지 열정에서 오지 않았다. 부흥은 깨어짐에서 왔다. 부흥은 사람의 야망이 꺾이고, 교회가 하나님 앞에 굴복하는 자리에서 왔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구부리실 때, 세상을 구원하는 역사가 시작되었다.
하나님은 먼저 우리를 꺾으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식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구원하시기 전에 먼저 교회를 다루신다. 열방을 흔드시기 전에 먼저 자신의 백성을 흔드신다. 대부흥을 부으시기 전에 먼저 그 부흥을 감당할 그릇을 정결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지금 전 세계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흔들림을 단순히 부정적인 사건으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물론 죄는 죄이다. 피해자는 보호받아야 하고, 가해자는 책임을 져야 하며, 교회는 회개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그 배후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을 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집에서부터 심판을 시작하고 계신다. 감추어진 것을 드러내고 계신다. 사람의 이름으로 세워진 왕국들을 흔들고 계신다. 은사와 영향력 뒤에 숨어 있던 죄와 욕망을 드러내고 계신다.
왜인가.
교회를 무너뜨리기 위해서가 아니다.
교회를 정결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기는 자들을 얻기 위해서이다.
마지막 때 전 세계를 휩쓸 대부흥의 주역들을 준비시키기 위해서이다.
야곱이라는 이름의 밤
수천 년 전, 성경에는 최초의 이기는 자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 야곱이다.
야곱은 얍복강 나루에서 하나님의 사자와 씨름했다. 밤새 씨름했다. 긴 밤이었다. 어둠과 땀과 숨소리와 두려움이 뒤섞인 밤이었다.
그리고 동이 틀 무렵, 야곱은 새 이름을 받았다.
이스라엘.
그 이름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라는 뜻을 담고 있다.
그런데 야곱은 어떻게 이겼는가. 힘으로 이긴 것이 아니다. 그는 환도뼈가 부러졌다. 완전히 꺾였다. 더 이상 자기 힘으로 설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이겼다.
이것이 성경적 승리의 역설이다.
하나님 앞에서 이기는 길은 내가 강해지는 것이 아니다. 내가 깨어지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을 이기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 완전히 굴복함으로 하나님 안에서 이기는 자가 되는 것이다.
야곱은 꺾임으로 이겼다. 에반 로버츠도 꺾임으로 부흥의 통로가 되었다. 하나님은 오늘도 그런 사람들을 찾고 계신다.
자기 힘으로 무엇인가를 이루려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완전히 굴복한 사람. 주님께 꺾인 사람. 주님께 붙들린 사람.
그런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은 마지막 때의 일을 이루실 것이다.
지금은 하나님의 집이 다루어지는 때
지금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집에서부터 심판을 시작하시는 때이다.
이것은 두려운 일이다. 그러나 동시에 소망의 일이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교회를 정결하게 하신다. 하나님은 이기는 자들을 준비시키신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정결한 신부를 얻기 원하신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 전 세계를 휩쓰는 대부흥과 대추수의 역사를 이루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시대의 흔들림 앞에서 단지 다른 사람의 죄를 구경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다른 사역자의 실패를 비판하는 사람으로만 서 있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이 시작된다는 것은 나와 무관한 일이 아니다. 교회의 심판은 내 삶의 정결함과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물어야 한다.
주님, 내 안에는 감추어진 죄가 없는가.
주님, 내 안에는 사람의 인정을 구하는 야망이 없는가.
주님, 내 안에는 겉으로는 사역을 말하지만 속으로는 자기 왕국을 세우려는 욕심이 없는가.
주님, 내 생각과 마음과 동기가 온전히 그리스도께 복종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이 시작될 때, 우리는 남을 보며 말할 것이 아니라 먼저 자신을 하나님 앞에 세워야 한다.
주여, 우리를 굴복시켜 주소서
에반 로버츠의 기도를 다시 붙들어야 한다.
Lord, bend us.
주여, 우리를 굴복시켜 주소서.
Lord, bend me.
주여, 나를 굴복시켜 주소서.
Lord, bend the church to save the world.
주여,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교회를 굴복시켜 주소서.
이 기도는 쉬운 기도가 아니다. 하나님께 나를 꺾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내 고집을 꺾어 달라고, 내 야망을 꺾어 달라고, 내 죄를 드러내 달라고, 내 자아를 굴복시켜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기도 없이 참된 부흥은 오지 않는다. 교회가 꺾이지 않으면 세상은 살아나지 않는다. 하나님의 백성이 먼저 정결해지지 않으면, 세상을 향한 심판과 부흥의 역사는 온전히 흘러가지 않는다.
우리는 지금 마지막 때의 경륜 속에 서 있다. 세상은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지식은 폭증하고 있다. 기후와 국제 질서는 흔들리고 있다. 전쟁과 재난과 핍박의 소식이 들려온다. 동시에 땅끝까지 복음이 전파될 대부흥과 대추수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 앞에 먼저 일어나는 일이 있다.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이 시작된다.
교회가 먼저 정결해진다.
이기는 자들이 준비된다.
신부가 단장된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 하나님은 열방을 흔드실 것이다.
하나님의 도전에 응답하라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도전 앞에 서 있다.
이런 하나님의 도전을 느끼고 있는가.
이런 하나님의 도전에 굴복하기 원하는가.
하나님께서 나를 꺾으시고, 우리를 꺾으시고, 교회를 꺾으셔서 세상을 구원하시도록 기도할 수 있는가.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이 시작될 때 두 종류의 사람이 드러난다.
하나는 심판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는 사람이다.
또 하나는 심판을 통과하며 정결해지는 사람이다.
하나는 자기 죄를 숨기고 도망치는 사람이다.
또 하나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 회개하고 이기는 자로 세워지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이기는 자들을 찾고 계신다. 야곱처럼 꺾임으로 이기는 자들. 에반 로버츠처럼 “주여, 나를 굴복시켜 주소서”라고 기도하는 자들. 마지막 때 예수 그리스도의 정결한 신부로 준비될 자들을 찾고 계신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기도는 이것이어야 한다.
주여, 우리를 굴복시켜 주소서.
주여, 나를 굴복시켜 주소서.
주여,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교회를 굴복시켜 주소서.
부흥은 꺾인 사람들을 통해 온다.
대추수는 정결한 교회를 통해 온다.
마지막 때 하나님의 경륜은 하나님의 집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집에서 시작된 심판은 결국 교회를 무너뜨리는 심판이 아니다. 교회를 정결하게 하고, 이기는 자들을 세우며, 세상을 구원하는 부흥의 문을 여는 하나님의 거룩한 손길이다.
어떤 소식은 귀로 듣고 지나가지 않는다.
신문의 한 줄, 유튜브의 한 장면, 누군가가 보낸 메시지 하나가 마음 깊은 곳에 내려앉는다. 처음에는 사실인지 아닌지를 따지게 된다. 자료를 비교하고, 보도를 살피고, 논리적으로 들여다본다. 그러나 어느 순간 판단보다 먼저 통증이 찾아온다.
교회의 이름이 세상 앞에서 무너질 때가 있다.
목회자의 이름이 죄와 함께 불릴 때가 있다.
하나님의 이름이 조롱의 문장 속에 섞여 들어갈 때가 있다.
그때 마음은 단순히 화가 나는 것이 아니다.
슬프다.
무겁다.
그리고 부끄럽다.
최근 한 대형교회 담임목사와 관련된 불륜 의혹과 재판 보도가 공개되면서, 그 파장은 신문과 유튜브를 통해 빠르게 퍼져 나갔다. 몇 년 전부터 이 문제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던 사람들도 있었지만, 이번에는 그 일이 더 공식화된 형태로 드러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이런 일은 단지 한 사람의 스캔들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교회 전체의 신뢰를 흔든다. 세상 사람들은 목회자 한 사람을 보며 교회를 판단하고, 교회를 보며 하나님을 조롱한다. 그러니 이 문제는 단지 윤리적 사건이 아니라 영적인 사건이다.
그 일을 두고 기도하던 어느 날 밤, 마음이 무너졌다. 너무 아파서 통곡하게 되었다. 그리고 3일 동안 금식하게 되었다. 몇 명이라도 함께 하나님 앞에 엎드려 회개하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페이스북에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무너진 한국교회를 위한 참회의 금식기도 제안]
사랑하는 믿음의 동역자 여러분께.
요즘 한국교회의 현실을 바라보며 깊은 슬픔과 무거운 마음으로 이 글을 씁니다.
반복되는 목회자들의 타락과 도덕적 추락, 세상 앞에서 무너져 내린 교회의 신뢰,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이 조롱받는 현실 앞에서 마음이 너무 아픕니다.
특별히 교회를 섬긴다고 말했던 목회자들의 죄와 탐욕, 음란과 교만, 권력과 성공을 좇아갔던 모습들은 한국교회를 깊이 병들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누군가를 향해 손가락질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목회자들의 죄는 단지 몇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기도하지 못했고 거룩을 잃어버렸으며 성공주의와 세속화를 묵인해 온 한국교회 전체의 아픔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비난보다 참회의 눈물이 필요한 때입니다.
정죄의 언어보다 회개의 무릎이 필요한 때입니다.
그래서 저는 먼저 하나님 앞에서 3일 금식기도를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한국교회의 참회와 회개, 그리고 회복을 위한 릴레이 금식기도에 함께하실 분들을 찾고 있습니다.
한 끼 금식도 괜찮습니다.
짧은 시간의 기도도 괜찮습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한국교회를 위해 눈물로 기도해 주실 분들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먼저 회개했으면 좋겠습니다.
강단의 거룩을 잃어버린 죄를.
십자가보다 성공을 추구했던 죄를.
성령보다 인간의 능력과 시스템을 의지했던 죄를.
교회를 세상의 영광으로 채우려 했던 죄를.
목회자들이 하나님의 두려움보다 사람의 박수와 권력을 더 사랑했던 죄를.
그리고 그러한 모습들을 보면서도 함께 아파하며 기도하지 못했던 우리의 무관심까지도 하나님 앞에 내려놓았으면 좋겠습니다.
한국교회는 다시 거룩을 회복해야 합니다.
다시 십자가 앞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다시 눈물의 기도를 회복해야 합니다.
작은 한 끼의 금식과 한 사람의 눈물이
무너진 한국교회를 다시 세우는 시작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금식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한 질문이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왜 오늘날의 교회가 이렇게 되었을까.
이것은 단지 한국교회만의 문제인가.
아니면 미국교회와 전 세계 교회들이 함께 겪고 있는 시대적 징후인가.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문제가 생긴 것인가.
하나님의 집에서 시작되는 일
종말론과 관련하여 우리가 반드시 주목해야 할 말씀이 있다.
베드로전서 4장 17절이다.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여기서 하나님의 집은 교회다.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공동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말한다.
마지막 때가 되면 많은 사람들이 먼저 세상의 재난을 떠올린다. 전쟁, 기근, 지진, 전염병, 경제적 붕괴, 국제 질서의 혼란, 기독교를 향한 핍박 같은 것들을 생각한다. 물론 성경은 그런 일들을 말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보다 먼저 주목해야 할 일이 있다.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이 말은 무섭다. 그러나 동시에 깊은 소망을 품고 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버리셨기 때문에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다. 교회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마지막 때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위해 교회를 다시 정결하게 하시기 위해 심판하신다.
그렇다면 왜 베드로는 이 말을 했을까.
왜 하나님은 마지막 때의 첫 번째 스텝을 세상이 아니라 교회로부터 시작하시는가.
그 질문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한 단어 앞에 서게 된다.
값싼 은혜.
값싼 은혜라는 병
디트리히 본회퍼는 1937년에 그의 대표작 『나를 따르라』, 혹은 『제자도의 대가』로 알려진 책을 썼다. 그 책에서 그는 “값싼 은혜”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값싼 은혜는 회개를 요구하지 않는 용서의 설교이며, 교회 권징 없는 세례이며, 고백 없는 성찬이며, 제자도 없는 은혜이며, 십자가 없는 은혜이며,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 없는 은혜이다.
이 말은 당시 독일교회를 향한 외침이었다.
독일에서 기독교는 오랫동안 국가교회의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태어나면서 부모의 신앙을 따라 세례를 받았고, 자연스럽게 기독교인이 되었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일이기보다 사회적 정체성에 가까워졌다.
그 결과 제자도의 강조가 약해졌다.
사람들은 기독교인이었지만,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도록 부름받았다는 감각은 희미했다. 예배는 있었지만 순종은 약했고, 은혜는 말했지만 십자가는 흐려졌다.
그런 상황 속에서 히틀러가 등장했다. 독일의 재건과 민족주의를 내세운 그의 통치 앞에서 독일교회는 분별력을 잃었다. 많은 교회가 저항하지 못했고, 어떤 교회는 순응했으며, 어떤 이들은 지지하기까지 했다.
본회퍼는 그 뿌리를 값싼 은혜에서 보았다.
회개 없는 은혜.
제자도 없는 은혜.
십자가 없는 은혜.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 없는 은혜.
그것은 복음처럼 보였지만 복음이 아니었다. 은혜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안에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대가가 사라져 있었다.
복음은 결코 값쌀 수 없다
사실 “값싼 은혜의 복음”이라는 말은 모순이다.
복음은 결코 값쌀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음을 주시기 위해 치르신 대가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다. 죄 없으신 그분에게 인류의 모든 죄를 담당하게 하셨다. 십자가 위에서 그 아들에게 모든 진노와 저주와 심판이 쏟아지게 하셨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고 절규하실 때에도, 하나님은 그 고통을 외면하시는 듯한 침묵 속에 계셨다. 그 침묵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두려운 대가를 치르고 주어진 것인지를 보여 준다.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의 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은 결코 값싼 것이 될 수 없다.
그러나 현대교회는 어느 순간 은혜를 값싸게 만들기 시작했다. 물론 모든 교회가 그렇다는 말은 아니다. 지금도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자신을 희생하며 하나님 나라를 위해 자기 절제와 순교적인 삶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현대교회 안에는 값싼 은혜가 복음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큰 영향을 미친 것이 사실이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신다.”
“그저 예수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
“죄를 범하면 회개하면 된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 말들이 전부 틀린 것은 아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은 복음의 핵심이다. 회개하면 용서받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안에서 예수님의 주권과 제자도의 부르심, 십자가의 길이 사라질 때 생긴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다고 말하면서, 그분을 주님으로 따르지 않는 신앙.
용서는 원하지만 순종은 원하지 않는 신앙.
천국은 원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통치는 거부하는 신앙.
은혜는 말하지만 자기 부인과 십자가는 말하지 않는 신앙.
이것이 값싼 은혜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한국교회 안에서도 이런 변화는 조용히 일어났다.
과거 순복음교회 시대에 많이 불렸던 찬송 가운데 “부름 받아 나선 이 몸”이 있다. 그 찬송의 3절 가사는 원래 이렇게 이어진다.
“존귀 영광 모든 권세 주님 홀로 받으소서
멸시 천대 십자가는 제가 지고 가오리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
이 가사는 참으로 귀하다.
존귀와 영광과 모든 권세는 주님 홀로 받으시고, 나는 멸시와 천대와 십자가를 지고 가겠다는 고백이다. 그리고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겠다는 고백이다.
이것은 제자의 고백이다.
십자가를 아는 사람의 노래다.
자기 이름보다 주님의 이름을 더 사랑하는 사람의 찬양이다.
그런데 어느 시점에 이 가사가 바뀌어 불리기도 했다.
“멸시 천대 십자가는 예수님이 지셨으니.”
물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맞다.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은 예수님이시다. 그러나 예수님은 동시에 우리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의 십자가를 면제해 주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의 길을 열어 준다.
원래 가사를 쓴 이호운 목사는 1969년에 이미 세상을 떠났고, 작곡자인 이유선 장로가 여의도순복음교회 측에 원래 가사대로 불러 달라고 항의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 작은 가사 변경은 어쩌면 현대교회의 한 단면을 보여 준다.
멸시와 천대와 십자가를 내가 지겠다는 고백에서, 예수님이 이미 지셨으니 나는 은혜를 누리기만 하면 된다는 방향으로 조금씩 이동한 것이다.
물론 은혜는 누려야 한다. 그러나 은혜를 받은 사람은 주님을 따른다. 참된 은혜는 제자를 만든다. 십자가의 은혜는 십자가의 사람을 만든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는 삶.
이것이 사라질 때, 교회는 은혜를 말하면서도 점점 미지근해진다.
미지근한 라오디게아 교회
요한계시록 3장에서 예수님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말씀하신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차지도 않았고 뜨겁지도 않았다. 미지근했다. 예수님은 그 미지근함을 견디기 어려워하셨다.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이 말씀은 충격적이다.
예수님은 미지근한 신앙을 역겹다고 느끼신다. 차라리 차든지 뜨겁든지 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라오디게아 교회는 자신들이 어떤 상태인지 몰랐다.
그들은 말했다.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신다.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자기 인식과 주님의 평가가 완전히 달랐다. 그들은 부요하다고 생각했지만, 주님은 가난하다고 하셨다. 그들은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주님은 그들이 눈멀고 벌거벗었다고 하셨다.
이것이 값싼 은혜가 만들어 내는 가장 위험한 결과다.
자신이 괜찮다고 생각한다.
부요하다고 생각한다.
은혜 안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주님의 눈에는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상태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신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심판은 사랑 없는 분노가 아니다.
책망은 버림의 표시가 아니다.
징계는 포기의 언어가 아니다.
주님은 사랑하시기 때문에 책망하신다.
사랑하시기 때문에 징계하신다.
사랑하시기 때문에 회개하라고 부르신다.
왜 하나님은 교회를 먼저 심판하시는가
왜 마지막 때 하나님의 집에서부터 심판이 시작되는가.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의 피값으로 세우신 복음이 값싼 은혜의 복음으로 변질되는 것을 그냥 보실 수 없기 때문이다.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의 피다. 그런데 교회가 그 복음을 값싼 위로와 종교적 안정감으로 바꾸어 버렸다. 예수님을 왕으로 선포하기보다, 예수님을 내 삶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도구처럼 소개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보다 죽어서 천당 가는 복음을 훨씬 더 많이 말했다. 제자의 길보다 축복받는 길을 더 많이 말했고, 자기 부인보다 자기 성취를 더 많이 말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교회를 먼저 다루신다.
값싼 은혜를 가르친 사람들을 다루신다.
그것을 받아들인 사람들을 다루신다.
그대로 살아온 교회를 다루신다.
특별히 교회 지도자들을 다루신다.
하나님은 세상을 심판하시기 전에 먼저 자신의 집을 정결하게 하신다. 복음을 회복하시기 위해서다. 십자가를 회복하시기 위해서다. 왕이신 예수님의 주권을 회복하시기 위해서다.
교회가 먼저 회개해야 한다.
교회가 먼저 복음의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
교회가 먼저 미지근함에서 깨어나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집에서 시작되는 심판의 의미다.
마지막 때의 순서
마지막 때의 흐름을 생각해 볼 때, 우리는 몇 가지 순서를 보게 된다.
먼저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이 시작된다. 교회가 흔들리고, 감추어진 것이 드러나고, 값싼 은혜의 구조가 무너지고, 하나님께서 교회를 정결하게 하신다.
그와 동시에 세상에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징조들이 나타난다.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한다. 처처에 기근과 지진과 전염병이 일어난다. 국제 질서는 흔들리고, 사람들의 마음은 두려움으로 가득해진다.
그리고 그 속에서 두 가지 일이 동시에 일어난다.
전 세계적인 핍박.
그리고 전 세계적인 부흥.
핍박은 교회를 무너뜨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성경과 교회 역사는 반복해서 보여 준다.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 된다. 핍박 속에서 교회는 더 정결해지고, 복음은 더 선명해지며, 성도들은 더 깊은 헌신으로 나아간다.
마지막 때의 대부흥은 값싼 은혜에 길들여진 교회를 통해 오지 않는다. 그 부흥은 왕이신 예수님께 온전히 순복한 사람들을 통해 온다. 십자가를 알고, 제자도를 알고,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사람들을 통해 온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4장 14절에서 말씀하셨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여기서 천국 복음은 단순히 죽어서 천당 가는 복음만을 말하지 않는다. 헬라어 원문의 의미를 따라 말하면 “그 왕국의 복음”이다.
왕국의 복음.
이 말은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말하는 것만으로 충분한가. 죽어서 천국 간다고 말하는 것만으로 충분한가.
물론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는다. 이것은 복음의 핵심이다. 그러나 왕국의 복음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왕국의 복음은 이렇게 묻는다.
이 세상 나라가 전부가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
하늘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나라가 있다.
예수님은 그 나라의 왕이시다.
당신은 이분을 주님과 왕으로 인정하고, 그분의 통치 아래 들어가겠는가.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다.
이것이 왕국의 복음이다.
왕이신 예수께 복종하는 사람들
마태복음 24장 14절의 말씀은 단순히 복음 전도 프로그램이 전 세계에 퍼진다는 뜻만이 아니다. 왕국의 백성들이 살아내는 복음, 왕이신 예수님의 주권 아래 온전히 순복하는 사람들이 증거하는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된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찾고 계신다.
고린도후서 10장 3절에서 6절은 영적 전쟁의 본질을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육신으로 행하나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그리고 이어서 말한다.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너희의 복종이 온전하게 될 때에 모든 복종하지 않는 것을 벌하려고 준비하는 중에 있노라.”
여기에도 순서가 있다.
먼저 우리의 복종이 온전해져야 한다.
그 후에 모든 복종하지 않는 것을 벌할 준비가 된다.
하나님은 자신에게 온전히 복종하는 사람들을 찾고 계신다. 그런 교회를 찾고 계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 이 세상을 치유하고 다스리기 원하시기 때문이다.
마지막 때의 대부흥은 이런 사람들을 통해 일어난다.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들에게 성령을 물 붓듯이 부으시고, 그들을 통해 왕국의 복음을 온 세상에 증거하게 하신다.
이런 사람들이 마지막 때의 주인공들이다.
유명한 사람들이 아닐 수 있다.
큰 플랫폼을 가진 사람들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 복종한 사람들이다.
자기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시킨 사람들이다.
자기 삶의 우선순위를 하나님의 나라와 의에 둔 사람들이다.
심판은 절망이 아니라 회복의 시작이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집에서부터 심판을 시작하시는 것은 절망이 아니다. 패배가 아니다.
물론 그 과정은 아프다. 감추어진 죄가 드러날 때 교회는 수치를 겪는다. 지도자들의 타락이 폭로될 때 성도들은 상처를 받는다. 세상은 교회를 조롱하고, 하나님의 이름은 모욕당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더 깊이 보면, 하나님께서 교회를 버려두지 않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포기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흔드시는 것이다. 마지막 때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를 이루시기 위해, 먼저 교회를 정결하게 하시는 것이다.
심판은 무너뜨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회복시키기 위한 것이다.
징계는 끝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다시 세우기 위한 것이다.
흔드심은 패배가 아니라 정결의 과정이다.
하나님은 훼손된 복음을 회복하고 계신다. 값싼 은혜로 변질된 복음을 왕국의 복음으로 다시 세우고 계신다. 교회를 다시 십자가 앞으로 부르시고, 다시 제자의 길로 부르시고, 다시 왕이신 예수님의 통치 아래로 부르고 계신다.
그리고 그 교회를 통해 세상을 치유하고 다스리시려 한다.
이것은 우리 앞에 펼쳐질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를 촉진시키는 일이다.
먼저 그의 나라를 구하라
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 33절에서 말씀하셨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 말씀은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변하지 않는 우선순위가 되어야 한다.
먼저 그의 나라.
먼저 그의 의.
하나님의 나라가 먼저다. 예수님의 통치가 먼저다. 그분의 의가 먼저다. 나의 성공보다, 나의 안전보다, 나의 이름보다, 나의 사역보다, 나의 계획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가 있어야 한다.
주기도문도 마찬가지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이 기도는 단순한 예배 의식 속의 문장이 아니다. 이것은 왕국 백성의 가장 중요한 기도 제목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고,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기도다.
값싼 은혜는 이 기도를 약화시킨다.
왕국의 복음은 이 기도를 삶의 중심에 세운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를 그 왕국의 백성으로 부르고 계신다.
단순히 구원받은 개인으로만 살라고 부르시는 것이 아니다. 죽어서 천국에 갈 사람으로만 부르시는 것이 아니다. 지금 이 땅에서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하고, 그분의 통치 아래 살아가며, 그 왕국의 복음을 증거하는 백성으로 부르고 계신다.
교회가 흔들릴 때
교회가 흔들릴 때 우리는 두려워할 수 있다.
익숙했던 것이 무너지고, 존경했던 사람들이 넘어지고, 감추어진 죄들이 드러나고, 세상이 교회를 조롱할 때 마음은 흔들린다. 그러나 그때 우리는 더 깊이 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흔드시는 것은 무너뜨리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드러내시는 것은 수치를 주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책망하시는 것은 버리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시고 징계하신다.
하나님은 자신의 집을 정결하게 하신다.
하나님은 값싼 은혜를 걷어 내고 왕국의 복음을 회복하신다.
그러므로 지금은 손가락질보다 회개의 때다. 비난보다 금식과 기도의 때다. 다른 사람의 죄를 구경하는 시간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미지근함을 들여다보는 시간이다.
나는 왕이신 예수께 복종하고 있는가.
나는 값싼 은혜에 안주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십자가 없는 은혜를 원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고 있는가.
이 질문 앞에 서야 한다.
마지막 시대, 하나님이 교회를 흔드시는 이유는 분명하다.
교회를 버리기 위해서가 아니다.
교회를 다시 세우기 위해서다.
값싼 은혜를 끝내고 왕국의 복음을 회복하기 위해서다.
미지근한 교회를 깨워 이기는 교회로 세우기 위해서다.
세상을 향한 마지막 대부흥과 대추수를 준비하기 위해서다.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이 시작된다.
그러나 그 심판은 끝이 아니다.
그것은 거룩한 시작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교회를 흔드신다.
그리고 그 흔드심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을 부르신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사람들.
예수님을 구주만이 아니라 왕으로 모시는 사람들.
자기 생각과 욕망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시키는 사람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되, 왕국의 복음을 살아내는 사람들.
그들을 통해 마지막 때의 부흥은 올 것이다.
그리고 그 부흥은 값싼 은혜의 부흥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왕국의 복음이 회복되는 부흥일 것이다.
요단강 위로 하늘이 열렸다.
예수님께서 물에서 올라오실 때, 성령께서 비둘기 같은 형상으로 그분 위에 임하셨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아버지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그 장면은 얼마나 영광스러웠을까. 이 땅의 사람들은 그 의미를 다 알지 못했을지라도, 하늘의 천사들은 숨을 죽이고 그 순간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하늘 가득 환호성이 울려 퍼졌을 것이다.
드디어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 가운데 모습을 드러내셨다.
드디어 오랜 기다림이 끝나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가운데 가까이 왔다.
드디어 성령의 한량없는 기름 부으심을 입으신 예수님께서 놀라운 일을 시작하시게 되었다.
이제 곧 병든 자들이 일어나고, 귀신에게 눌린 자들이 자유를 얻고, 죽은 자들이 살아나며, 하늘의 권능이 땅 위에 나타나리라. 천사들은 그렇게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요단강에서 시작된 이 영광이 곧바로 능력의 사역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성령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이끌어 가셨다.
마태복음은 조용히 “성령에게 이끌리어 광야로 가사”라고 기록하지만, 마가복음은 더 강한 표현을 쓴다.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그 말에는 지체함이 없다. 머뭇거림도 없다. 성령께서 예수님을 즉시, 강하게, 거의 강권하듯 광야로 몰아가신 것이다. 하늘이 열리고 아버지의 음성이 들린 바로 그 다음 장면이 광야였다.
우리가 기대하는 순서는 대개 이렇지 않다. 성령의 불을 받으면 곧바로 능력의 사역이 열릴 것이라고 생각한다. 베드로가 성령을 받고 설교하자 삼천 명이 회개했던 것처럼, 바울이 주님을 만난 뒤 이방인의 사도로 쓰임 받은 것처럼, 교회사 속에서도 조지 휫필드, 존 웨슬리, 찰스 피니, D. L. 무디, R. A. 토레이, 길선주, 이성봉, 조용기 목사님과 같은 사람들이 성령의 권능을 받고 놀라운 사역으로 들어간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곧바로 사역의 현장으로 가지 않으셨을까.
왜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을 사람들 앞으로 보내기 전에, 아무도 없는 광야로 몰아가셨을까.
마지막 아담이 걸어가신 저주의 땅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보아야 한다.
고린도전서 15장은 예수님을 “마지막 아담”이라고 부른다.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지만,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셨다고 말한다. 또 첫 사람은 땅에서 나서 흙에 속한 자이지만,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다고 말한다.
예수님은 마지막 아담이시다. 첫 사람 아담이 죄로 열어놓은 저주의 역사를 끝내기 위해 오신 분이다. 동시에 예수님은 둘째 사람이시다.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셔서, 그분을 믿는 모든 사람들을 새로운 피조물로 세우시는 하나님의 새 공동체의 시작점이 되신 분이다.
그 일을 이루시기 위해 예수님은 아담이 넘어졌던 자리와 연결되는 자리로 들어가셔야 했다. 아담이 죄를 범함으로 무너진 인간의 역사를 다시 붙들기 위해, 예수님은 그 실패의 깊은 결과 속으로 들어가셔야 했다.
아담이 시험을 받았던 곳은 에덴동산이었다.
그곳은 완전한 낙원이었다. 먹을 것이 부족하지 않았고, 마실 것이 부족하지 않았고, 기온도 환경도 인간이 살기에 완전했다. 온갖 과일나무가 아름답게 자라고 있었고, 죄의 그림자는 아직 땅 위에 드리우지 않았다. 배고픔도 없었고, 목마름도 없었고, 죽음의 냄새도 없었다. 모든 것이 충만했고, 모든 것이 선했다.
그런데 아담은 그 완전한 자리에서 넘어졌다.
그리고 그 결과 땅은 저주를 받았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말씀하셨다.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라.”
에덴의 풍요는 깨어졌고,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기 시작했다. 인간은 땀을 흘려야 먹고 살 수 있게 되었다. 흙에서 난 사람은 다시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존재가 되었다.
광야는 바로 그 저주의 흔적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땅이다.
사람이 살기 어려운 곳.
물이 없는 곳.
열매가 없는 곳.
길이 없는 곳.
생명이 메마른 곳.
어쩌면 아담이 범죄하기 전의 세계에는 우리가 아는 의미의 광야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광야는 죄로 인해 황폐해진 세상의 상처 같은 곳이다. 생명이 물러간 자리, 저주가 남긴 빈자리,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는 오래 버틸 수 없는 자리다.
아담은 낙원에서 시험을 받았다. 모든 것이 만족한 자리에서, 배고픔도 목마름도 없는 완전한 조건 속에서 시험을 받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셨다. 저주받은 땅, 황폐한 자리,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에서 사십 일을 금식하신 후 시험을 받으셨다.
첫 사람은 풍요 속에서 넘어졌고, 마지막 아담은 결핍 속에서 이기셨다.
첫 사람은 동산에서 무너졌고, 둘째 사람은 광야에서 서셨다.
첫 사람은 먹을 것이 많은 자리에서 금지된 열매를 붙들었고, 예수님은 아무것도 없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말씀만 붙드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광야는 단순한 고독의 장소가 아니었다. 그곳은 구속사의 전장이었다. 아담의 실패가 남긴 저주의 땅 한복판에서, 마지막 아담이 새 인류의 길을 여시는 자리였다.
광야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곳
하나님의 백성에게 광야는 언제나 특별한 장소였다.
모세는 출애굽의 사명을 받기 전, 광야에서 사십 년을 보냈다. 애굽 왕궁에서 익힌 힘과 자신감이 깨어지는 시간이었고, 자신의 육신의 능력으로는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배워가는 시간이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도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기 전, 광야에서 사십 년을 보냈다. 그곳에서 그들은 낮아졌고, 시험을 받았고, 자기 마음이 어떤지 드러났다. 만나를 먹으며 인간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배워야 했다.
다윗도 왕으로 세워지기 전, 광야를 지나야 했다. 사울의 칼을 피해 도망 다니며, 동굴과 들판과 황량한 땅 사이를 전전했다.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지만 곧바로 왕좌에 앉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광야에서 하나님만 피난처로 삼는 법을 배웠다.
엘리야도 이세벨의 위협을 피해 광야로 들어갔다. 로뎀나무 아래에서 죽기를 구할 만큼 지쳤지만, 하나님은 그 광야에서 그를 먹이시고 다시 일으키셨다. 그리고 세미한 음성으로 그를 만나 주셨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에게 광야는 단순히 척박한 땅이 아니었다. 그곳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낮추시고, 빚으시고, 다시 부르시는 장소였다.
히브리어로 광야를 ‘미드바르’라고 한다. 흥미롭게도 이 단어는 ‘말씀하다’는 뜻을 가진 ‘다바르’와 소리가 맞닿아 있다. 그래서 광야는 단지 아무 말도 없는 빈 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자리처럼 느껴진다.
사람의 소리가 사라지는 곳.
익숙한 의지처가 무너지는 곳.
자기 힘으로 길을 만들 수 없는 곳.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기 시작한다.
누가복음 3장은 세례 요한의 등장을 이렇게 기록한다. 디베료 황제가 통치하고,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있으며, 헤롯과 빌립과 루사니아가 각 지역을 다스리고,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했다고 말한다.
세상에는 황제가 있었다.
총독이 있었다.
분봉 왕들이 있었다.
대제사장들이 있었다.
권력의 중심에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정치와 종교의 높은 자리에는 이름 있는 자들이 앉아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궁궐로 먼저 가지 않았다. 성전 권력의 중심으로 먼저 가지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은 빈 들에 있는 요한에게 임했다.
광야는 그런 곳이다.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는 곳이지만 하나님께서 주목하시는 곳이다.
사람의 말이 줄어드는 곳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는 곳이다.
세상의 중심에서는 멀어지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중심으로 가까이 들어가는 곳이다.
길이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길이 되시는 주님
하나님은 지금도 당신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광야로 이끄신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려는 사람들, 하나님께서 깊이 다루시려는 사람들, 하나님께서 더 가까이 만나시려는 사람들을 때로는 광야로 데려가신다. 그것은 버림이 아니다. 폐기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더 깊이 빚으시는 시간이다.
바울도 그러했다.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 그는 곧바로 대중적 사역의 무대로만 나아간 것이 아니었다. 그는 아라비아로 갔다. 광야의 시간 속에서 주님 앞에 머물렀다. 그 시간 동안 그는 훗날 신약성경 여러 권을 기록할 만큼 깊은 복음의 계시를 받았다.
광야에는 한 가지 특징이 있다.
광야에는 길이 없다.
만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이 나를 어딘가로 이끄시는 것 같은데, 그곳에 가보니 새로운 길이 보이고, 새로운 문이 열리고, 사람들의 도움과 기회가 기다리고 있다면 그것은 광야가 아닐 수 있다.
광야는 사방이 막힌 곳이다.
앞도 막혀 있고, 뒤도 막혀 있고, 오른쪽도 왼쪽도 막혀 있다. 땅을 보아도 길이 없고, 사람을 보아도 답이 없다. 그래서 결국 하늘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데, 이상하게도 그 하늘마저 막힌 것처럼 느껴지는 때가 있다.
기도해도 응답이 없는 것 같고, 말씀을 읽어도 가슴에 들어오지 않는 것 같고, 사람을 만나도 위로가 되지 않는 시간이 있다.
그때 우리는 묻는다.
하나님, 왜 저를 여기로 몰아오셨습니까.
왜 길이 없는 곳으로 데려오셨습니까.
왜 이렇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리로 저를 밀어 넣으셨습니까.
그러나 광야에는 하나님의 목적이 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광야로 이끄실 때는, 그 광야에서 이루시려는 일이 있다. 그 목적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사람은 쉽게 그곳을 빠져나오지 못한다. 발버둥을 치면 시간이 더 길어질 때도 있다. 광야에서 가장 빠른 길은 항복이다. 자기 힘을 내려놓고, 자기 방식을 내려놓고, 자기 계산과 욕심을 주님의 발 앞에 내려놓는 것이다.
그 시간은 결코 쉽지 않다.
광야 한복판에 있을 때는 그곳이 아름답게 보이지 않는다. 모래는 뜨겁고, 바람은 차갑고, 마음은 메마르고, 내일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지나고 나서 돌아보면 알게 된다. 광야는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었다. 그것도 이전과는 다르게, 훨씬 깊이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었다.
하나님의 음성이 더 생생해지는 곳.
내 자아의 소리가 작아지는 곳.
내가 붙들고 있던 것들이 얼마나 약한지 드러나는 곳.
그리고 하나님 한 분만으로 사람이 살 수 있다는 것을 배우는 곳.
광야는 아픈 곳이지만, 지나고 나면 가장 복된 곳이 된다.
광야에서 깨어지는 것과 다시 들리는 음성
나에게도 그런 시간이 있었다.
1988년 가을이었다. 그것은 어떤 윤리적인 죄 때문은 아니었다. 매일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살던 사람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큰 문제가 없어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더 깊은 곳을 만지셨다. 그것은 죄의 행위라기보다 자아의 문제였다.
석 달 동안 하나님은 나를 깊이 다루셨다.
그 시간은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지금 돌아보면, 그 시간은 제 신앙생활 가운데 가장 축복된 시간이었다. 만일 그 시간이 없었다면 나는 참된 영적인 것이 무엇인지 몰랐을지도 모른다. 익숙한 종교 언어를 말하고, 매너리즘에 빠져 설교하고, 목회를 하나의 직업처럼 감당하는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겉으로는 목회자였지만, 속으로는 삯꾼 목자처럼 살아갔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종종 목회자들을 만나면 그 이야기를 들려준다.
하나님께서 광야로 몰아가시는 시간은 무의미하지 않다고. 그 시간은 고통스럽지만, 가장 복된 시간이 될 수 있다고. 그곳에서 사람은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고, 자기 안에 남아 있던 욕심과 자아를 보게 되며, 정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이 되어가기 시작한다고.
신명기 8장은 이렇게 말한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광야는 마음이 드러나는 곳이다.
풍요로울 때는 잘 보이지 않던 마음이 광야에서 드러난다. 사람이 많을 때는 숨길 수 있던 마음이 홀로 남겨졌을 때 드러난다. 길이 있을 때는 믿음처럼 보였던 것이 길이 사라질 때 진짜 믿음인지 드러난다.
광야는 우리를 낮춘다.
광야는 우리를 시험한다.
광야는 우리 마음이 어떤지를 드러낸다.
광야는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광야의 목적은 우리를 망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우리를 부수기만 하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낮추시되 다시 세우신다. 비우시되 다시 채우신다. 꺾으시되 새롭게 빚으신다.
광야에서 우리는 마침내 알게 된다.
주님만이 길이시다.
예수님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말씀은 광야에서 더 선명해진다. 길이 보이는 곳에서는 그 말씀이 아름다운 교리처럼 들릴 수 있다. 그러나 길이 전혀 없는 곳에 서면, 그 말씀은 생명이 된다.
주님이 길이시다.
길이 없어서 절망하는 곳에서, 주님 자신이 길이 되신다. 문이 닫혀 낙심하는 곳에서, 주님 자신이 문이 되신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느끼는 곳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다시 보여주신다.
통과하고 나서 돌아보면
혹시 지금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이 나를 광야로 이끌고 계신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아니면 이미 광야 한복판에 들어와 있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사방이 막혀 있고, 아무리 둘러보아도 길이 보이지 않고, 기도해도 하늘이 닫힌 것처럼 느껴지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먼저 조용히 물어보아야 한다.
하나님, 왜 저를 이 광야로 이끄셨습니까.
이 시간 속에서 무엇을 낮추기 원하십니까.
제 마음의 무엇을 보게 하시려는 것입니까.
제가 붙들고 있던 어떤 욕심과 자아를 내려놓기 원하십니까.
이 광야에서 제가 들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광야는 사방이 막혀 있기 때문에 주님만 바라볼 수밖에 없는 곳이다. 그래서 광야는 고통스럽지만 복되다. 사람이 만든 길이 사라졌기 때문에, 하나님이 내시는 길을 보게 된다. 내 힘으로 만들었던 문들이 닫혔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여시는 문을 기다리게 된다.
그러므로 광야에 있다고 해서 좌절하지 않아도 된다.
낙심하지 않아도 된다.
버림받았다고 단정하지 않아도 된다.
오히려 조용히 기대해도 된다.
하나님께서 나를 새롭게 만나 주실 수 있다.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실 수 있다.
하나님께서 내 안의 욕심과 자아를 다루실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이 시간을 통해 나를 더 아름답게 빚어 가실 수 있다.
광야에서는 서두르지 않는 것이 좋다. 자꾸만 빠져나갈 길만 찾다 보면, 정작 그곳에서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놓칠 수 있다. 때로는 잠잠히 주님의 발 앞에 엎드리는 것이 가장 깊은 순종이다.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제가 도망치지 않겠습니다.
제가 발버둥치기보다 항복하겠습니다.
제가 제 욕심과 자아를 주님의 발 앞에 내려놓겠습니다.
이 광야에서 제게 말씀하여 주옵소서.
광야는 처음에는 황량한 곳으로 보인다. 아무것도 없는 곳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그곳은 가장 깊은 만남의 자리가 된다. 지나고 나서 돌아보면, 우리는 이상한 고백을 하게 된다.
그때가 참 아팠지만, 그때 하나님을 만났다.
그때는 길이 없었지만, 그때 주님이 길이심을 알았다.
그때는 모든 것이 막힌 줄 알았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나를 당신께로 더 가까이 부르고 계셨다.
통과하고 나서 돌아보면, 광야만큼 아름다운 곳은 없다.
그곳에서 우리는 낮아졌고, 깨어졌고, 울었다. 그러나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바로 그곳에서 우리의 자아가 무너졌고, 바로 그곳에서 주님만이 길이심을 배웠다.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다시 빚으셨다.
예수님께서 하늘의 음성을 들으신 후 광야로 들어가셨듯이, 우리도 때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로 광야에 들어간다. 사랑받기 때문에 광야가 없는 것이 아니다. 사랑받기 때문에 광야에서도 버려지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그 광야를 지나 돌아보게 될 때, 우리는 조용히 고백하게 될 것이다.
주님, 그곳이 제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곳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보니, 그곳이 주님을 가장 깊이 만난 자리였습니다.
그곳이 제 평생에 가장 축복된 시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광야로 가셨다.
그곳은 사람이 오래 머물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따뜻한 집도 없고, 식탁도 없고, 누군가의 위로도 없었다. 바람은 거칠었고, 돌들은 말이 없었고, 낮과 밤의 온도는 사람의 몸과 마음을 시험하듯 오르내렸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사십 일을 금식하셨다. 그리고 그 끝에서 시험을 받으셨다.
우리는 이 장면을 너무 익숙하게 읽을 때가 있다. 예수님이시니까 당연히 이기셨겠지, 하고 쉽게 지나가 버린다. 그러나 이 시험은 결코 가벼운 시험이 아니었다. 실제로 넘어질 가능성이 전혀 없는 형식적인 절차가 아니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참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이 시험은 실제적인 시험이었다. 배고픔도 실제였고, 외로움도 실제였고, 사탄의 유혹도 실제였다.
만일 예수님께서 그 세 번의 시험 가운데 단 하나라도 넘어지셨다면, 인류의 구원은 사라졌을 것이다. 우리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영원한 절망과 고통뿐이었을 것이다. 빛은 꺼지고, 소망은 닫히고, 모든 사람의 운명 위에는 완전한 어둠만 남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광야의 시험은 단순히 예수님 개인의 경건한 승리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온 인류의 운명이 걸린 자리였다. 하늘과 땅이 숨을 죽이고 지켜보는 자리였다. 아담이 실패한 자리에서 마지막 아담이 서 계셨고,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넘어졌던 자리에서 참 이스라엘이 홀로 서 계셨다.
그런데 이 광야의 시험을 제대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먼저 그 직전에 있었던 장면을 보아야 한다.
요단강에서 열린 하늘
예수님은 서른 살이 되실 때까지 나사렛에서 자라셨다. 성경은 그 긴 세월에 대해 거의 침묵한다. 열두 살 때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셨던 사건, 그리고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는 말씀 외에는, 그분의 나사렛 생활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는다.
그 침묵은 오히려 깊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서 서른 해 가까운 시간을 평범한 동네의 한 사람처럼 사셨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나사렛의 먼지 나는 길을 걸으셨고, 요셉의 집에서 자라셨고, 마리아의 손길 아래에서 식사를 하셨고, 동네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셨다.
그러다가 때가 되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찾아가셨다. 요단강가에는 회개의 세례를 받으려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죄를 고백하는 사람들, 새 출발을 갈망하는 사람들,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들 사이로 예수님께서 조용히 걸어오셨다. 그리고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
마태복음은 그 장면을 이렇게 기록한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물에서 올라오시는 예수님 위로 하늘이 열렸다. 성령께서 비둘기같이 임하셨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아버지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이 장면은 단순히 세례식의 한 장면만이 아니다. 이 말씀 속에는 깊은 아버지의 인정과 선언이 담겨 있다. 마치 하나님 아버지께서 온 하늘과 땅 앞에서 예수님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다.
“너는 내 아들이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를 기뻐한다.”
사람들이 열어주지 못한 인정의 문
유대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의식 가운데 하나가 있다. 남자 아이가 열세 살이 되었을 때 맞이하는 바르 미츠바, 여자 아이가 열두 살이 되었을 때 맞이하는 바트 미츠바이다. ‘미츠바’는 계명이라는 뜻이다. 모세오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계명들, 전통적으로 613개의 계명을 가리킨다. 바르 미츠바는 이제 그 아이가 하나님의 계명 앞에 책임 있는 존재로 서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 의식은 단지 한 아이가 나이를 먹었다는 기념이 아니다. 아버지와 공동체가 그 아이를 인정하는 자리다. 이제 너는 언약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는 사람이라는 선언의 자리다. 유대인들에게는 결혼식과 더불어 평생 가장 중요한 통과의례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의 생애를 조심스럽게 바라보게 된다.
예수님은 어떤 모습으로 태어나셨는가.
요셉과 마리아는 정혼한 사이였다. 오늘날의 약혼보다 훨씬 더 무거운 법적 관계였다. 정혼은 히브리적 배경에서 거룩하게 구별된 관계를 뜻하는 키두쉰과 연결된다. 그 뿌리에는 ‘거룩하다’, ‘구별되다’는 의미가 있다. 정혼한 남녀는 아직 함께 살지는 않았지만, 이미 법적으로는 부부와 같은 관계로 여겨졌다. 만일 그 상태에서 남자가 죽으면 여자는 단순히 처녀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과부로 여겨질 정도였다.
바로 그때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를 찾아왔다. 그리고 마리아는 처녀의 몸으로 성령으로 잉태하게 되었다.
이 사실을 마리아가 홀로 감당했을 때, 그녀의 마음은 얼마나 떨렸을까. 하나님께 순종한다고 말했지만, 그 순종의 길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니었다. 사람들의 눈, 동네의 수군거림, 요셉의 충격, 앞으로 닥쳐올 오해와 고통이 모두 그 길 위에 놓여 있었다.
요셉 역시 마리아의 임신 소식을 들었을 때 깊은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는 의로운 사람이었고, 마리아를 공개적으로 부끄럽게 만들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래서 조용히 그 관계를 정리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밤, 꿈에 주의 사자가 나타났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요셉은 순종했다. 마리아를 데려왔다. 그러나 예수님을 낳을 때까지는 동침하지 않았다. 이렇게 예수님은 이 땅에 태어나셨다.
그러나 요셉과 마리아가 알고 있는 진실을 다른 사람들이 알았을까.
아마도 사람들의 눈에는 전혀 다르게 보였을 것이다. 정혼한 여자가 아이를 가졌다. 그것만으로도 마을 사람들의 입에는 많은 말이 오르내렸을 것이다. 사람들은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신비를 알지 못했다. 그들의 눈에는 마리아가 정혼 기간 중에 부정한 일을 저지른 것처럼 보였을 가능성이 컸다.
예수님께서 자라나는 동안, 그분을 둘러싼 이 오해의 그림자가 완전히 사라졌을까.
요한복음 8장을 보면, 유대인들이 예수님과 논쟁하는 장면이 나온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지만, 그들의 행동은 아브라함의 자손답지 않다고 말씀하셨다. 오히려 그들의 아비가 마귀라고까지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들은 분노 속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음란한 데서 나지 아니하였고 아버지는 한 분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
이 말은 단순한 자기변호처럼 들리지 않는다. 그 안에는 예수님을 향한 오래된 비난의 그림자가 스며 있는 듯하다. 유대인의 배경과 표현을 살려 번역한 성경에서는 이 구절을 “우리는 사생아가 아니다”라는 뉘앙스로 옮기기도 한다.
그 말 속에는 날카로운 가시가 있다.
“우리는 너와 다르다.”
“우리는 부정한 출생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이런 비난이 실제로 예수님을 향해 던져졌다면, 예수님의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은 결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히 평온하기만 한 시간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사람들의 오해 속에서 자라셨다. 하늘의 독생자이셨지만, 땅에서는 사생아라는 의심과 수군거림을 감당하셨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바르 미츠바 의식에 정식으로 참여할 수 있었을까.
전통과 공동체의 시선 속에서, 아버지의 인정과 축복을 받아야 하는 그 자리에서, 예수님은 온전히 환영받으셨을까. 어쩌면 사람들은 예수님을 향해 완전한 인정의 문을 열어주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육신의 아버지의 이름으로, 공동체의 이름으로, 깨끗한 출생의 이름으로 누군가를 인정하는 그 자리에서 예수님은 소외되셨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요단강에서 하늘이 열렸다.
사람들이 열어주지 않았던 문을 하나님께서 여셨다. 사람들이 망설였던 인정을 하나님께서 친히 선언하셨다. 땅의 공동체가 온전히 말해주지 못했던 축복을 하늘 아버지께서 직접 말씀하셨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이것은 예수님의 하늘로부터 온 바르 미츠바와도 같았다. 사람의 의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식이었다. 땅의 아버지가 아니라 하늘 아버지께서 친히 베푸신 인정의 자리였다. 사람들이 붙여준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불러주신 이름이었다.
너는 내 아들이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자다.
너는 내가 기뻐하는 자다.
아들에게 부어진 성령의 기름
그리고 그 자리에서 성령께서 임하셨다.
예수님은 이미 태생적으로 성령 안에 계신 분이었다. 그분의 내면은 하나님과 완전한 친밀함 가운데 있었다. 그래서 어린 시절부터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랑스러워 가셨다. 그분 안에는 하나님을 향한 순전함과 거룩함이 흘러넘쳤다.
그러나 요단강에서 임하신 성령의 역사는 또 다른 차원의 기름 부으심이었다. 그것은 공적 사역을 위한 성령의 임재였다. 위로부터 임하시는 능력,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에게 눌린 자를 자유케 하며, 하나님 나라를 나타내는 사역적 기름 부으심이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까지 성경은 그분이 어떤 기적을 행하셨다고 말하지 않는다. 요한복음 2장의 가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이 예수님의 첫 번째 표적으로 기록된다. 어린 시절 예수님이 장난처럼 기적을 행했다는 위경의 이야기들이 전해지기도 하지만, 성경은 그런 이야기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성경이 보여주는 예수님의 기적은 요단강에서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받으신 이후, 하나님 나라의 공적 사역 안에서 나타난다.
요한복음 3장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에게 성령을 한량없이 주신다고 말한다. 사도행전 10장은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고, 그분이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다고 증언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함께하셨기 때문이다.
이 장면을 바라보면, 우리는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단순히 어떤 종교적 감정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것은 하늘 아버지의 유업이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시는 선물이다. 아버지께서 사랑하는 자에게 부어주시는 능력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겠느냐.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누가복음은 이 말씀을 더 분명하게 풀어준다.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아버지는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고 싶어 하신다. 세상의 아버지들도 부족하지만 자녀를 위해 좋은 것을 준비한다. 어떤 유대인 가정에서는 아이의 바르 미츠바를 위해 오랜 시간 재정을 모으고, 아이가 성장하여 사회로 나아갈 때 큰 축복의 선물로 전달하기도 한다. 그것은 단순한 돈이 아니다. 아버지가 자녀의 미래를 위해 준비한 마음이다.
그렇다면 하늘 아버지는 어떠하실까.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녀에게 주시기 원하시는 가장 귀한 유업은 성령이다. 성령의 임재, 성령의 능력,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다. 세상의 어떤 재정적 축복보다 더 깊고, 어떤 인간적 인정과 격려보다 더 완전한 선물이다.
시편 133편은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아름다움을 노래한다. 그 모습은 아론의 머리에 부어진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을 타고 옷깃까지 흘러내리는 것 같다고 말한다. 또한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리는 것 같다고 말한다. 그리고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신다고 한다. 곧 영생이다.
기름은 흘러내린다. 머리에 부어진 기름은 수염으로, 옷깃으로 흘러간다.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은 한 사람에게만 머물지 않고,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흘러간다. 예수 그리스도께 부어진 성령의 기름 부으심은 그분의 몸 된 교회 안으로 흘러간다. 머리 되신 그리스도께 임한 기름은 몸 된 우리에게까지 내려온다.
야고보서도 병든 자가 있으면 교회의 장로들을 청하고, 그들이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기도하라고 말한다. 기름은 단순한 상징물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와 치유와 회복을 바라보게 하는 믿음의 표지다. 우리는 기름 자체를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름이 가리키는 성령의 임재와 능력을 의지한다.
오늘, 우리의 영적인 바르 미츠바
그러므로 요단강에서 예수님께 일어난 일은 우리에게도 깊은 초대가 된다.
우리에게도 하늘 아버지의 음성이 필요하다.
사람들의 인정만으로는 살 수 없다. 육신의 아버지가 아무리 좋은 말을 해주어도, 그것만으로 영혼 깊은 곳의 갈증이 다 채워지지 않는다. 반대로 육신의 아버지에게서 충분한 축복을 받지 못한 사람도 있다. 인정받지 못하고 자란 사람, 사랑한다는 말을 듣지 못한 사람, 존재 자체를 기뻐한다는 축복을 받아보지 못한 사람도 있다.
그러나 하늘 아버지는 말씀하신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너는 내 사랑하는 딸이다.
내가 너를 기뻐한다.
그 음성이 한 사람의 영혼 위에 임할 때, 인생은 다시 시작된다. 세상이 붙인 이름이 벗겨지고, 상처가 붙인 이름이 무너지고, 죄책감과 수치심이 속삭이던 거짓 이름들이 힘을 잃는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이름이 남는다.
사랑받는 자.
기뻐하심을 입은 자.
하나님의 자녀.
그때 우리는 영적인 바르 미츠바와 바트 미츠바의 자리로 들어간다. 사람의 인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정 앞에 선다. 세상의 축복이 아니라 하늘의 축복을 구한다. 육신의 아버지가 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깊고 완전한 축복을 하나님 아버지께 구한다.
그리고 그 축복의 중심에는 성령이 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구해야 한다. 단순히 감동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다. 더 화려한 종교적 체험을 얻기 위해서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삶을 살아내기 위해서다. 광야를 통과하기 위해서다. 시험 앞에서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다. 마귀에게 눌린 사람들을 자유케 하고, 상한 마음을 위로하고, 하나님 나라의 선한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다.
예수님은 요단강에서 아버지의 음성을 들으신 후, 곧바로 광야로 가셨다. 사랑받는 아들이라는 선언은 시험이 없는 삶으로 인도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선언은 광야를 통과할 수 있는 힘이 되었다.
이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광야가 없어진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었다는 것은 시험이 사라진다는 뜻도 아니다. 오히려 때로는 아버지의 음성을 들은 바로 그 사람이 광야로 인도된다. 그러나 그는 혼자가 아니다. 하늘의 음성을 품고 간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입고 간다. 아버지의 인정 안에서 시험을 마주한다.
우리도 그렇다.
우리의 인생에도 광야가 있다. 사람들이 몰라주는 시간, 오해받는 시간, 배고픔과 외로움의 시간,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 시간이 있다. 그러나 그 광야에 들어가기 전에, 아니 그 광야 한복판에서라도 우리는 다시 들어야 한다.
너는 내 사랑하는 자다.
내가 너를 기뻐한다.
그리고 우리는 구해야 한다.
아버지, 제게 성령을 주옵소서.
아버지, 제게 하늘의 기름 부으심을 주옵소서.
예수님께 부어진 그 성령의 능력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안에 흐르게 하옵소서.
오늘이 우리의 영적인 바르 미츠바, 바트 미츠바의 날이 되기를 소망한다. 하늘 아버지께 직접 축복을 받는 날, 세상이 주지 못한 인정을 하나님께 받는 날, 육신의 아버지의 축복보다 더 깊고 완전한 하늘의 축복을 받는 날이 되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그 축복이 단지 말로만 끝나지 않기를 소망한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으로 우리 안에 실제가 되기를 소망한다. 우리의 마음에 임하고, 우리의 가정에 흐르고, 교회 안에 흘러가며, 병든 자와 눌린 자와 상한 자들에게까지 흘러가기를 소망한다.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하늘 아버지의 음성을 들으셨던 것처럼, 우리도 오늘 그 음성 앞에 서야 한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너는 내 사랑하는 딸이다.
내가 너를 기뻐한다.
그 음성을 들은 사람은 광야를 지나갈 수 있다.
그 음성을 들은 사람은 시험 앞에서 다시 설 수 있다.
그 음성을 들은 사람은 더 이상 사람의 인정만을 구걸하며 살지 않는다.
그는 하늘 아버지의 축복을 받은 사람으로 살아간다.
그리고 그 사람의 머리 위에, 삶 위에, 사명 위에 성령의 기름이 조용히 흐르기 시작한다.
시편 42편 7절은 이렇게 말씀한다.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이 말씀은 원래 시편 기자가 극심한 고난과 하나님의 압도적인 다루심 속에서 고백한 시적 표현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영적인 세계의 한 중요한 원리를 묵상하게 한다.
깊은 것이 깊은 것을 부른다.
영적인 것이 영적인 것을 부른다.
선한 것은 선한 것을 부르고, 악한 것은 악한 것을 부른다.
이것을 우리는 “영적 공명의 법칙”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공명이라는 것은 같은 성질의 울림이 서로 반응하는 것이다. 한쪽에서 어떤 울림이 일어나면, 같은 성질을 가진 다른 쪽도 함께 울린다. 영적인 세계에도 이와 비슷한 원리가 있다. 사람의 내면에 무엇이 있느냐에 따라 그 사람은 어떤 것에 끌리고, 무엇에 반응하고, 어떤 세계와 연결된다.
사람 안에 빛이 있으면 빛을 향해 나아간다. 그러나 사람 안에 어둠이 있으면 어둠과 반응한다. 사람 안에 진리에 대한 갈망이 있으면 진리를 향해 나아가지만, 사람 안에 죄를 붙들고 싶은 마음이 있으면 빛을 피하고 어둠 속에 머무르려 한다.
사람은 자기 안에 있는 것과 공명한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3장 20절과 2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악을 행하는 사람은 빛을 싫어한다. 왜냐하면 빛 앞에 서면 자기 안의 어둠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반대로 진리를 따르는 사람은 빛으로 나아간다. 왜냐하면 그 안에 있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람은 결국 자기 안에 있는 것과 공명한다. 내 안에 있는 것이 나의 끌림을 만들고, 나의 끌림이 나의 선택을 만들고, 나의 선택이 나의 삶의 방향을 만들어 간다.
그러므로 영적인 삶에서 중요한 것은 단지 겉으로 어떤 행동을 하느냐만이 아니다. 내 안에 무엇이 있느냐가 중요하다. 내 영혼의 깊은 곳에 무엇이 자리 잡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왜냐하면 깊은 것은 깊은 것을 부르기 때문이다.
어둠은 어둠을 부른다
1969년 8월 8일 밤, 미국 사회를 충격에 빠뜨린 끔찍한 사건이 있다.
자정 무렵, 텍스 왓슨이라는 남자가 운전하는 포드 자동차가 베벌리힐즈의 한 주택가에 도착한다. 그 차에는 텍스 왓슨 외에도 세 명의 젊은 여성이 타고 있다. 당시 텍스 왓슨은 23살이고, 나머지 여성들도 19살에서 22살 사이의 젊은 사람들이다.
그 시간에 스티븐 패런트라는 고등학생이 그 건물의 관리인을 방문했다가 돌아가고 있었다. 그는 전자시계와 라디오 같은 물건을 팔기 위해 그곳에 들렀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이 네 사람이 담을 넘어 집 안으로 침입하려 하고, 떠나려던 스티븐 패런트를 발견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 어린 청년을 총으로 쏘아 죽인다.
그 집 안에는 몇 사람이 있었다. 파티가 끝난 뒤 두 사람은 각자 방으로 들어가 잠들어 있고, 두 사람은 거실에서 쉬고 있었다. 그런데 침입자들은 그들을 칼로 잔혹하게 공격했다. 그날 밤 가장 마지막으로 죽은 사람이 샤론 테이트다. 샤론 테이트는 당시 헐리우드의 떠오르는 배우이고, 영화감독 로만 폴란스키의 아내였다. 무엇보다 그는 임신 8개월이 넘은 상태였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칼에 찔려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마지막 순간까지 애원했다고 전해진다. “제발 아기만은 살려 달라.” 그러나 그 간절한 애원도 그들의 잔혹함을 멈추게 하지 못한다. 이 사건은 당시 미국 사회 전체를 충격에 빠뜨린 가장 끔찍한 살인 사건 가운데 하나가 된다.
원래 목표가 아니었던 사람들
이 사건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중요한 점이 있다.
그날 모두 5명이 살해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들이 원래 죽이려고 했던 사람은 그 5명 가운데 아무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날 죽임당한 사람들은 그 살해 계획의 직접적인 대상이 아니다.
이 살인을 사주한 사람은 찰스 맨슨이다.
맨슨은 자신을 따르는 추종자들을 거느리고 있던 인물이다. 그가 원래 분노를 품고 있던 대상은 테리 멜처라는 음악 프로듀서다. 테리 멜처는 비치 보이스 같은 유명한 음악가들과도 연결되어 있던 프로듀서다. 찰스 맨슨은 음악가로 인정받고 싶어 하고, 자신의 음악을 담은 데모 테이프를 보냈지만 인정받지 못한다. 그는 그 일에 분노하고, 그 분노가 결국 살인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문제는 테리 멜처가 이미 그 집에서 이사한 뒤라는 것이다. 그는 사건이 일어나기 몇 달 전에 다른 곳으로 이사했다. 그 집에는 당시 로만 폴란스키와 샤론 테이트가 살고 있었다. 로만 폴란스키는 영화 촬영을 위해 유럽에 나가 있고, 샤론 테이트와 손님들만 그 집에 있었다. 그런데 찰스 맨슨의 추종자들은 그 집을 테리 멜처의 집으로 생각하고 침입하고, 결국 전혀 다른 사람들이 잔혹하게 죽임을 당한 것이다.
비극 앞에서 던져지는 무거운 질문
여기서 우리는 아주 무거운 질문 앞에 선다.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이시다.
하나님은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이시다.
주님은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신다.
한 사람의 생명은 천하보다 귀하다.
그렇다면 왜 이 5명은 그렇게 애꿎게 죽임을 당하는가?
이것은 그냥 우연인가?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매우 조심해야 한다.
어떤 비극을 두고 “그 이유는 이것이다”라고 단정하는 것은 위험하다. 고난당한 사람들의 죽음 앞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판결을 내려서는 안 된다. 욥기의 친구들이 바로 그 일을 했다. 그들은 욥의 고난을 보고 너무 쉽게 원인을 단정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말을 책망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사건을 두고 “그들이 이런 이유 때문에 죽었다”고 말할 수 없다. 그것은 우리의 권한이 아니다.
영적인 세계는 중립적이지 않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외면해서도 안 된다. 영적인 세계는 중립적이지 않다. 인간의 선택은 반드시 파장을 일으킨다. 죄는 죄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어둠은 어둠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사람이 심은 것, 문화가 심은 것, 영적으로 열어 놓은 문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파장을 만들어 낸다.
그 파장이 언제,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돌아오는지 우리는 다 알 수 없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둔다고.
깊은 것이 깊은 것을 부른다.
어둠은 어둠을 부른다.
악한 것은 악한 것을 부른다.
비극을 단정하지 말되, 영적 원리는 외면하지 말라
비극을 단정하지 말되, 영적 원리는 외면하지 말라
여기서 우리는 균형을 가져야 한다.
한쪽으로는 조심해야 한다. 특정한 사건, 특정한 비극, 특정한 죽음을 놓고 “이것은 반드시 어떤 죄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라고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도 누가복음 13장에서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죽은 사람들을 두고, 그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죄가 많아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다른 한쪽으로는 영적인 원리를 외면해서도 안 된다.
성경은 분명히 죄에는 열매가 있다고 말한다. 불순종에는 결과가 있다고 말한다.
악을 심으면 악한 열매가 있고, 육체를 위해 심으면 썩어질 것을 거두며, 성령을 위하여 심으면 영생을 거둔다고 말씀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극의 원인을 함부로 단정하지 않으면서도, 영적인 세계의 원리는 두려운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이 사건의 정확한 영적 원인은 하나님만 아신다. 그러나 이 사건은 우리에게 두려운 질문을 던진다. 내가 무엇을 심고 있는가? 내가 무엇과 공명하고 있는가? 내가 어떤 세계에 마음을 열고 있는가?”
이것이 중요하다.
우리의 선택은 영적 파장을 만든다
죄는 개인적인 문제로만 끝나지 않는다
우리는 흔히 죄를 개인적인 문제로만 생각한다. 내가 혼자 마음속으로 품은 생각, 내가 혼자 보는 것, 내가 혼자 즐기는 것, 내가 혼자 선택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죄를 그렇게 가볍게 보지 않는다.
죄는 반드시 파장을 일으킨다.
욕망은 반드시 방향을 만든다.
반복된 선택은 반드시 길을 만든다.
열어 둔 문은 반드시 무엇인가를 불러들인다.
처음에는 작은 호기심처럼 보일 수 있다. 처음에는 단순한 문화생활처럼 보일 수 있다. 처음에는 그저 재미로 보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내 안의 어둠과 공명하기 시작하면, 그것은 단순한 오락으로 끝나지 않는다.
사람은 자기가 계속 바라보는 것을 닮아간다.
사람은 자기가 반복해서 듣는 것에 영향을 받는다.
사람은 자기가 즐기는 것과 영적으로 연결된다.
마음은 영적인 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의 눈과 귀와 마음을 지키라고 말씀한다. 잠언 4장 23절은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말씀한다.
왜 마음을 지켜야 하는가? 마음은 단지 감정의 장소가 아니기 때문이다. 마음은 영적인 문이다. 마음은 공명의 자리다. 내 마음이 무엇을 사랑하느냐에 따라 내 삶의 방향이 달라진다. 내 마음이 무엇에 반응하느냐에 따라 내가 어떤 세계와 연결되는지가 달라진다.
빛을 사랑하는 마음은 빛으로 나아간다.
어둠을 즐기는 마음은 결국 어둠으로 끌려간다.
빛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
예수님은 요한복음 3장에서 분명히 말씀하신다.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악을 행하는 사람의 특징은 단지 죄를 짓는 것이 아니다. 빛을 싫어한다는 것이다. 말씀을 불편해한다. 책망을 싫어한다. 회개의 자리로 나아오기를 거부한다. 왜냐하면 빛 앞에 서면 자기의 행위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리를 따르는 사람은 다르다.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진리를 따르는 사람은 완벽한 사람이 아니다. 죄가 전혀 없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빛으로 나아간다. 말씀 앞에 선다. 회개한다. 자기 안의 어둠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피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어둠 속에 머무는 것보다 빛 가운데 고침받는 것을 더 원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복과 저주를 가르는 중요한 차이다.
복과 저주를 가르는 차이
복 있는 사람은 죄가 전혀 없는 사람이 아니다.
복 있는 사람은 빛으로 나아가는 사람이다.
저주의 길에 서 있는 사람은 단지 실수한 사람이 아니다.
저주의 길에 서 있는 사람은 빛을 미워하고 어둠을 붙드는 사람이다.
영적 공명의 법칙은 바로 여기서 작동한다. 빛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은 점점 더 빛의 세계와 공명한다.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은 점점 더 하나님의 뜻과 공명한다. 기도의 자리를 지키는 사람은 점점 더 성령의 인도하심과 공명한다.
그러나 죄를 숨기고, 어둠을 즐기고, 불순종을 합리화하는 사람은 점점 더 어둠과 공명한다. 처음에는 작은 타협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것이 삶의 분위기가 되고, 결국 삶의 방향이 된다.
무엇과 공명하고 있는가?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나는 지금 무엇과 공명하고 있는가?
내 마음은 무엇에 반응하고 있는가?
나는 빛을 향해 가고 있는가, 어둠을 향해 가고 있는가?
나는 진리를 사랑하고 있는가, 아니면 진리가 드러내는 불편함을 피하고 있는가?
우리가 매일 보는 것, 듣는 것, 생각하는 것, 즐기는 것, 가까이하는 사람들, 반복해서 머무는 분위기들은 모두 우리 안에 어떤 울림을 만든다. 그 울림은 우리의 영혼을 형성하고, 우리의 영혼은 다시 우리의 선택을 만들어 낸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단지 교회에 나오는 문제만이 아니다. 내 영혼이 무엇과 연결되어 있는가의 문제다. 내 영혼이 무엇을 부르고 있는가의 문제다. 내 안의 깊은 것이 무엇을 향해 울고 있는가의 문제다.
깊은 것이 깊은 것을 부른다.
내 안에 말씀의 깊이가 있으면 말씀의 세계가 열린다.
내 안에 기도의 깊이가 있으면 하나님의 임재를 향한 갈망이 일어난다.
내 안에 거룩함의 깊이가 있으면 죄가 불편해진다.
내 안에 사랑의 깊이가 있으면 하나님의 긍휼이 흘러나온다.
그러나 내 안에 욕망의 깊이가 있으면 유혹이 쉽게 들어온다.
내 안에 분노의 깊이가 있으면 다툼이 반복된다.
내 안에 음란의 깊이가 있으면 음란한 것들이 계속 나를 끌어당긴다.
내 안에 교만의 깊이가 있으면 하나님의 말씀조차 내 기준으로 판단하게 된다.
결국 영적인 삶은 내 안의 깊이를 무엇으로 채우느냐의 싸움이다.
빛을 심고, 생명을 부르라
복과 저주는 어느 날 갑자기 임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 그것은 오래전부터 심겨 온 것들의 열매다. 우리가 무엇을 심었는지, 무엇을 사랑했는지, 무엇과 공명했는지가 시간이 지나 열매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부터 빛을 심어야 한다. 말씀을 심어야 한다. 기도를 심어야 한다. 순종을 심어야 한다. 거룩함을 심어야 한다. 선한 것을 심어야 한다.
작은 순종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
작은 죄도 가볍게 여기지 말라.
작은 기도도 헛되지 않다.
작은 타협도 결코 작게 끝나지 않는다.
깊은 것이 깊은 것을 부른다.
오늘 내 안의 깊은 곳이 하나님을 부르게 해야 한다.
내 영혼의 깊은 곳이 말씀을 부르게 해야 한다.
내 삶의 깊은 곳이 성령의 임재와 공명하게 해야 한다.
빛을 사랑하는 사람은 빛으로 나아간다.
진리를 따르는 사람은 빛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빛 가운데로 나아가는 사람은 결국 하나님의 생명과 은혜와 복을 부르게 된다.
복과 저주를 가르는 영적 공명의 법칙은 바로 이것이다.
내가 무엇과 공명하느냐가
내가 무엇을 부르느냐를 결정한다.
내 안의 깊은 것이
내 삶의 깊은 것을 부른다.
감사라는 말은 대개 좋은 일이 지나간 자리에 남는다.
누군가의 병이 나았을 때, 오랫동안 바라던 일이 이루어졌을 때, 막혔던 길이 열렸을 때, 사람들은 그제야 감사라는 말을 꺼낸다. 마치 감사는 좋은 소식 뒤에 따라오는 작은 그림자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감사는 그렇게 늦게 도착하는 감정이 아니다. 성경은 감사의 자리를 훨씬 더 깊은 곳에 둔다. 상황보다 깊은 곳, 감정보다 깊은 곳, 심지어 삶의 형편보다 더 깊은 곳에 감사의 뿌리를 내린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18절에서 말한다.
“범사에 감사하라.”
범사에.
모든 상황 속에서.
해가 비치는 날뿐 아니라 비가 내리는 날에도.
기도가 응답된 것처럼 보이는 날뿐 아니라, 하늘이 침묵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날에도.
이 말 앞에서 사람은 자연스럽게 멈칫한다. 좋은 일이 있을 때 감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모든 상황 속에서 감사하라니. 인생에는 좋은 일만 일어나지 않는다. 억울한 일도 있고, 오래도록 설명되지 않는 실패도 있다. 믿었던 사람에게서 받은 상처도 있고, 마음 깊은 곳에 가라앉은 배신의 기억도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되지 않는 일들이 있다.
그런데 어떻게 감사할 수 있을까.
어떻게 모든 상황 속에서 감사할 수 있을까.
성경은 그 대답을 억지 웃음에서 찾지 않는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된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라고 쉽게 말하지도 않는다.
성경은 감사의 가장 깊은 뿌리를 한 가지 사실에서 찾는다.
내가 존재한다는 것.
하나님께서 나를 있게 하셨다는 것.
감사는 거기서 시작된다.
감사의 가장 깊은 자리
하박국은 감사하기 어려운 시대를 살았다.
그가 바라본 들판에는 열매가 없었다. 무화과나무는 무성하지 않았고, 포도나무에는 열매가 없었다. 감람나무에는 소출이 없었고, 밭에는 먹을 것이 없었다. 우리에는 양이 없었고, 외양간에는 소가 없었다.
그것은 단순히 생활이 조금 불편해진 정도가 아니었다. 당시 농경 사회에서 그것은 삶의 바닥이 무너지는 일이었다. 내일의 식탁이 사라지는 일이었고, 가족의 생존이 흔들리는 일이었다. 땅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고, 나무는 침묵했고, 외양간은 비어 있었다.
사람은 그런 상황에서 쉽게 말할 수 없다. 감사하겠다고, 기뻐하겠다고,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없다.
그런데 하박국은 그 자리에서 고백한다.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그의 감사는 환경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환경은 감사의 근거를 하나씩 지우고 있었다. 감사할 이유를 찾으려 하면 오히려 감사할 수 없는 이유들만 눈앞에 쌓였다.
그런데도 하박국은 감사했다.
그는 상황보다 더 깊은 곳을 보고 있었다. 무너진 밭보다, 비어 있는 외양간보다, 사라진 열매보다 더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보고 있었다. 그의 감사는 조건에서 올라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 시각에서 솟아난 것이었다.
진짜 감사는 조건에서 나오지 않는다.
존재에 대한 깨달음에서 나온다.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신다
다윗은 시편 139편에서 더 깊은 자리로 내려간다.
그는 자신의 존재를 바라본다. 자신의 삶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묵상한다. 그리고 하나님께 말한다.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다윗은 자신이 우연히 이 세상에 던져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존재는 아무렇게나 조합된 결과가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모태에서 그를 지으셨다. 그의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부터 하나님은 그를 보셨다.
물론 사람의 탄생 이야기는 언제나 깨끗하고 완전하지만은 않다. 그 안에는 인간의 죄와 실수가 개입되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축복받지 못한 임신 속에서 태어난다. 어떤 사람은 버림받은 이야기 속에서 태어난다. 어떤 사람은 폭력과 아픔의 기억 속에서 생명을 얻는다.
사람의 눈으로 보면 모든 것이 복잡하다. 어떤 탄생은 불완전해 보이고, 어떤 시작은 상처투성이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람의 실수와 죄가 생명의 마지막 설명이 될 수는 없다.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허락과 계획 없이 이 땅에 태어나는 존재는 없다. 사람의 이야기가 아무리 깨어져 있어도, 하나님은 그 깨어진 이야기 속에서 생명을 부르신다. 그리고 그 생명은 우연이 아니다.
생명의 탄생 자체를 생각해 보아도 그렇다. 수억 개의 정자 가운데 단 하나가 난자를 만난다. 그 하나가 지금의 나를 있게 했다. 만일 다른 하나가 난자를 만났다면 지금의 나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와 조금 다른 버전의 내가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전혀 다른 사람이 태어났을 것이다.
다른 얼굴.
다른 목소리.
다른 성격.
다른 기질.
다른 생각.
다른 삶.
그 수많은 가능성의 바다 속에서 하나님은 지금의 나를 존재하게 하셨다.
그 사실 앞에서 사람은 조용해진다. 내가 여기 있다는 것. 지금 이 이름으로, 이 얼굴로, 이 몸과 이 기질을 가지고 존재한다는 것. 그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러므로 감사는 내가 무엇을 가졌는가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감사는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에서 시작된다.
하나님께서 나를 있게 하셨다.
그것이 감사의 첫 문장이다.
나를 받아들이는 믿음
그러나 사람은 자기 자신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거울 앞에서 자신의 얼굴을 미워하기도 하고, 자신의 성격을 부끄러워하기도 한다. 어떤 기질은 너무 예민하다고 느껴지고, 어떤 조건은 불공평하다고 느껴진다. 어떤 출발점은 너무 늦었고, 어떤 배경은 너무 초라하다고 생각한다.
마음속에서 오래된 질문들이 들려온다.
왜 나는 이렇게 태어났을까.
왜 나는 저 사람처럼 되지 못했을까.
왜 내게는 저런 재능이 없을까.
왜 내 삶은 이런 자리에서 시작되었을까.
그 질문들은 평소에는 조용히 숨어 있다. 그러다가 누군가와 자신을 비교하는 순간, 마음 깊은 곳에서 다시 고개를 든다. 마치 오랫동안 닫혀 있던 서랍을 열었을 때 먼지가 피어오르듯이, 그 질문들은 다시 떠오른다.
그러나 믿음은 그 자리에서 다른 말을 듣는 것이다.
하나님은 실수로 나를 만드시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모습이 아닐 수는 있다. 내가 선택한 조건이 아닐 수는 있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출발점일 수는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 나를 지으셨다.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가나안 땅을 분배받을 때,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땅을 고르지 않았다. 제비뽑기로 각 지파의 기업이 정해졌다. 어떤 땅은 넓어 보였고, 어떤 땅은 척박해 보였을 것이다. 어떤 지파는 마음에 들었을 것이고, 어떤 지파는 아쉬웠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땅은 우연히 떨어진 땅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줄로 재어 주신 땅이었다.
그래서 다윗은 고백한다.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내게 줄로 재어 주신 구역을 다시 바라보는 것이다. 내 삶의 자리, 내 몸, 내 기질, 내 조건, 내 출발점을 하나님 앞에서 다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은 체념이 아니다. 운명을 받아들이는 무력한 태도도 아니다. 이것은 믿음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아시고, 나를 지으셨고, 나를 이 자리에 두셨다는 사실을 신뢰하는 것이다.
나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것.
나의 삶의 자리를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으로 받아들이는 것.
그곳에서 감사가 시작된다.
관점이 인생을 결정한다
자신의 존재를 감사로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삶의 사건들을 바라보는 눈도 달라진다.
같은 컵에 콜라가 반쯤 담겨 있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반밖에 없네.” 다른 사람은 말한다. “아직 반이나 남았네.”
콜라의 양은 그대로다. 바뀐 것은 컵이 아니라 시선이다.
인생도 그렇다. 사건 자체가 우리 인생의 전부를 결정하지 않는다. 더 깊이 들어가 보면, 그 사건을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우리의 삶을 결정한다.
가나안 정탐꾼들이 그랬다. 열두 명은 같은 땅을 보았다. 같은 포도송이를 보았고, 같은 성읍을 보았고, 같은 사람들을 보았다. 그 땅은 포도 한 송이를 두 사람이 메고 와야 할 만큼 풍성한 땅이었다.
그러나 열 명은 그 땅을 악평했다.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보다 자신들이 본 거인들을 더 크게 보았다. 약속의 땅을 보고도 두려움을 말했다. 풍성함을 보고도 위험을 말했다. 같은 현실 앞에 섰지만 전혀 다른 해석을 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같은 사건 속에서 절망을 본다.
어떤 사람은 그 사건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본다.
인생의 성공과 실패는 환경 자체보다 그 환경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요셉이 배운 하나님의 시각
요셉의 인생은 그 사실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 준다.
그는 형들에게 미움을 받았다. 미움은 말로만 끝나지 않았다. 형들은 그를 애굽에 노예로 팔았다. 낯선 땅, 낯선 언어, 낯선 집에서 그는 종이 되었다.
그는 성실했다. 보디발의 집에서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성실함이 곧바로 보상으로 돌아오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다.
요셉의 인생은 한동안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의 연속이었다. 누군가 어두운 방 안에서 그의 삶의 불을 하나씩 꺼 버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어둠의 시간을 지나며 요셉은 하나님의 시각을 배웠다. 그는 사건만 보지 않았다. 사건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되었다.
세월이 흐른 뒤, 요셉은 자신을 팔았던 형들을 다시 만난다. 그 순간 요셉은 과거를 복수의 재료로 사용할 수도 있었다. 형들의 죄를 하나하나 꺼내어 그들 앞에 놓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다른 말을 한다.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그리고 다시 말한다.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요셉은 형들의 죄를 부정하지 않았다. 형들은 실제로 그를 팔았다. 그 배신은 실제였고, 그 상처도 실제였다.
그러나 요셉은 그 위에서 일하시는 더 큰 하나님의 섭리를 보았다. 인간의 악한 선택 위에서도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는 길을 열고 계셨음을 보았다.
그는 사건 자체보다 사건 안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았다.
이것이 믿음의 해석이다.
고난 속에서 배우는 감사
예레미야애가도 같은 길을 걷는다.
예레미야는 고통을 모른 척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고초와 재난을 기억했다. 쑥과 담즙 같은 시간을 기억했다. 마음은 낙심되었다. 가슴에는 무거운 돌이 내려앉은 것 같았다.
그는 고난을 가볍게 말하지 않았다. 아픈 것은 아픈 것이었다. 무너진 것은 무너진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예레미야는 고난 자체를 바라보다가, 그 고난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은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을 보았다.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았지만 끝나지 않았다. 아직 진멸되지 않았다. 아침마다 새로워지는 하나님의 성실하심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말한다.
“사람은 젊었을 때에 멍에를 메는 것이 좋으니… 주께서 그것을 그에게 메우셨음이라.”
무거운 멍에조차 하나님의 허락과 섭리 안에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깨닫는 사람은 고난을 단순한 저주로만 보지 않는다. 그 속에서 하나님을 배운다. 자신을 배운다. 믿음을 배운다.
그리고 어느 날 알게 된다. 고난은 나를 끝내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나를 더 깊은 곳으로 데려가기 위해 허락된 시간이었다는 것을.
십자가를 앞두고 드린 감사
감사의 완전한 본은 예수님께서 보여 주셨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 제자들과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나누셨다. 그 자리에서 떡을 드셨고, 잔을 드셨고, 감사 기도를 드리셨다.
그 감사의 자리 뒤에는 배신이 있었다. 체포가 있었다. 조롱이 있었고, 채찍이 있었고, 십자가가 있었다.
예수님은 그것을 알고 계셨다.
자신이 팔릴 것을 아셨다.
제자들이 흩어질 것을 아셨다.
베드로가 부인할 것을 아셨다.
십자가의 고통도 아셨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감사하셨다.
유월절 만찬 후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를 건너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셨다. 밤하늘에는 니산월의 보름달이 떠 있었을 것이다. 성전에서는 어린양들의 피가 흘러 수로를 따라 기드론 시내로 내려가고 있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그 피가 흐르는 시내를 건너가셨다.
그분은 알고 계셨다. 자신이 바로 그 어린양의 길을 걸어가고 있음을. 자신이 곧 찢기고 부어질 것을. 그러나 그 길 끝에 구원이 있음을.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시면서도 감사하셨다.
그 감사는 상황에 대한 감사가 아니었다. 고통이 좋아서 드리는 감사가 아니었다. 그것은 아버지의 뜻을 신뢰하는 감사였다. 십자가 너머에 있는 구원을 보는 감사였다.
감사는 좋은 상황에 대한 반응이 아니다.
감사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의 언어다.
모든 감사의 뿌리
결국 감사는 이렇게 깊어져 간다.
먼저 나의 존재 자체에 대한 감사가 있다.
그 감사는 내 삶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감사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 감사가 깊어질 때, 우리는 마침내 범사에 감사하는 자리로 나아간다.
감사는 감정의 문제가 아니다.
존재와 믿음의 문제다.
내가 우연히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믿는 사람. 하나님께서 나를 지으셨고, 나를 보셨고, 나를 이 자리에 두셨다는 것을 믿는 사람. 내 삶의 모든 과정 속에서도 하나님이 일하고 계신다는 것을 믿는 사람.
그 사람은 결국 감사하게 된다.
사도 바울은 다시 우리에게 말한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모든 감사는 여기서 출발한다.
내가 존재한다는 것.
하나님께서 나를 있게 하셨다는 것.
내 삶이 우연의 연속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다는 것.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감사는 더 이상 조건의 언어가 아니다.
감사는 존재의 언어가 된다.
우리가 마지막 때를 말할 때, 먼저 생각해야 할 단어가 있다.
경륜.
조금 낯선 단어다. 오래된 서랍 속에 넣어 둔 단어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이 단어 안에는 역사를 바라보는 성경의 깊은 눈이 담겨 있다. 경륜이란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세상을 운영하시는 방식이다.
세상은 그냥 흘러가지 않는다.
시간은 우연히 쌓이지 않는다.
역사는 바람에 날리는 신문지처럼 아무 방향 없이 굴러가지 않는다.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이시다. 그리고 그분은 자신의 뜻을 따라 세상을 이끌어 가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물어야 한다. 지금 우리는 어떤 시대를 살고 있는가. 앞으로 이 세상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하나님은 이 시대 가운데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
신약성경 가운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와 미래에 대해 가장 집중적으로 말하는 책은 요한계시록이다. 그리고 구약성경 가운데 요한계시록과 가장 깊이 연결되는 책은 다니엘서다. 요한계시록은 다니엘서와 따로 떨어진 책이 아니다. 요한계시록은 다니엘서의 연장선에 있다. 다니엘서에서 봉인된 것이 요한계시록에서 열린다.
다니엘서 마지막 부분에서 하나님은 계시의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다니엘에게 마지막 때의 특징을 말씀하신다.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
다니엘 12장 4절 말씀이다.
여기에는 마지막 때를 보여 주는 두 가지 표지가 있다. 하나는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한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지식이 더한다는 것이다.
빨리 왕래하는 시대
백여 년 전만 하더라도 미국에서 한국까지 오려면 배를 타고 수십 일을 가야 했다. 바다 위에서 긴 시간을 보내야 했다. 파도와 바람과 어둠을 지나야 했다. 한국에 도착해도 끝이 아니었다. 제물포항에서 전라도 지역으로 가려면 말을 타고 일주일을 가야 했다.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사람은 하루 안에 전 세계 거의 어느 곳이든 갈 수 있다. 공항에 가서 비행기를 타고, 몇 시간 자고 일어나면 다른 대륙에 도착해 있다. 예전에는 평생 한 번도 가 보지 못할 곳을 이제는 출장처럼 다녀온다.
길은 짧아졌고, 세계는 작아졌다.
사람들은 빠르게 움직인다.
도시와 도시 사이, 나라와 나라 사이, 대륙과 대륙 사이를 바쁘게 오간다.
비행기, 고속철도, 자동차, 인터넷, 스마트폰. 이 모든 것이 인간의 이동과 연결 방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우리는 늘 어딘가로 가고 있고, 동시에 어디에도 머물지 못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지식이 폭발하는 시대
또 하나는 지식의 폭발이다.
인류가 보유하고 있는 지식의 총량이 두 배가 되는 기간을 생각해 보면, 이 시대가 얼마나 빠르게 변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과거에는 지식이 두 배가 되는 데 수십 년이 걸렸다. 1990년대에는 약 25년 정도가 걸린다고 말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속도가 훨씬 빨라졌다. 인공지능과 디지털 기술의 발달로 인해 지식은 인간이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앞으로는 지식의 총량이 며칠 단위로 폭증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지식은 많아졌다. 정보는 넘친다. 사람들은 손바닥 안의 작은 화면으로 세계의 소식을 읽고, 전쟁을 보고, 재난을 보고, 시장을 보고, 누군가의 삶을 본다. 그러나 그렇게 많은 것을 보면서도 정작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모른다.
많은 지식이 반드시 지혜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많은 정보가 반드시 진리를 의미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알기 때문에 더 깊은 혼란 속에 빠져 있다.
기후의 변화도 심상치 않다. 어느 여름, KTX를 타고 지방으로 내려가던 중 한 방송에서 기후 재난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한 전문가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지구는 더운 것이 아니라 끓고 있다.”
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마음에 남았다. 더운 것이 아니라 끓고 있다. 단순히 여름이 더워졌다는 말이 아니었다. 질서가 흔들리고 있다는 말이었다. 하늘과 땅과 바다의 리듬이 어긋나고 있다는 말이었다. 자연의 균형이 무너지고, 인간이 살아가는 환경 자체가 급격하게 변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이런 시대를 살면서 우리는 묻게 된다.
지금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
마지막 때는 어떤 방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가.
마지막 때의 두 흐름
많은 사람들이 마지막 때를 생각하면 먼저 재난을 떠올린다. 처처에 기근과 재난이 있고, 난리와 전쟁의 소문이 들리고, 지진과 전염병이 일어나고, 기독교에 대한 심각한 핍박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맞다. 성경은 그렇게 말한다. 마지막 때에는 세상이 흔들린다. 인간이 의지하던 것들이 흔들리고, 나라들이 흔들리고, 자연이 흔들리고, 사람들의 마음이 흔들린다.
그러나 또 다른 흐름도 있다. 마지막 때는 땅끝까지 복음이 전파되는 대부흥과 대추수의 시대이기도 하다. 수많은 영혼들이 주께 돌아오고, 열방 가운데 복음이 선포되며, 마지막 추수가 일어난다.
그렇다면 마지막 때는 재난과 심판의 시대인가. 아니면 부흥과 추수의 시대인가.
대답은 둘 다이다.
마지막 때에는 이 두 가지 일이 동시에 진행된다. 한편으로는 세상이 흔들리고, 전쟁과 기근과 재난과 핍박이 일어난다. 다른 한편으로는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되고, 전례 없는 대부흥과 영혼의 추수가 일어난다.
마치 한쪽 하늘에는 검은 구름이 몰려오고, 다른 한쪽 하늘에는 새벽빛이 비치는 것과 같다. 세상은 어두워지지만 하나님의 빛은 더 선명해진다. 심판의 소리는 커지지만 구원의 문도 활짝 열린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이 본격적으로 일어나기 전에, 하나님께서 가장 먼저 행하시는 일이 있다.
전쟁보다 먼저.
기근보다 먼저.
핍박보다 먼저.
대부흥과 추수의 거대한 물결보다 먼저.
하나님께서 먼저 손을 대시는 곳이 있다.
그곳은 세상이 아니다.
그곳은 권력자들의 궁전도 아니다.
그곳은 이방 민족들의 도시도 아니다.
그곳은 하나님의 집이다.
하나님의 집에서 시작되는 심판
베드로전서 4장 17절은 이렇게 말씀한다.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하나님의 집.
그것은 교회를 말한다.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공동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사람들을 말한다.
마지막 때 가장 먼저 시작되는 일은 세상의 심판이 아니다. 하나님은 먼저 자신의 집을 다루신다. 먼저 교회를 다루신다. 먼저 하나님의 백성을 정결하게 하신다.
이것이 마지막 때를 위한 하나님의 경륜이다.
우리는 이 말씀을 오늘날 전 세계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과 연결해서 보아야 한다. 지난 몇 년 동안, 세계적으로 큰 영향력을 가졌던 교회와 사역자들 가운데 충격적인 사건들이 계속해서 드러났다. 한때 전 세계 젊은이들의 예배 문화에 큰 영향을 끼쳤던 글로벌 교회 운동 안에서도 지도자들의 도덕적 실패와 리더십 문제가 드러났다.
또한 세계적인 기도운동과 선교운동 안에서도 오랫동안 존경받던 사역자들과 관련된 문제들이 드러났다. 겉으로는 거룩하고 강력해 보였던 사역의 내부에 감추어진 죄와 왜곡된 권위 구조가 드러난 것이다.
한국 교회도 예외가 아니다. 대형교회와 교단 지도부, 선교단체와 청년 사역의 영역에서 여러 논란과 스캔들이 이어졌다. 어떤 곳에서는 리더십 세습과 권력 집중의 문제가 제기되었고, 어떤 곳에서는 성적인 문제와 재정 문제, 권위주의적 운영이 드러났다. 어떤 사역자는 마지막 때와 부흥을 말했지만, 그 사역의 내면에는 조작과 왜곡, 권력화의 문제가 드러났다.
물론 우리는 개별 사건을 함부로 단정하거나 정죄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더 큰 흐름은 보아야 한다. 전 세계적으로, 동시다발적으로, 교회와 사역의 내부에 감추어져 있던 것들이 드러나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몇몇 지도자의 실패만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집을 흔들고 계신 것이다.
왜 하나님은 먼저 교회를 다루시는가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왜 하나님은 이 일을 가장 먼저 행하시는가.
왜 세상을 심판하시기 전에 교회를 심판하시는가.
왜 악한 세력과 불의한 권력과 타락한 문화를 먼저 치지 않으시고, 자신의 집을 먼저 다루시는가.
베드로전서 4장 17절과 18절은 이렇게 이어진다.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떠하며,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서리요.”
하나님은 세상을 심판하시기 전에 먼저 교회를 다루신다. 복음을 알지 못하는 자들을 심판하시기 전에, 먼저 복음을 안다고 말하는 자들을 다루신다.
왜냐하면 교회가 먼저 정결해져야 하기 때문이다.
교회가 먼저 주님께 복종해야 하기 때문이다.
교회가 먼저 심판을 통과해야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의와 진리를 선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린도후서 10장 3절에서 6절은 이것을 영적 전쟁의 언어로 설명한다.
“우리가 육신으로 행하나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바울은 계속해서 말한다.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6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너희의 복종이 온전하게 될 때에 모든 복종하지 않는 것을 벌하려고 준비하는 중에 있노라.”
순서가 중요하다.
먼저 “너희의 복종”이 온전하게 되어야 한다. 그 다음에 “모든 복종하지 않는 것”을 벌할 준비가 된다. 다시 말해 교회가 먼저 그리스도께 복종해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이 먼저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정렬되어야 한다. 그래야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이 시작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교회를 정화하신다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께 온전히 복종하는 교회로 만드신다는 뜻이다. 그 준비가 될 때, 하나님은 그 다음 단계로 세상을 향한 심판과 부흥과 추수의 역사를 시작하신다.
심판은 버림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심판이라는 단어를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집에서 시작되는 심판은 교회를 멸망시키기 위한 심판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교회를 버리시기 위한 심판이 아니다.
이것은 정결케 하시는 심판이다.
사랑의 심판이다.
회복을 위한 심판이다.
하나님은 교회를 포기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다루신다. 사랑하시기 때문에 흔드신다. 마지막 때에 교회를 통해 이루실 일이 너무 크기 때문에, 먼저 교회 안에 있는 불순물을 드러내신다.
감추어진 죄를 드러내신다.
왜곡된 권위를 드러내신다.
사람의 야망과 욕심으로 세워진 구조를 드러내신다.
겉으로는 화려하지만 속은 무너진 사역이 있다. 숫자는 많지만 그리스도의 성품은 없는 공동체가 있다. 능력은 말하지만 거룩은 잃어버린 사역자들이 있다. 부흥을 말하지만 자기 왕국을 세우는 리더십이 있다.
하나님은 그것을 더 이상 그냥 두지 않으신다.
이 과정은 아프다. 두렵다. 그리고 때로는 수치스럽다. 그러나 이것은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만이 아니라,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나님은 마지막 때에 정결한 교회를 원하신다.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이기는 자들을 원하신다.
이기는 자들을 얻기 위한 흔드심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일곱 교회에 말씀하신다. 그 말씀의 반복되는 결론은 이것이다.
“이기는 자는.”
예수님은 마지막 때의 교회 가운데 이기는 자들을 찾으신다. 하나님의 집에서 시작되는 심판을 넉넉히 통과하는 자들. 흔들림 속에서도 주님께 끝까지 순종하는 자들. 죄와 타협하지 않고 정결함을 지키는 자들. 사람의 평가보다 주님의 눈을 두려워하는 자들.
이들이 바로 이기는 자들이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정결한 신부로 준비된 사람들이다. 마지막 때 전 세계를 휩쓸게 될 대부흥의 주역들이다.
하나님은 왜 이 시대에 전 세계 교회들을 흔드시는가. 왜 유명한 사역들을 흔드시고, 거대한 구조를 흔드시고, 감추어진 죄를 드러내시는가.
이기는 자들을 얻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은 마지막 때의 부흥을 아무에게나 맡기지 않으신다. 영혼의 대추수를 감당할 그릇은 정결해야 한다. 능력보다 중요한 것은 순종이다. 은사보다 중요한 것은 거룩이다. 영향력보다 중요한 것은 깨어짐이다.
하나님은 깨어진 자를 찾으신다. 자신을 높이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자를 찾으신다. 사람들의 박수와 인정을 구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잃어버린 영혼을 위해 우는 자를 찾으신다.
웨일즈의 밤
120년 전, 이 원리를 보여 주는 한 사람이 있었다. 에반 로버츠.
그는 웨일즈 부흥의 중심 인물로 알려져 있다. 1904년 10월 31일, 모리아 채플 교육관에서 17명의 청년들과 함께 기도회가 시작되었다. 아주 작은 모임이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 작은 기도회에서 부흥이 시작되었다.
당시 에반 로버츠는 26살의 청년이었다. 그는 탄광에서 광부로 일하며 13년 동안 부흥을 위해 기도해 온 사람이었다.
1903년, 그는 하나님께서 웨일즈에 강력한 부흥을 주셔서 아주 짧은 시간에 10만 명을 하나님께로 인도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행하시기 전에 먼저 에반 로버츠 자신을 다루셨다.
1904년에 들어서면서 그는 자기 안에 갈등이 있음을 보게 되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과 사람들이 원하는 것 사이에서 흔들리는 마음이 있었다. 하나님의 뜻을 원한다고 말하면서도 사람들의 인정과 기대를 의식하는 마음이 남아 있었다.
그해 9월, 그는 친구들의 권유로 세트 조슈아라는 무명의 사역자의 집회에 참석했다. 그 집회에서 세트 조슈아가 이렇게 기도했다.
“Lord, bend us.”
주여, 우리를 굴복시켜 주소서.
그 순간 성령께서 에반 로버츠에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이것이 바로 네게 필요한 것이다.”
그의 가슴은 터질 것 같았다. 온몸은 심하게 떨렸다. 그는 기도했다.
“Lord, bend me. Bend me.”
주여, 나를 굴복시켜 주소서. 나를 꺾으소서.
그는 하나님 앞에 고꾸라졌다. 눈물이 시냇물처럼 흘러내렸다. 그 기도가 응답되었을 때, 하늘로부터 사랑과 평화와 기쁨이 임했다. 잃어버린 영혼들에 대한 연민이 강물처럼 그의 안에 밀려왔다.
그 후 그는 새벽 1시에 일어나 여러 시간을 기도하곤 했다. 당시 그의 기도는 단 하나였다.
“Lord, bend the church to save the world.”
주여,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교회를 굴복시켜 주소서.
이 기도 끝에 웨일즈 부흥이 일어났다.
부흥은 단지 열정에서 오지 않았다. 부흥은 깨어짐에서 왔다. 부흥은 사람의 야망이 꺾이고, 교회가 하나님 앞에 굴복하는 자리에서 왔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구부리실 때, 세상을 구원하는 역사가 시작되었다.
하나님은 먼저 우리를 꺾으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식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구원하시기 전에 먼저 교회를 다루신다. 열방을 흔드시기 전에 먼저 자신의 백성을 흔드신다. 대부흥을 부으시기 전에 먼저 그 부흥을 감당할 그릇을 정결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지금 전 세계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흔들림을 단순히 부정적인 사건으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물론 죄는 죄이다. 피해자는 보호받아야 하고, 가해자는 책임을 져야 하며, 교회는 회개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그 배후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을 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집에서부터 심판을 시작하고 계신다. 감추어진 것을 드러내고 계신다. 사람의 이름으로 세워진 왕국들을 흔들고 계신다. 은사와 영향력 뒤에 숨어 있던 죄와 욕망을 드러내고 계신다.
왜인가.
교회를 무너뜨리기 위해서가 아니다.
교회를 정결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기는 자들을 얻기 위해서이다.
마지막 때 전 세계를 휩쓸 대부흥의 주역들을 준비시키기 위해서이다.
야곱이라는 이름의 밤
수천 년 전, 성경에는 최초의 이기는 자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 야곱이다.
야곱은 얍복강 나루에서 하나님의 사자와 씨름했다. 밤새 씨름했다. 긴 밤이었다. 어둠과 땀과 숨소리와 두려움이 뒤섞인 밤이었다.
그리고 동이 틀 무렵, 야곱은 새 이름을 받았다.
이스라엘.
그 이름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라는 뜻을 담고 있다.
그런데 야곱은 어떻게 이겼는가. 힘으로 이긴 것이 아니다. 그는 환도뼈가 부러졌다. 완전히 꺾였다. 더 이상 자기 힘으로 설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이겼다.
이것이 성경적 승리의 역설이다.
하나님 앞에서 이기는 길은 내가 강해지는 것이 아니다. 내가 깨어지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을 이기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 완전히 굴복함으로 하나님 안에서 이기는 자가 되는 것이다.
야곱은 꺾임으로 이겼다. 에반 로버츠도 꺾임으로 부흥의 통로가 되었다. 하나님은 오늘도 그런 사람들을 찾고 계신다.
자기 힘으로 무엇인가를 이루려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완전히 굴복한 사람. 주님께 꺾인 사람. 주님께 붙들린 사람.
그런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은 마지막 때의 일을 이루실 것이다.
지금은 하나님의 집이 다루어지는 때
지금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집에서부터 심판을 시작하시는 때이다.
이것은 두려운 일이다. 그러나 동시에 소망의 일이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교회를 정결하게 하신다. 하나님은 이기는 자들을 준비시키신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정결한 신부를 얻기 원하신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 전 세계를 휩쓰는 대부흥과 대추수의 역사를 이루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시대의 흔들림 앞에서 단지 다른 사람의 죄를 구경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다른 사역자의 실패를 비판하는 사람으로만 서 있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이 시작된다는 것은 나와 무관한 일이 아니다. 교회의 심판은 내 삶의 정결함과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물어야 한다.
주님, 내 안에는 감추어진 죄가 없는가.
주님, 내 안에는 사람의 인정을 구하는 야망이 없는가.
주님, 내 안에는 겉으로는 사역을 말하지만 속으로는 자기 왕국을 세우려는 욕심이 없는가.
주님, 내 생각과 마음과 동기가 온전히 그리스도께 복종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이 시작될 때, 우리는 남을 보며 말할 것이 아니라 먼저 자신을 하나님 앞에 세워야 한다.
주여, 우리를 굴복시켜 주소서
에반 로버츠의 기도를 다시 붙들어야 한다.
Lord, bend us.
주여, 우리를 굴복시켜 주소서.
Lord, bend me.
주여, 나를 굴복시켜 주소서.
Lord, bend the church to save the world.
주여,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교회를 굴복시켜 주소서.
이 기도는 쉬운 기도가 아니다. 하나님께 나를 꺾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내 고집을 꺾어 달라고, 내 야망을 꺾어 달라고, 내 죄를 드러내 달라고, 내 자아를 굴복시켜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기도 없이 참된 부흥은 오지 않는다. 교회가 꺾이지 않으면 세상은 살아나지 않는다. 하나님의 백성이 먼저 정결해지지 않으면, 세상을 향한 심판과 부흥의 역사는 온전히 흘러가지 않는다.
우리는 지금 마지막 때의 경륜 속에 서 있다. 세상은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지식은 폭증하고 있다. 기후와 국제 질서는 흔들리고 있다. 전쟁과 재난과 핍박의 소식이 들려온다. 동시에 땅끝까지 복음이 전파될 대부흥과 대추수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 앞에 먼저 일어나는 일이 있다.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이 시작된다.
교회가 먼저 정결해진다.
이기는 자들이 준비된다.
신부가 단장된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 하나님은 열방을 흔드실 것이다.
하나님의 도전에 응답하라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도전 앞에 서 있다.
이런 하나님의 도전을 느끼고 있는가.
이런 하나님의 도전에 굴복하기 원하는가.
하나님께서 나를 꺾으시고, 우리를 꺾으시고, 교회를 꺾으셔서 세상을 구원하시도록 기도할 수 있는가.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이 시작될 때 두 종류의 사람이 드러난다.
하나는 심판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는 사람이다.
또 하나는 심판을 통과하며 정결해지는 사람이다.
하나는 자기 죄를 숨기고 도망치는 사람이다.
또 하나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 회개하고 이기는 자로 세워지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이기는 자들을 찾고 계신다. 야곱처럼 꺾임으로 이기는 자들. 에반 로버츠처럼 “주여, 나를 굴복시켜 주소서”라고 기도하는 자들. 마지막 때 예수 그리스도의 정결한 신부로 준비될 자들을 찾고 계신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기도는 이것이어야 한다.
주여, 우리를 굴복시켜 주소서.
주여, 나를 굴복시켜 주소서.
주여,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교회를 굴복시켜 주소서.
부흥은 꺾인 사람들을 통해 온다.
대추수는 정결한 교회를 통해 온다.
마지막 때 하나님의 경륜은 하나님의 집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집에서 시작된 심판은 결국 교회를 무너뜨리는 심판이 아니다. 교회를 정결하게 하고, 이기는 자들을 세우며, 세상을 구원하는 부흥의 문을 여는 하나님의 거룩한 손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