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성경을 읽다가 막히는 지점이 생긴다. 로마서 9장에서 11장까지를 읽는데, 마음 한쪽에서 질문이 생긴다. 정말 교회가 이스라엘을 완전히 대신한 것인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언약은 모두 과거의 이야기가 되었는가. 이스라엘은 더 이상 하나님의 구속사 안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지 않는가.
오랫동안 그렇게 배워 왔던 사람도 있다. 교회가 이스라엘을 대신했다는 대체신학의 틀 안에서 성경을 읽어 온 사람도 있다. 그런데 어느 날 책을 통해, 강의를 통해, 혹은 성령님의 직접적인 조명 속에서 그 생각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아니다.
이스라엘은 여전히 이스라엘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언약을 잊지 않으신다.
유대인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구속사 안에서 중요한 자리에 있다.
그 깨달음이 마음에 들어오면, 사람은 이스라엘을 새롭게 보게 된다. 뉴스 속의 한 나라로만 보던 이스라엘이 성경의 언약과 연결되어 보이기 시작한다. 유대인들을 위해 기도하게 되고, 이스라엘의 회복을 사모하게 되고, 기회가 되면 그들을 섬기고 싶어진다.
그 자체는 귀한 일이다.
교회는 이스라엘을 멸시해서는 안 된다. 유대인을 향한 하나님의 언약을 가볍게 여겨서도 안 된다. 반유대주의는 결코 성경적인 태도가 아니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 11장에서 이방인 신자들에게 경고한다. 원가지 앞에서 자랑하지 말라고.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라 뿌리가 너를 보전한다고.
그러나 이스라엘을 사랑하게 된 사람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빠지는 또 하나의 함정이 있다.
그것은 히브리적 뿌리라는 이름으로, 다시 율법적 짐 아래로 들어가는 것이다.
히브리적 뿌리를 찾는 마음
히브리적 뿌리, 영어로는 Hebrew Roots라고 부른다.
그 출발점은 나쁘지 않다. 예수님도 유대인이셨고, 사도들도 유대인이었다. 성경은 히브리적 배경 속에서 주어졌다. 구약성경은 말할 것도 없고, 신약성경 역시 유대적 세계관과 절기와 성전과 회당과 율법의 배경을 알 때 더 깊이 이해되는 부분이 많다.
그래서 성경을 더 깊이 연구하기 위해 히브리적 배경을 배우는 것은 좋은 일이다. 유월절의 의미를 알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더 깊이 보인다. 초막절을 알면 요한복음 7장의 예수님의 외침이 더 생생하게 들린다. 오순절을 알면 사도행전 2장의 성령강림이 더 놀랍게 다가온다.
문제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갈 때 생긴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1세기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안식일에도 회당에 갔고, 주일에도 모였다. 그러므로 우리도 히브리적 뿌리로 돌아가 토요일 안식일 예배와 주일 모임을 함께 가져야 한다.
또 이렇게 말한다.
1세기 메시아닉 유대인들은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뿐 아니라 무교절, 초실절, 나팔절, 속죄일을 포함한 절기들을 지켰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 절기들을 지켜야 한다.
처음에는 성경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한 배움처럼 시작된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것은 의무가 된다.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이 더 성경적이고, 절기를 지키는 사람이 더 영적이며, 코셔를 지키는 사람이 더 순전한 신앙으로 돌아간 사람처럼 여겨진다.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을 사랑하는 마음이 어느새 영적인 사대주의로 바뀐다.
유대적인 것은 더 원형에 가깝고, 이방인 교회는 뭔가 부족한 것처럼 느끼게 된다. 히브리어를 알면 더 깊은 신자가 되고, 절기를 지키면 더 온전한 신앙으로 들어간 것처럼 생각하게 된다. 심한 경우에는 유대인들을 공경한다는 이름으로 반유대인화되거나, 아예 할례를 받고 유대교로 개종하는 경우도 생긴다.
그리고 어떤 유대인 교사들은 이런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의 정서를 이용한다. 유대인 중심적인 가르침을 복음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올려놓고, 이방인 성도들에게 다시 짐을 지우려 한다.
이스라엘을 사랑하려다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자유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림자를 실체로 착각할 때
실제로 이런 가르침을 들은 적이 있다.
요한계시록 1장 10절에 보면 요한은 이렇게 말한다.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여기서 “주의 날”은 교회사적으로 주일, 곧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과 연결되어 이해되어 왔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사도행전에서 안식일은 그냥 안식일이라고 표현한다. 만약 요한이 안식일을 말하려 했다면, 당연히 안식일이라고 썼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1세기 말부터 “주의 날”이라는 표현은 주일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는 주후 110년경 “우리는 더 이상 안식일을 따라 살지 않고 주의 날을 따라 산다”는 취지의 말을 남겼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들은 요한계시록 1장 10절의 “주의 날”을 안식일로 가르친다. 이유는 분명하다. 모든 것의 중심에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히브리적 뿌리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방인 신자들은 그 유산을 존중해야 하고, 그 유산을 소유한 유대인들을 더 높이 존중해야 한다는 흐름으로 간다.
심지어 요한계시록 2장의 에베소 교회 말씀도 그렇게 해석하는 경우가 있다.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예수님께서 에베소 교회에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고 하신 말씀을, 히브리적 뿌리를 회복하라는 식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이것은 본문을 지나치게 끌고 가는 해석이다. 에베소 교회가 잃어버린 처음 사랑은 유대적 형식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다. 복음의 처음 감격이다. 주님을 향한 순전한 헌신이다.
성경의 그림자들은 중요하다. 절기, 안식일, 음식법, 성전 제도는 모두 의미가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실체를 가리키는 그림자다.
골로새서 2장 16절과 17절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몸은 실체를 말한다.
실체는 그리스도이시다.
그림자는 실체를 가리키기 위해 존재한다. 그림자를 연구할 수는 있다. 그림자 안에 담긴 의미를 배울 수는 있다. 그러나 실체가 오셨는데 그림자에 머무는 것은 하나님의 의도가 아니다.
절기는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안식일은 그리스도 안의 참된 안식을 가리킨다.
코셔와 정결법은 거룩함과 구별됨의 원리를 가리킨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의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림자가 아름답다고 해서 그림자를 붙들고 실체를 놓치면 안 된다.
이방인에게 지우지 말아야 할 짐
이 문제에 대해 사도들이 이미 한 번 결정한 적이 있다.
사도행전 15장이다.
초대교회 안에서 큰 논쟁이 일어났다.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기 시작하자, 어떤 사람들은 그들도 할례를 받고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이방인이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유대인처럼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 문제를 두고 예루살렘에서 중요한 회의가 열렸다. 사도들과 장로들이 모여 의논했다. 그리고 결론은 분명했다.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니,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 할지니라.”
여기서 중요한 표현은 이것이다.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니.”
이 결정은 입문자용 규칙이 아니다. 처음 믿는 이방인들에게 일단 가볍게 시작하게 하고, 나중에 신앙이 자라면 코셔도 지키고 안식일도 지키고 절기도 지켜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만일 안식일 준수와 절기 준수와 코셔가 모든 성도에게 필수였다면, 사도들이 이 가장 중요한 회의에서 그것을 언급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율법의 짐을 지우지 않았다.
성령과 사도들은 이방인 성도들에게 복음 안에서 필요한 기본적 기준을 제시했지만, 유대인으로 살아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았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유대인은 예수님을 믿어도 유대인이다. 그들에게는 아브라함의 혈통적 후손으로서 이어져 온 관습과 문화와 절기가 있다. 메시아닉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으면서 동시에 유대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절기를 지키고 율법적 관습을 따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이방인에게 강요하면 안 된다.
이것은 마치 한국인이 아프리카에 선교사로 가서 복음을 전한 뒤, “이제 너희도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니 설날에는 어른들에게 세배해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과 비슷하다. 세배는 한국 문화 안에서는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관습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복음의 일부처럼 만들고, 그렇게 해야 더 신령한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가르치면 잘못이다.
유대인의 절기와 관습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유대인에게는 자연스러운 유산일 수 있다. 그러나 이방인 그리스도인에게 그것을 필수로 요구하면 복음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다.
유대인처럼 될 수는 있어도 유대인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우리가 유대인처럼 행동하는 것은 어떠한가.
그것은 옳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9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바울은 율법 아래 있지 않았지만,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기 위해 율법 아래 있는 자처럼 되었다. 또한 율법 없는 자들을 얻기 위해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되었다. 이것은 복음을 위한 선교적 적응이다.
허드슨 테일러가 중국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중국인의 옷을 입고, 변발을 하고, 중국 음식을 먹었던 것과 같다. 그는 중국인이 되려 한 것이 아니라, 중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그들의 문화 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려면 유대인들의 언어와 문화와 절기와 정서를 이해해야 한다. 그들의 식탁에 앉고, 그들의 질문을 듣고, 그들의 역사적 상처를 존중해야 한다. 때로는 유대인처럼 행동할 수 있다.
그러나 이유가 중요하다.
그것은 복음을 전하기 위함이다.
그들을 얻기 위함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그들 곁에 서기 위함이다.
그러나 그것이 더 성경적이기 때문에, 더 영적이기 때문에, 더 높은 신앙이기 때문에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하면 위험하다.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유대인처럼 행동할 수는 있다.
그러나 유대인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유대인을 사랑해야 한다. 그러나 유대교로 돌아가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을 축복해야 한다. 그러나 이방인 그리스도인으로서 받은 복음의 자유를 버려서는 안 된다.
우리의 뿌리는 히브리적 뿌리보다 더 깊은 곳에 있다.
골로새서 2장 6절과 7절은 말한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우리의 궁극적인 뿌리는 유대교가 아니다.
히브리적 전통도 아니다.
우리의 최종적인 뿌리는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박아야 한다. 그 안에서 세움을 받아야 한다. 그 안에서 믿음에 굳게 서야 한다. 그리고 감사함을 넘치게 해야 한다.
히브리적 배경은 우리를 성경 이해의 풍성함으로 도울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생명이 될 수는 없다. 생명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
한 새 사람을 향하여
결국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이방인이 유대인처럼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한 새 사람이다.
에베소서 2장은 예수님께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막힌 담을 허무셨다고 말한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예수님은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다. 그리고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셨다. 십자가로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다.
한 새 사람은 유대인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방인만으로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한 새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아버지께 나아가는 것이다. 한 성령 안에서 함께 서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 새 사람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유대인은 유대인으로, 이방인은 이방인으로 서야 한다. 이방인 그리스도인이 메시아닉 유대인을 동경하여 유대인화되면, 오히려 한 새 사람은 왜곡된다.
하나님은 유대인을 없애고 이방인만 남기려 하신 것이 아니다. 또한 이방인을 유대인으로 바꾸어 하나 되게 하시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둘을 하나로 만드신다.
다름을 지운 하나가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화목하게 된 하나다.
이것이 복음의 영광이다.
우리는 이스라엘을 사랑해야 한다.
유대인을 축복해야 한다.
성경의 히브리적 배경도 배워야 한다.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은 히브리어에 있지 않다.
우리의 생명은 절기에 있지 않다.
우리의 능력은 안식일 준수에 있지 않다.
우리의 모든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림자를 연구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림자를 붙들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표지판 앞에 머무는 사람들이 아니다.
표지판이 가리키는 예수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이다.
마지막 시대 교회가 회복해야 할 것은 유대적 형식이 아니다.
첫사랑이다.
절기보다 그리스도.
안식일보다 그리스도.
히브리적 뿌리보다 그리스도.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아버지께 나아가는 한 새 사람의 영광을 붙드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이스라엘을 사랑하되, 그리스도를 중심에 두어야 한다.
유대인을 축복하되, 복음의 자유를 잃지 말아야 한다.
히브리적 뿌리를 배우되, 우리의 최종적인 뿌리가 그리스도이심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때 우리는 대체신학의 오류도 피하고, 히브리적 뿌리 운동의 함정도 피할 수 있다.
그리고 마침내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서는 복음의 아름다움을 보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먼저 공기의 결이 달라진다. 창문은 그대로 있고, 길도 그대로 있고, 아침마다 마시는 커피의 온도도 크게 다르지 않은데,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은 예전과 다른 방식으로 말하고, 다른 방식으로 사고하고, 다른 방식으로 연결되기 시작한다.
시대의 변화는 처음에는 조용하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 변화는 거대한 물결이 되어 사람들의 삶 전체를 밀고 들어온다.
4차 산업혁명이라는 말도 그렇게 등장했다.
2016년 1월, 스위스 다보스 포럼에서 이 말이 공식적으로 언급되기 시작했다. 세계의 정치 지도자들, 경제인들, 학자들, 기술 전문가들이 눈 덮인 다보스에 모여 앞으로의 세계를 이야기했다. 인공지능, 빅데이터, 사물인터넷, 로봇, 블록체인, 초연결 사회. 그 말들은 아직 사람들에게 낯설었지만, 이미 미래는 그 단어들 안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두 달 뒤, 2016년 3월 한국에서 하나의 상징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국이었다.
바둑판은 작았다. 가로세로 19줄의 선이 교차하는 정사각형의 세계. 그러나 그 작은 판 위에서 인류는 자기 자신이 만든 지능과 마주 앉았다. 바둑돌 하나가 놓일 때마다 사람들은 묘한 긴장감을 느꼈다. 그것은 단순히 한 사람의 기사와 한 프로그램의 대결이 아니었다. 인간의 직관과 기계의 계산, 인간 문명의 오래된 자부심과 새로운 시대의 도래가 마주 앉은 장면이었다.
알파고가 이겼을 때, 사람들은 이상한 충격을 받았다.
기계가 계산을 잘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바둑은 달랐다. 바둑은 직관의 영역이고, 기세의 영역이고, 묘수의 영역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그곳에 인간만의 어떤 신비가 남아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그 신비의 방 안으로 인공지능이 조용히 들어왔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었다. 이제 세상은 이전과 같지 않을 것이라고.
4차 산업혁명은 단순한 기술의 변화가 아니다. 그것은 세상이 움직이는 방식의 변화다. 정보가 흐르는 방식, 돈이 움직이는 방식, 권력이 형성되는 방식, 사람들이 연결되는 방식이 바뀌는 것이다.
그리고 이 변화의 중심에 있는 중요한 단어 가운데 하나가 있다.
탈중앙화. Decentralization.
무너진 금융 시스템과 새로운 길
4차 산업혁명의 한복판에 블록체인과 암호화폐가 있다.
그 이야기를 하려면 잠시 2007년과 2008년으로 돌아가야 한다. 미국에서 시작된 글로벌 금융위기의 시간이다. 그때 세계는 한 번 크게 흔들렸다. 너무 큰 건물이 무너질 때, 사람들은 처음에는 그 소리를 믿지 못한다. 마치 멀리서 천둥이 치는 줄 안다. 그러나 잠시 뒤 땅이 흔들리고, 먼지가 밀려오고, 사람들이 뛰기 시작하면 알게 된다. 무너진 것은 남의 건물이 아니었다는 것을.
2000년대 초반, 미국은 이미 깊은 불안 속에 있었다. 9·11 테러가 있었고,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이라크 전쟁이 이어졌다. 경제는 흔들렸고, 정부는 경기 부양을 위해 초저금리 정책을 펼쳤다.
금리가 낮아지자 사람들은 집을 사기 시작했다. 주택융자 금리가 내려갔기 때문이다. 이전 같으면 집을 살 수 없던 사람들도 대출을 받아 집을 샀다. 너도나도 집을 샀고, 집값은 계속 올랐다.
금융회사들도 계산기를 두드렸다. 부동산 가격이 계속 오른다면, 설령 어떤 사람이 대출금을 갚지 못하더라도 집을 팔면 손해 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고객들의 돈을 주택과 부동산 관련 상품에 엄청나게 투자했다.
한동안 모든 것이 잘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집값은 올랐고, 사람들은 부자가 된 것처럼 느꼈고, 금융회사들은 더 많은 상품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렇게 높이 쌓아 올린 집은 사실 모래 위에 세워져 있었다.
2004년 무렵, 초저금리 정책이 한계에 다다르기 시작했다. 금리는 다시 올라갔다. 주택융자 이자도 올라갔다. 그러자 가난한 대출자들이 이자를 감당하지 못하기 시작했다. 대출금을 갚지 못했고, 파산했다.
부동산 가격은 하락했다. 금융회사들은 대출금을 회수하지 못했다. 증권회사와 금융회사들이 연쇄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시작된 균열은 전 세계로 퍼졌다.
세계 경제는 하나의 거대한 유리병처럼 보였다. 멀리 떨어진 나라의 균열이 곧장 다른 나라의 균열로 이어졌다. 중앙집권화된 금융 시스템이 한 번 흔들리자, 사람들은 자신이 얼마나 그 시스템에 의존하고 있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때 사토시 나카모토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그 이름이 개인인지, 그룹인지, 실제 이름인지, 가명인지 우리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는 한 가지를 분명히 보았다. 중앙집권화된 금융 시스템이 무너지기 시작하면 얼마나 위험한가를 보았다.
은행과 정부와 거대한 금융기관이 모든 거래를 중개하고 통제하는 시스템. 사람들은 그 시스템을 믿고 살아왔다. 그러나 그 시스템이 흔들릴 때, 평범한 사람들의 삶도 함께 흔들렸다.
그래서 사토시 나카모토는 전혀 다른 방식의 거래를 상상했다.
중앙의 권위자가 없어도, 개인과 개인이 직접 안전하게 거래할 수 있는 시스템. 모든 거래 기록이 분산되어 저장되고, 참여자들이 함께 검증하는 구조. 누군가 하나의 중앙 서버를 장악한다고 해서 전체 시스템이 무너지지 않는 방식.
그것이 블록체인의 원리다.
쉽게 말하면, 모든 거래 장부를 한 곳에만 보관하지 않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같은 장부를 함께 가지고 있고, 새로운 거래가 생길 때마다 모두가 그것을 확인한다. 누군가 장부를 조작하려면 한 곳만 바꾸면 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장부를 동시에 바꾸어야 한다.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그 원리를 바탕으로 등장한 것이 비트코인이다.
비트코인은 단순한 가상화폐가 아니다. 그것은 한 시대의 질문에 대한 기술적 응답이었다. 중앙의 권력이 무너질 때 사람들은 어떻게 안전하게 연결될 수 있는가. 거대한 기관을 통하지 않고도 개인과 개인이 어떻게 신뢰를 만들 수 있는가.
이 질문은 단순히 경제의 문제가 아니다.
그 안에는 시대의 흐름이 담겨 있다.
탈중앙화. 중심에서 주변으로. 거대한 기관에서 개인으로. 소수의 통제에서 다수의 참여로.
탈중앙화와 영적 세계의 변화
4차 산업혁명의 키워드 가운데 하나가 탈중앙화라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영적인 세계에서도 비슷한 흐름을 생각하게 된다.
물론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의 기술 흐름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성령의 역사는 블록체인이나 인공지능을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종종 시대의 구조 속에서도 당신의 영적 경륜을 암시하신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변화가 영적 세계의 흐름을 비추는 그림자처럼 보일 때가 있다.
그동안 교회와 사역의 세계도 어느 정도 중앙집권적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몇몇 유명한 사역자들, 몇몇 큰 교회들, 몇몇 중심적인 단체들, 몇몇 두드러진 지도자들을 통해 영적 흐름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사람들은 이름 있는 사람을 찾아갔고, 큰 집회에 모였고, 유명한 강사의 메시지를 들으려고 했다.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들을 사용하지 않으셨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지난 시대에 놀라운 하나님의 사람들을 세우셨다. 빌리 그래함, 오럴 로버츠, 캐서린 쿨만, 데이비드 윌커슨, 존 윔버 같은 사람들. 그들은 자기 시대에 하나님께 쓰임 받은 거인들이었다.
그러나 마지막 때의 부흥은 다른 방식으로 오게 될 것이다.
그 부흥은 한두 명의 슈퍼스타를 중심으로만 움직이지 않는다. 한 사람의 이름, 한 사람의 얼굴, 한 사람의 플랫폼이 아니라, 수많은 이름 없는 사람들, 얼굴 없는 사람들, 조용히 준비된 사람들이 동시에 일어나는 방식으로 오게 될 것이다.
이것이 Nameless, Faceless Generation이다.
이름도 없고 얼굴도 없는 세대.
그들은 무명이라는 뜻에서 하찮은 사람들이 아니다. 얼굴이 없다는 뜻에서 정체성이 없는 사람들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자기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자기 얼굴을 앞세우지 않는 사람들이다. 사람들의 박수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더 갈망하는 사람들이다.
중심에 서려 하지 않지만, 하나님 나라의 중심을 붙드는 사람들. 유명해지려 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통로가 되는 사람들. 자기 왕국을 세우려 하지 않고, 오직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는 사람들.
이런 세대가 일어날 것이다.
폴 케인의 예언
폴 케인은 20세기 후반 은사주의와 예언 사역의 세계에서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의 삶에는 논란도 있었고, 인간적인 연약함도 있었다. 그러나 그를 통해 선포된 몇몇 예언적 메시지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오래 남았다.
1989년 2월, 그는 한 가지 중요한 환상을 보았다. 그리고 그 내용을 애너하임 빈야드교회가 주최한 컨퍼런스에서 나누었다.
그는 장차 nameless, faceless generation이 등장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본 그림은 거대했다.
스타디움이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그 중심에 특정한 한 사람의 이름이 높이 걸려 있지 않았다. 무대 위의 한 인물이 모든 영광을 받는 장면이 아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일어나고 있었다.
병원들이 텅텅 비게 될 것이라고 했다. 병든 자들이 치유되고, 심지어 죽은 자들이 살아나는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했다. 그것이 특정한 몇몇 사역자들의 손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평범한 성도들을 통해 일어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이 너무 놀라운 방식으로 나타나서, 각 나라의 수많은 미디어들이 그 일을 보도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세상 언론이 복음을 믿어서가 아니라, 일어난 일을 외면할 수 없기 때문에 보도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장면을 상상해 보면, 그것은 이상하면서도 가슴 뛰는 그림이다.
병원의 복도는 조용해지고, 휠체어는 빈 채 남겨지고, 스타디움에는 이름 모를 청년들과 어린이들과 노인들이 기도하고 있다. 마이크를 잡은 유명한 한 사람이 아니라, 곳곳에서 기도하는 무명의 사람들이 있다. 카메라는 누구의 얼굴을 클로즈업해야 할지 모른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너무 많은 사람들 위에 동시에 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nameless, faceless generation이다.
두 거인의 퇴장과 부흥의 전조
1989년, 베니 힌도 비슷한 맥락에서 예언적 메시지를 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두 영적인 거인, 오럴 로버츠와 빌리 그래함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장차 대부흥이 시작되는 전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오럴 로버츠는 2009년에 세상을 떠났다. 빌리 그래함은 2018년 2월 21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들은 각각 자기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오럴 로버츠는 치유와 믿음의 사역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쳤고, 빌리 그래함은 전 세계 복음전도 운동의 상징과 같은 사람이었다. 그들의 이름은 한 시대의 산맥처럼 서 있었다.
그러나 산맥도 어느 날 저녁빛 속으로 들어간다.
하나님은 한 시대의 거인들을 사용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거인들이 떠난 뒤에도 멈추지 않는다. 오히려 어떤 때에는 거인들의 퇴장이 다음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처럼 울릴 수 있다.
큰 나무가 쓰러지면 숲은 잠시 텅 빈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빈 공간으로 햇빛이 들어온다. 그 햇빛 아래에서 작은 나무들이 자라기 시작한다.
한두 사람의 거대한 사역자가 아니라, 수많은 이름 없는 사람들이 동시에 일어나는 시대. 어쩌면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를 위해 준비하시는 부흥은 그런 방식일 수 있다.
모든 육체에게 부어지는 성령
이것은 단순한 예언적 상상에만 머물지 않는다. 성경적 근거가 있다.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는 오순절 성령강림을 설명하며 요엘서의 예언을 인용한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여기서 중요한 표현은 모든 육체이다.
성령은 더 이상 특정한 왕, 특정한 선지자, 특정한 제사장에게만 임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영이 모든 육체에게 부어진다. 아들들과 딸들이 예언하고, 젊은이들이 환상을 보고, 늙은이들이 꿈을 꾼다. 남종과 여종에게도 하나님의 영이 부어진다.
이것은 영적 권위의 탈중앙화처럼 보인다.
물론 하나님은 여전히 질서의 하나님이시다. 교회에는 영적 권위와 질서가 필요하다. 그러나 성령의 부으심은 더 이상 소수의 특별한 사람에게만 제한되지 않는다.
모든 육체에게 부어진다. 아들들에게도, 딸들에게도. 젊은이들에게도, 노인들에게도. 남종에게도, 여종에게도.
마지막 때의 성령의 역사는 소수의 슈퍼 크리스천들을 통해서만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일어날 것이다.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은 과거의 놀라운 하나님의 사람들 이상의 사역을 감당하게 될 수 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의 레벨이 갑자기 상승하는 것이다.
그때에는 병을 고친다고 해서 반드시 두드러지는 사람이 되지 않을 것이다. 예언한다고 해서 특별한 사람이 되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그것이 한 사람의 이름을 스타처럼 만들지 않을 수 있다.
왜냐하면 거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사역하는 시대가 올 수 있기 때문이다.
세탁병이 장군이 되는 날
군대에는 보직이 많다. 전투병도 있고, 행정병도 있고, 취사병도 있고, 운전병도 있고, 세탁병도 있다.
언젠가 한 목사님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는 군대에서 세탁병이었다. 세탁병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대개 전쟁의 중심에 서 있는 사람을 떠올리지 않는다. 총을 들고 전방에 서 있는 것도 아니고, 작전을 지휘하는 것도 아니다. 세탁물을 모으고, 빨고, 말리고, 정리하는 일을 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별로 주목받지 못하는 자리다.
그러나 전쟁이 길어지면 모두가 알게 된다. 군대는 총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밥이 있어야 하고, 옷이 있어야 하고, 잠잘 곳이 있어야 하고, 상처를 싸매 줄 사람이 있어야 한다.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섬기는 사람들이 없으면, 전투병도 오래 싸울 수 없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그렇다.
마지막 때에는 무대 위의 몇몇 장군들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어린이, 청년, 노인, 평신도, 이름 없는 중보자, 조용히 섬기던 사람들,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장군들로 일어날 것이다.
세탁병처럼 보이던 사람이 영적 장군이 될 수 있다. 주방에서 섬기던 사람이 치유의 통로가 될 수 있다. 이름 없이 기도하던 노인이 부흥의 불씨가 될 수 있다. 어린아이의 기도가 한 도시의 어둠을 흔들 수 있다.
그날에는 수많은 nameless, faceless한 사역자들이 등장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 온 세상이 부흥의 불길로 휩싸이게 될 것이다.
신부의 영성
이 세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가서를 보아야 한다.
아가서는 단순한 사랑의 노래가 아니다. 그것은 신부의 영성을 보여 주는 책이다. 신랑을 갈망하는 신부, 신랑을 찾아 나서는 신부, 신랑과 더 깊은 사랑 안으로 들어가는 신부의 이야기다.
성경 전체를 길게 펼쳐 보면, 영원 과거에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사랑이 있었다. 삼위 하나님 안의 완전한 사랑과 교제가 있었다. 그런데 영원 미래에는 거기에 신부가 더해진다.
아버지, 아들, 성령, 그리고 신부.
요한계시록 22장 17절은 말한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마지막 장면에서 성령과 신부가 함께 말한다. “오라.”
이것은 놀라운 말씀이다. 성령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신부도 함께 말한다. 성령과 신부가 한 음성으로 주님의 오심을 부른다.
마지막 때의 교회는 단순히 조직이나 기관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신부로 존재한다.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 신랑과 깊은 사랑 안에 들어간 신부, 신랑의 마음을 알고 신랑과 함께 “오라”고 외치는 신부다.
Nameless, faceless generation은 단순한 사역자 세대가 아니다. 그들은 신부 세대다.
자기 이름을 높이는 사람들이 아니라, 신랑의 이름을 높이는 사람들. 자기 얼굴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아니라, 신랑의 얼굴을 드러내는 사람들. 자기 사역을 세우는 사람들이 아니라, 신랑의 사랑 안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이다.
들로, 동네로 나아가는 신부
아가서 7장 10절에서 13절은 신부의 고백을 담고 있다.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도다. 그가 나를 사모하는구나.”
이 고백은 신부의 정체성이다. 신부는 자기 자신을 자기 소유로 보지 않는다. 그는 신랑에게 속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신랑이 자신을 사모한다는 것을 안다.
그 사랑을 알게 된 신부는 이제 신랑에게 말한다.
“내 사랑하는 자야 우리가 함께 들로 가서 동네에서 유숙하자.”
여기서 들은 광야이며, 시골이며, 메인 라인 바깥의 자리다.
이들은 중심부의 사람들이 아니다. 교단 중심, 유명인 중심, 사역의 크기로 사람을 평가하는 사람들도 아니다. 그들은 광야의 사람들이다. 예수님이 등장하시기 전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외쳤던 것처럼, 그들은 광야에서 준비되고 광야에서 사역하는 사람들이다.
광야는 이름이 사라지는 곳이다. 광야는 얼굴이 드러나지 않는 곳이다. 광야는 사람의 박수가 닿지 않는 곳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종종 광야에서 사람을 만드신다. 광야에서 세례 요한을 준비시키셨고, 광야에서 모세를 다루셨고,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훈련하셨다.
Nameless, faceless generation은 광야의 세대다.
그들은 화려한 중심부에서 만들어지지 않을 수 있다. 조용한 기도의 자리, 작은 공동체, 보이지 않는 순종,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섬김 속에서 준비될 것이다.
그런데 신부는 들로만 가자고 하지 않는다. “동네에서 유숙하자”고 말한다.
동네는 함께 사는 곳이다. 고립된 개인들의 자리가 아니다. 관계와 일상과 공동체가 있는 곳이다. 이 세대는 혼자 잘난 영웅들이 아니다. 그들은 함께 사는 사람들이다. 함께 기도하고, 함께 울고, 함께 분별하고, 함께 움직이는 사람들이다.
요한복음 17장의 참된 연합은 바로 이런 사람들을 통해 풀리게 될 것이다.
이름 없는 사람들이지만 고립된 사람들이 아니다. 얼굴 없는 사람들이지만 무정체성의 군중이 아니다. 그들은 신랑에게 속한 신부이며, 서로 연결된 공동체다.
사랑 안에서 열매가 익어 간다
아가서 7장 12절과 13절은 계속 말한다.
“우리가 일찍이 일어나서 포도원으로 가서 포도 움이 돋았는지, 꽃술이 퍼졌는지, 석류 꽃이 피었는지 보자. 거기에서 내가 내 사랑을 네게 주리라.”
신부는 신랑과 함께 포도원으로 간다. 포도 움이 돋았는지, 꽃술이 퍼졌는지, 석류 꽃이 피었는지 본다. 이것은 열매의 언어다. 생명의 언어다. 사랑이 익어 가는 언어다.
마지막 때의 nameless, faceless generation은 단순히 능력 사역만 하는 세대가 아니다. 그들은 신랑과 더 깊은 사랑 안에 들어가는 세대다. 병을 고치고, 예언하고, 기적을 행하는 것보다 더 깊은 곳에서 신랑을 사랑하는 세대다.
그
들은 사역의 열매보다 신랑과의 사랑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왜냐하면 사역은 사랑에서 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사랑 없이 나타나는 능력은 결국 사람을 높이게 된다. 그러나 신랑과의 사랑 안에서 흘러나오는 능력은 오직 신랑의 영광을 드러낸다.
아가서 8장 5절에서 친구들은 말한다.
“그의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고 거친 들에서 올라오는 여자가 누구인가.”
이 장면은 참으로 아름답다.
거친 들에서 한 여자가 올라오고 있다. 그녀는 혼자 올라오지 않는다.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고 올라온다. 광야를 지나왔고, 거친 들을 지나왔지만, 그녀는 신랑에게 기대어 올라온다.
R. T. 켄달은 1992년 10월, 런던 웸블리 컨퍼런스센터에서 열린 컨퍼런스 폐회 설교 중 매우 도전적인 메시지를 전했다.
그는 오순절 운동, 혹은 은사주의 운동을 이스마엘에 비유했다. 그리고 장차 이삭이 나타날 것이라고 말했다. 행 2장, 곧 요엘 2장의 예언이 온전히 성취될 날이 올 것이라고 말했다.
이 말은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적으로 들렸다.
왜냐하면 오순절 운동은 지난 100년 동안 엄청난 일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수억 명의 사람들이 이 운동을 통해 하나님 나라로 들어왔다. 성령의 은사와 능력, 방언, 치유, 예언, 선교적 열정이 전 세계로 퍼졌다. 그것은 분명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였다.
그 운동을 위해 평생을 바친 지도자들이 있었다. 그들의 눈물과 헌신과 수고가 있었다. 그래서 켄달의 메시지를 받아들인 사람도 있었지만, 받아들이기 어려워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 마음도 이해할 수 있다. 누군가 평생 섬겨 온 운동을 이스마엘이라고 부른다면, 마음이 아플 수밖에 없다.
그러나 켄달이 말하려 한 핵심은 오순절 운동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장차 더 온전한 성취, 더 깊은 성령의 부으심, 더 넓고 순전한 하나님의 역사가 올 것을 말하고 있었다.
이스마엘도 아브라함의 집에서 태어났다. 이스마엘에게도 하나님의 긍휼이 있었다. 그러나 약속의 아들은 이삭이었다.
지난 세기의 성령 운동은 놀라운 역사였다. 그러나 마지막 때에는 그것을 넘어서는 더 깊은 성령의 부으심이 올 수 있다. 소수의 능력 사역자 중심이 아니라, 모든 육체에게 부어지는 성령의 시대. 이름 없는 신부 세대가 일어나 온 세상을 흔드는 시대.
그것이 장차 나타날 이삭의 그림자일 수 있다.
해가 떠오르는 환상
아직 세상은 완전히 밝지 않았다. 새벽의 끝과 아침의 시작 사이, 하늘은 어둠을 조금씩 밀어내고 있었다. 멀리 수평선 너머에서 빛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희미한 선이었다. 아주 얇은 금빛 선. 그러나 그 선은 점점 넓어졌다. 어둠은 한 번에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빛이 올라오는 방향은 분명했다.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그 장면은 조용했다. 그러나 그 안에는 거부할 수 없는 힘이 있었다. 해가 떠오르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아무도 동쪽 하늘을 손으로 눌러 다시 어둡게 만들 수 없다. 빛은 자기 시간을 따라 올라온다.
하나님의 역사도 때로 그렇다.
오랫동안 준비된 일이 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라 온 씨앗들이 있다. 광야에서 만들어진 사람들이 있다. 이름 없이 기도한 사람들이 있다. 얼굴 없이 섬긴 사람들이 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보신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어느 순간 해가 떠오르듯, 그들이 일어난다.
큰 소리를 내며 등장하지 않을 수 있다. 자기 이름을 걸고 운동을 시작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성령께서 그들 위에 임하시면, 세상은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다.
이름 없이, 얼굴 없이, 그러나 영광으로
4차 산업혁명은 세상의 구조를 바꾸고 있다. 중앙에서 주변으로, 거대한 기관에서 개인으로, 소수의 통제에서 다수의 참여로 흐름이 이동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그보다 더 깊은 차원의 변화를 준비하고 있다.
소수의 유명한 사역자 중심에서, 수많은 성도들이 함께 일어나는 시대로. 무대 위의 한 사람 중심에서, 광야와 동네의 신부 공동체로. 이름과 얼굴을 앞세우는 사역에서, 오직 신랑의 이름과 얼굴을 드러내는 사역으로.
Nameless, faceless generation.
그들은 자기 이름을 지우는 사람들이 아니다.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참된 정체성을 발견한 사람들이다. 자기 얼굴을 감추는 사람들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만이 드러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스타가 되기를 거부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담는 그릇이 된다.
그들은 중심에 서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중심을 붙든다.
그들은 박수를 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늘의 증언을 받는다.
그날에는 어린아이도 예언할 것이다. 청년들은 환상을 볼 것이다. 노인들은 꿈을 꿀 것이다. 남종과 여종에게도 성령이 부어질 것이다. 평신도들이 장군처럼 일어날 것이다. 병원이 비고, 스타디움이 차고, 미디어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도하는 일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그 중심에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이름 하나가 높아지지 않을 것이다. 얼굴 하나가 영광을 독점하지 않을 것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오직 신랑. 오직 하나님의 영광.
성령과 신부가 함께 말할 것이다.
“오라.”
그리고 그 음성은 광야에서, 동네에서, 작은 기도실에서, 병실에서, 거리에서, 학교에서, 가정에서, 이름 없는 성도들의 입술에서 흘러나올 것이다.
그 문은 낡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오래되어 낡음이라는 말조차 어울리지 않는다. 시간보다 먼저 있었던 문, 인간의 질문보다 먼저 있었던 문이다. 그 문 앞에서 사람은 자연스럽게 조용해진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성경은 그렇게 시작한다.
이 문장은 짧다. 그러나 이 짧은 문장 안에는 인간이 평생 붙들고 씨름해도 다 풀 수 없는 깊이가 들어 있다. 하나님, 태초, 창조, 하늘과 땅. 이 네 개의 단어만으로도 우주 전체가 열린다. 아니, 우주보다 더 깊은 질문이 열린다.
나는 어디서 왔는가. 이 세계는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우주는 우연인가, 아니면 뜻이 있는가. 인간은 먼지의 우발적 배열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손길을 입은 존재인가.
요즘 교계와 학계에서 자주 논의되는 주제 가운데 하나가 창조과학과 유신진화론이다. 둘 다 창세기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하는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더 깊이 들어가면, 성경과 과학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창조과학은 대체로 하나님을 믿는 과학자들이 성경의 창조를 과학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에서 출발했다. 그 안에는 귀한 동기도 있다. 성경을 버리지 않으려는 마음, 하나님의 창조를 붙들려는 마음, 무신론적 세계관에 맞서려는 마음이 있다.
그러나 문제는 젊은 지구론이다. 지구의 역사를 6천 년에서 1만 년 정도로 보는 해석이다. 이 주장은 현대 천문학과 지질학, 물리학이 말하는 우주의 연대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현대 과학은 우주의 나이를 약 138억 년으로 보고, 지구의 나이를 약 45억 년에서 46억 년 정도로 본다.
이 차이는 작지 않다. 조금 다른 정도가 아니다. 바닷가에 서서 모래 한 줌의 수를 세는 것과 은하계의 별을 세는 것만큼이나 크다.
그래서 학계에서는 창조과학, 특별히 젊은 지구론을 과학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과학이라기보다 신앙적 주장이라고 본다. 과학의 언어를 사용하지만, 과학적 방법론으로 충분히 검증되고 설명되는 체계는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한쪽으로 쉽게 갈 수도 없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 가운데 약 백 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이 유신진화론이다. 무신진화론은 하나님 없이 진화가 모든 생명과 인간을 설명한다고 보는 입장이다. 반면 유신진화론은 하나님께서 진화의 과정을 사용하셔서 생명과 인간을 이끌어 오셨다고 본다.
이 입장은 창조과학의 난점을 피하려 한다. 현대 과학의 연구 결과를 받아들이면서도 하나님 신앙을 유지하려는 시도다. C. S. 루이스나 팀 켈러 같은 인물들도 넓은 의미에서 이 논의와 관련해 언급되곤 한다.
그러나 유신진화론에도 어려움이 있다. 이 입장에서는 창세기 1장부터 3장의 역사성이 약해지기 쉽다. 창조 기사는 실제 역사라기보다 신화적 언어, 상징적 이야기, 신학적 시라고 해석되는 경향이 강해진다. 그러다 보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선포는 남아 있지만, 그 창조의 구체성과 역사성은 점점 희미해진다.
성경은 말하고 있는데, 그 말이 마치 먼 안개 속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창조과학의 젊은 지구론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러나 유신진화론처럼 창세기 1장에서 3장을 신화나 상징으로 밀어 넣는 것도 받아들이기 어렵다. 과학을 무시할 수도 없고, 성경을 약화시킬 수도 없다.
그렇다면 성경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창세기 1장 1절과 2절 사이
창조과학은 대체로 창세기 1장 1절과 2절을 거의 바로 이어지는 사건으로 읽는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그리고 곧이어,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이렇게 읽으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고, 그 직후 땅이 혼돈하고 공허한 상태였으며, 이어지는 6일 창조를 통해 그 땅을 정돈하셨다고 이해하게 된다. 이 구조 안에서는 우주와 지구의 생성연대가 6천 년에서 1만 년 정도라는 설명으로 흐르기 쉽다.
그러나 과연 창세기 1장 1절과 2절은 그렇게 바로 이어지는 말씀인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1절과 2절 사이에는 우리가 쉽게 지나쳐 온 깊은 간격이 있다. 시간의 간격이고, 역사의 간격이며, 어떤 심판의 흔적이 놓여 있는 간격이다.
창세기 1장 1절은 하나님의 원초적 창조를 말한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하신 창조는 완전하고 질서 있으며 목적을 가진 창조다. 하나님은 혼돈의 하나님이 아니시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은 본래 무질서와 공허와 흑암의 덩어리가 아니다.
그런데 2절에 오면 전혀 다른 장면이 나타난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다. 흑암이 깊음 위에 있다. 수면 위에 하나님의 영이 운행하신다. 그 장면은 고요한 창조의 아침이라기보다, 무엇인가 무너진 뒤의 어두운 풍경처럼 보인다. 질서가 아니라 무질서가 있다. 충만함이 아니라 공허가 있다. 빛이 아니라 흑암이 있다.
히브리어로 혼돈은 토후이고, 공허는 보후다. 토후와 보후. 이 두 단어는 단순히 아직 정돈되지 않은 재료 상태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황폐함과 무질서와 비어 있음을 강하게 느끼게 한다.
이 지점에서 이사야 45장 18절을 보아야 한다.
“대저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을 창조하신 이 그는 하나님이시니 그가 땅을 지으시고 그것을 만드셨으며 그것을 견고하게 하시되 혼돈하게 창조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이 거주하게 그것을 지으셨으니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하나님은 땅을 혼돈하게 창조하지 않으셨다고 말씀하신다. 사람이 거주하도록 지으셨다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창세기 1장 2절의 혼돈과 공허는 하나님의 본래 창조 상태가 아니라, 그 이후 어떤 사건의 결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즉 1절과 2절 사이에는 어떤 일이 있었다.
성경은 그 간격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다. 그러나 완전히 침묵하지도 않는다. 성경의 다른 본문들은 그 사이에 있었을 법한 거대한 영적 사건의 그림자를 보여 준다.
“그리고”가 아니라 “그러나”의 느낌
히브리어 성경을 보면 창세기 1장 2절은 단순히 1절의 자연스러운 이어짐처럼만 보이지 않는다. 2절의 접속사는 “그리고”로 번역될 수 있지만, 문맥상 “그런데”, “그러나”의 뉘앙스를 가질 수 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그런데(그러나) 땅은 혼돈하고 공허하게 되었다.
이렇게 읽으면 본문의 분위기가 달라진다.
1절은 완전한 하나님의 창조를 말한다. 2절은 그 창조 세계가 어떤 이유로 황폐해진 상태를 보여 준다.
마치 잘 지어진 집이 있다. 견고하고 아름답게 지어진 집이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집에 다시 들어가 보니, 창문은 깨져 있고, 벽은 그을렸고, 가구는 뒤집혀 있고, 바닥에는 어둠과 먼지가 내려앉아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이 집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창세기 1장 2절도 그런 질문을 하게 만든다.
하나님께서 혼돈하게 창조하지 않으셨다면, 왜 땅은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는가.
인간 이전의 반역
성경은 인간이 창조되기 전에 이미 존재했던 피조물들에 대해 말한다. 천사들이다. 인간보다 먼저 창조된 영적 존재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천사들의 세계 안에서 어느 시점에 반역이 일어났다.
이사야 14장은 그 반역의 그림자를 보여 준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그 존재는 마음속으로 말했다.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이것이 사탄적 교만의 핵심이다.
피조물이 창조주의 자리에 앉으려 한다. 받은 영광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대신, 그 영광을 자기 것으로 삼으려 한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대신 자기 자신을 높이려 한다.
에스겔 28장도 두로 왕을 향한 예언의 배후에서 이와 비슷한 영적 그림자를 보여 준다. 완전한 아름다움, 지혜, 영광, 그리고 타락. 높은 곳에 있던 존재가 교만으로 인해 떨어지는 장면이다.
이 반역은 단순한 도덕적 실패가 아니다. 우주적 질서에 대한 반역이다.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경계를 허물려는 시도다. 하나님만이 앉으실 자리에 피조물이 앉으려 한 사건이다.
그 반역에 대해 하나님은 심판하셨다.
그리고 그 심판의 결과로 창세기 1장 2절의 상태가 되었다.
땅은 혼돈하고 공허하게 되었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가 불완전했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혼돈과 공허를 창조하셨다는 뜻도 아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 안에서 천사적 반역이 있었고, 그 반역에 대한 심판으로 땅이 황폐한 상태가 되었다는 뜻이다.
이렇게 보면 창세기 1장 1절과 2절 사이에는 엄청난 시간의 간격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간격 안에 현대 과학이 말하는 우주의 긴 역사, 지구의 오랜 연대가 자리하게 된다. 우주의 나이가 138억 년이고 지구의 나이가 45억 년에서 46억 년이라는 현대 천문학과 지질학의 설명이 사실이라고 해도, 그것은 창세기 1장의 본문과 반드시 충돌하지 않는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후 어떤 심판의 결과로 땅이 혼돈과 공허의 상태가 되었음을 암시한다. 이어지는 창조의 날들은 그 황폐한 땅을 하나님께서 다시 질서와 생명과 거주 가능한 세계로 회복하시는 장면으로 읽을 수 있다.
이렇게 읽으면 우리는 두 극단을 피할 수 있다.
하나는 과학적 증거를 무시한 채 지구의 역사를 무조건 6천 년에서 1만 년으로 제한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과학의 이름으로 창세기 1장에서 3장을 신화나 상징으로 밀어내는 것이다.
성경은 과학과 싸우는 책이 아니다. 그러나 과학에 의해 폐기될 책도 아니다.
성경과 과학이 다르게 보일 때
종종 성경과 과학의 증거가 서로 다른 말을 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그럴 때 어떤 사람들은 과학의 증거에 귀를 기울인다는 이유로 성경을 뒤로 밀어 둔다. 성경은 고대인의 신화적 세계관일 뿐이라고 말한다. 현대인은 이제 그것을 문자 그대로 믿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시편 12편 6절은 말한다.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
시편 119편 89절은 말한다.
“여호와여 주의 말씀은 영원히 하늘에 굳게 섰사오며.”
예수님도 마태복음 5장 18절에서 말씀하셨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하나님의 말씀은 일시적인 인간의 설명보다 깊다. 인간의 이론은 변한다. 과학의 모델도 발전하고 수정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선다.
그렇다고 과학을 무시하자는 말은 아니다.
과학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관찰하는 귀한 도구다. 우주의 질서, 물질의 구조, 생명의 복잡성, 지구의 역사, 별들의 움직임을 연구하는 일은 창조 세계를 들여다보는 일이다. 참된 과학은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계의 질서를 조심스럽게 읽어 가는 일이다.
문제는 과학 자체가 아니라, 과학을 무신론적 세계관 안에 가두는 태도다. 그리고 반대로, 성경을 믿는다고 하면서 성경 자체를 충분히 깊고 총체적으로 읽지 않는 태도도 문제다.
창조과학의 한계는 여기에 있다. 성경을 믿으려는 열심은 귀하다. 그러나 성경을 총체적으로, 자세히 살피지 못하면 본문이 실제로 열어 주는 가능성을 놓칠 수 있다. 창세기 1장 1절과 2절 사이에 무엇이 있었는지를 보지 못하면, 불필요하게 성경과 과학을 정면충돌시키게 된다.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으라
이사야 34장 16절은 말한다.
“너희는 여호와의 책에서 찾아 읽어보라.”
이 말씀은 단순히 성경을 대충 펴 보라는 말이 아니다.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으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는 빠진 것이 없고, 제 짝이 없는 것이 없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성령께서 그 말씀들을 모으셨다.
성경은 성경으로 풀어야 한다.
창세기 1장 2절의 혼돈을 이해하기 위해 이사야 45장을 보아야 한다. 사탄의 반역을 이해하기 위해 이사야 14장과 에스겔 28장을 함께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창조와 심판과 회복의 흐름을 성경 전체 안에서 보아야 한다.
성경은 단편적인 문장들의 모음이 아니다. 하나님의 큰 이야기다. 창조, 반역, 심판, 회복, 구속, 새 창조로 이어지는 거대한 이야기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조급하게 읽어서는 안 된다. 이미 가지고 있는 틀을 본문 위에 덮어 씌워서도 안 된다. 성경이 스스로 말하게 해야 한다.
베뢰아 사람들처럼
사도행전 17장에는 베뢰아 사람들이 나온다. 그들은 데살로니가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웠다. 그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았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다.
그들에게는 두 가지 태도가 있었다.
하나는 열린 마음이다. 또 하나는 자세히 살피는 마음이다.
열린 마음이 없으면 새로운 빛을 받을 수 없다. 이미 알고 있는 틀 안에 모든 것을 가두게 된다. 반대로 자세히 살피는 마음이 없으면 아무 것이나 받아들이게 된다. 감동적인 말, 새로워 보이는 주장, 그럴듯한 이론에 쉽게 흔들리게 된다.
베뢰아 사람들은 둘 다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마음을 열었다. 그러나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말씀을 받았다. 그러나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태도도 이것이다.
창조과학의 열심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유신진화론의 지적 조정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성경 앞에 다시 서야 한다. 열린 마음으로, 그러나 간절하고 치밀한 마음으로 서야 한다.
창세기 1장 1절과 2절 사이에 놓인 깊은 간격을 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혼돈하게 창조하지 않으셨다는 말씀을 들어야 한다. 천사적 반역과 심판의 가능성을 성경 전체의 빛 안에서 살펴야 한다. 그리고 과학이 말하는 우주의 긴 역사와 성경의 창조 신앙이 반드시 충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볼 수 있어야 한다.
태초의 문 앞에서
결국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성경을 지키기 위해 과학을 억지로 부정할 필요는 없다. 과학을 존중하기 위해 성경을 신화로 밀어낼 필요도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깊다. 인간이 서둘러 만든 해석보다 깊다. 과학의 잠정적 결론보다도 깊고, 신앙인의 조급한 방어 논리보다도 깊다.
창세기 1장 1절은 여전히 선포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그 말씀은 흔들리지 않는다. 우주가 몇 억 년인지, 몇십 억 년인지에 따라 약해지지 않는다. 지구의 지질학적 역사가 길다고 해서 그 말씀이 희미해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 긴 시간은 하나님의 창조의 광대함을 더 깊이 느끼게 한다. 별빛이 수십억 년의 거리를 건너 우리 눈에 도착할 때, 우리는 단지 과학적 거리만 보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창조가 얼마나 장엄한지를 본다.
그러나 성경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 창조 세계 안에 반역이 있었다. 심판이 있었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운행하셨다. 하나님은 황폐한 곳 위에 다시 임하셨다. 어둠 위에 빛을 명하셨다. 혼돈을 질서로, 공허를 충만으로, 흑암을 빛으로 바꾸기 시작하셨다.
이것이 창세기 1장의 위대한 메시지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다. 하나님은 심판자이시다. 하나님은 회복자이시다.
그분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다. 또한 무너진 곳에서 다시 질서를 세우신다. 혼돈 위에 말씀하시고, 공허 위에 생명을 불어넣으시며, 흑암 가운데 빛을 부르신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 1절과 2절은 단순히 우주의 기원을 설명하는 문장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보여 주는 첫 장면이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계셨다. 하나님은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무너진 것을 다시 붙드셨다. 하나님은 어둠 속에서도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 말씀은 지금도 유효하다.
우리의 삶이 혼돈하고 공허할 때,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 하나님의 영은 여전히 그 수면 위에 운행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빛이 있으라.
그때 빛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다시 읽어야 한다. 자세히 읽어야 한다. 총체적으로 읽어야 한다. 두려움이 아니라 믿음으로 읽어야 한다. 과학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더 깊이 신뢰하며 읽어야 한다.
비가 오기 전의 냄새, 바람의 방향, 구름의 두께, 저녁 무렵 서쪽 하늘에 번지는 붉은빛. 사람들은 그것을 보며 다음 날의 날씨를 짐작했다. 농부는 밭으로 나갈지 말지를 결정했고, 어부는 배를 띄울지 말지를 생각했다. 하늘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 같지만, 자세히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늘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6장에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그들은 하늘을 읽을 줄 알았다. 저녁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을 것을 알았고, 아침 하늘이 붉고 흐리면 날이 궂을 것을 알았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께서 그 시대 가운데 보내시는 영적 신호는 읽지 못했다. 그들은 하늘의 색은 알았지만, 역사의 색은 보지 못했다. 날씨는 예측했지만, 하나님이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신지는 알지 못했다.
시대의 표적이란 그런 것이다.
그것은 반드시 천둥소리처럼 크게 울리지 않는다. 때로는 한 영화 속에, 한 노래 속에, 한 세대가 열광하는 문화 현상 속에 스며든다. 사람들은 그것을 단순한 유행이라고 부른다. 흥행작이라고 부르고, 콘텐츠라고 부르고, 트렌드라고 부른다. 그러나 깨어 있는 사람은 그 표면 아래에서 다른 흐름을 본다. 그 시대의 갈망, 두려움, 상처, 부르심,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세대에 던지시는 질문을 본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그런 작품처럼 보인다.
처음에는 그저 독특한 애니메이션처럼 보인다. 케이팝과 귀신 사냥꾼, 아이돌과 악령, 한국 문화와 판타지가 묘하게 뒤섞인 작품처럼 보인다. 그러나 조금 더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여러 겹의 메시지가 들어 있다. 음악을 통한 영적 전쟁이 있고, 기독교 세계관을 넓히라는 도전이 있고, 죄와 귀신의 관계가 있고, 상처를 직면해야 자유할 수 있다는 메시지가 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야 한다.
왜 이 작품은 단순한 흥행작으로만 보이지 않는가.
왜 이것은 이 시대의 교회와 한국 교회, 그리고 한민족을 향한 어떤 표적처럼 느껴지는가.
왜 세계는 지금 한국을 바라보고 있는가.
말라기 4장 5절과 6절은 마지막 때를 향해 이렇게 말씀한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이 말씀은 마지막 때의 깊은 심장과 같다.
주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하나님은 엘리야의 영을 보내신다. 그리고 그 사역의 핵심은 마음을 돌이키는 것이다.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자녀의 마음을 아버지에게로 돌이키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가정 안에서 부모와 자녀가 화해하는 이야기만이 아니다. 물론 그것도 포함한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넓다. 세대와 세대의 연결, 유업과 부르심의 회복, 끊어진 관계의 회복, 흩어진 것들의 재결합, 하나님 나라 안에서 잃어버린 하나 됨을 다시 찾는 일이다.
이 말씀은 한국 교회의 연합, 남북한의 통일, 이슬람권을 향한 영적 돌파, 이스라엘의 회복까지 관통하는 마지막 때의 말씀으로 읽을 수 있다.
결국 이 말씀의 중심에는 하나의 단어가 있다.
연합.
하나 됨.
에하드.
오래전 마음에 들어온 말씀
어떤 말씀은 한 번 듣고 지나간다.
그러나 어떤 말씀은 마음속에 들어와 자리를 잡는다.
그 말씀은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다. 책장 속에 꽂아 둔 오래된 책처럼 조용히 거기 있다. 평소에는 잊고 사는 것 같지만, 어느 순간 삶의 중요한 장면 앞에서 다시 펼쳐진다.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2006년 봄, 연합에 대한 두 번째 계시가 임했다. 하나님께서 네트워커로 부르신다는 음성을 들었다. 사람과 사람, 교회와 교회, 세대와 세대, 민족과 민족을 잇는 부르심이었다. 그때부터 말라기 4장 5절과 6절은 단순한 성경 구절이 아니라 삶의 중심을 붙드는 말씀처럼 자리 잡았다.
그 말씀은 한 교회의 표어나 한 사역의 방향 정도로 느껴지지 않았다. 더 큰 그림이 있었다. 마지막 때 하나님의 큰 경륜 속에서 아버지와 자녀가 연결되고, 유업이 회복되고, 끊어진 세대가 다시 이어지고, 흩어진 것들이 다시 하나 되는 그림이었다.
그때 마음속에 한 가지 확신이 생겨났다.
전 세계에서 이 말씀을 가장 먼저 풀어낼 민족이 한국인일 수 있다.
세계는 한국의 다음 세대가 일어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 생각은 쉽게 설명되지 않았다. 그러나 마음 깊은 곳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마치 아직 도착하지 않은 편지를 미리 받은 사람처럼, 그 내용이 무엇인지 다 알 수는 없지만 그것이 언젠가 열릴 것이라는 감각이 있었다.
2014년, 콜투올 대회를 준비하기 위해 마크 앤더슨이 한국에 왔다. 콜투올은 전 세계 수백 개의 선교 사역들이 연결된 거대한 선교 네트워크였다. 온누리교회 선교센터에서 첫 프리미팅이 열렸다. 회의실 안에는 한국의 여러 사역자들이 모여 있었고, 공기 중에는 국제 선교 대회를 준비하는 긴장감과 기대감이 섞여 있었다.
마크 앤더슨은 먼저 콜투올의 역사를 이야기했다. 그가 걸어온 길, 하나님께서 열방 가운데 어떻게 선교 네트워크를 세워 오셨는지, 세계 곳곳에서 어떤 부르심들이 연결되고 있는지를 말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이야기의 중심이 말라기 4장 5절과 6절로 옮겨 갔다.
그는 2012년 9월에 이 말씀에 대한 분명한 계시를 받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전 세계에서 이 말씀을 가장 먼저 풀어내는 사람들이 한국인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의 다음 세대가 이 유업을 들고 일어나 전 세계를 깨우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 순간 오래전 마음속에 들어와 있던 말씀이 다시 불타올랐다.
어떤 말은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듣는다. 그날 그 말씀이 그랬다. 오래전부터 마음속에 감추어져 있던 불씨에 누군가 숨을 불어넣은 것 같았다.
그는 말을 마친 뒤 마이크를 나에게 넘겼고, 기도가 시작되었다. 기도가 끝난 뒤 자리로 돌아왔을 때, 눈물이 쏟아졌다. 그것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었다. 오래전부터 마음속에 주어졌던 부르심이 다시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하나님은 때로 사람의 삶 속에 같은 말씀을 여러 번 보내신다.
처음에는 씨앗으로, 그다음에는 싹으로, 또 어느 날에는 불길처럼 보내신다.
이제 세계가 한국으로 오고 있다
지금까지 한류는 대개 한국에서 세계로 나아가는 흐름이었다.
한국 드라마가 세계로 갔다. 한국 음악이 세계로 갔다. 한국 영화와 음식과 언어가 세계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한국은 작은 나라였지만, 그 작은 땅에서 나온 콘텐츠들은 점점 더 넓은 바다로 흘러갔다.
그러나 케이팝 데몬 헌터스를 기점으로 무언가 흐름이 바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전에는 한국이 세계로 나아갔다면, 이제는 세계가 한국으로 몰려오고 있다.
한류의 시작을 말할 때 많은 사람들이 겨울연가를 떠올린다. 배용준의 미소와 눈 내리는 길, 조용한 피아노 선율과 멜로드라마의 정서가 일본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사람들은 한국을 찾기 시작했다. “욘사마의 나라”를 보고 싶어 했다. 드라마 속 장소를 걷고 싶어 했고, 한국 음식을 먹고 싶어 했고, 한국 사람들의 감정과 사랑의 방식을 알고 싶어 했다.
비슷한 시기에 보아가 일본에서 활동했고, 대장금은 아시아권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동방신기, 슈퍼주니어, 빅뱅, 원더걸스가 등장하며 한류의 파도는 조금씩 커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외국에서는 이것을 Korean Wave라고 불렀다. 파도였다. 한국에서 출발해 다른 곳으로 밀려가는 파도.
그러다가 2012년,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세계를 뒤흔들었다. 사람들은 가사를 몰라도 말춤을 췄다. 언어가 장벽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모두가 보았다. 그 이듬해 BTS가 데뷔했고, 이후 블랙핑크가 세계 무대 위에서 폭발적인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영화 기생충, 드라마 오징어게임은 한국 콘텐츠가 더 이상 변방의 문화가 아니라 세계 문화의 중심으로 들어왔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런데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또 다른 차원의 분기점처럼 보인다.
이 작품은 한국을 단순히 배경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한국적인 것을 통째로 보여 준다. 남산과 낙산공원, 호랑이와 까치, 사우나, 한의원, 컵라면, 떡볶이, 오뎅, 김밥, 김밥 위에 뿌려진 깨, 자르지 않고 통째로 먹는 김밥, 새우깡 같은 한국 과자들, 티슈 위에 수저를 놓는 모습, 분식집의 초록색 플라스틱 접시까지 나온다.
그것들은 거창한 상징이 아니다. 너무 작고 사소해서 한국인들은 오히려 잘 의식하지 않는 것들이다. 하지만 바로 그 사소한 장면들이 세계인의 눈에는 낯설고 매력적인 풍경이 된다.
루미와 진우 사이의 절제된 감정선도 그렇다.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지만 깊이 흐르는 마음, 어색함 속의 배려, 농담과 민망함 사이에 놓인 따뜻한 온도. 그것은 한국인의 정서가 가진 미묘한 결을 보여 준다.
오래전, 1977년이나 1978년쯤의 어느 날을 떠올릴 수 있다. 고등학생이던 시절, AFKN 드라마를 보다가 미국 여자 배우가 머리를 감고 헤어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리는 장면을 본 적이 있었다. 그때 한국의 많은 집에서는 머리를 감은 뒤 수건을 쓰고 선풍기 앞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화면 속 미국인은 헤어드라이어를 들고 자연스럽게 머리를 말리고 있었다.
그 장면 하나가 이상하게 신기했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갑자기 특별한 세계처럼 느껴졌다.
지금은 반대의 일이 일어나고 있다.
전 세계 사람들이 케이팝 데몬 헌터스를 보며 한국을 그런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한국의 음식, 공간, 정서, 생활 방식, 언어, 유머, 관계의 감각을 신기하고 매력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것은 단순한 문화 현상이 아니다.
시대의 표적이다.
부흥을 넘어 한 나라의 변화로
부흥이라는 말은 뜨겁다.
트랜스포메이션이라는 말은 넓다.
우리는 이 두 단어를 때로는 비슷하게 사용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조금 다르다. 부흥은 주로 영적인 변화를 말한다.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고, 교회가 새로워지고, 기도와 예배가 회복되는 것이다. 죽어 있던 영혼들이 살아나고, 식어 있던 교회가 다시 불붙는 것이다.
반면 트랜스포메이션은 그보다 더 넓다. 영적 변화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예술, 일상의 모든 영역으로 흘러 들어가 한 나라 전체를 바꾸는 것이다. 부흥이 불이라면, 트랜스포메이션은 그 불이 들판 전체로 번져 생태계를 바꾸는 일이다.
20세기와 21세기에 들어 전 세계 곳곳에서 놀라운 부흥들이 있었다. 중국, 인도네시아, 브라질, 아르헨티나, 콜롬비아, 우간다, 나이지리아. 수많은 나라에서 사람들이 하나님께 돌아왔다. 교회가 성장했고, 기도 운동이 일어났고, 복음이 확산되었다.
그러나 그 부흥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총체적 변화로 이어져 한 나라 전체의 트랜스포메이션을 일으킨 사례는 많지 않다. 그중 매우 독특한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가난했던 1960년대와 1970년대가 있었다. 격변의 1980년대와 1990년대가 있었다. 그리고 2000년대 이후 눈부신 변화가 있었다. 흙먼지 날리던 거리와 연탄 냄새, 좁은 골목과 오래된 시장을 기억하는 세대에게 오늘의 한국은 때로 비현실적인 풍경처럼 보인다.
초고층 빌딩, 세계적인 기업, K-팝, K-드라마, K-푸드, 반도체, 자동차, 의료, 교육, 문화 콘텐츠. 이 모든 변화는 너무 빠르게 일어나서 때로는 꿈을 꾸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어떻게 이 나라가 이렇게 되었는가.
작고 작은 남쪽 땅. 전쟁의 폐허에서 시작한 나라. 실질적으로 전 세계 유일한 분단국가라 할 수 있는 나라. 그 땅에 하나님은 왜 이런 은총을 부어 주셨는가.
이것을 단순히 경제 정책이나 교육열이나 국민성만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물론 그런 요소들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섭리와 한민족의 영적 부르심이 있다.
셈의 장막과 오래된 노래
창세기 9장에는 노아의 세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이 등장한다.
그중 셈은 특별한 축복을 받는다. 노아는 말한다.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그리고 이어지는 축복 속에서 하나님께서 셈의 장막에 거하실 것을 말한다. 우리 말 성경은 야벳이 셈의 장막에 거하는 것처럼 묘사하고 있지만 히브리어 원문으로 보면 셈의 장막에 거하는 주체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셈은 두 차원의 축복을 받은 셈이다.
첫째, 셈의 하나님 여호와가 찬송을 받으신다.
둘째, 하나님께서 셈의 장막에 거하신다.
창세기 10장 21절은 셈을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라고 말한다. 에벨에게서 벨렉과 욕단이 나온다. 벨렉의 후손은 유대 민족으로 이어지고, 욕단의 후손은 동쪽 산악 지역으로 이주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욕단의 첫째 아들은 알모닷이다. 그 이름은 “하나님은 나의 친구”라는 의미로 해석되기도 한다. 이 지점에서 오래된 한민족의 노래, “아리랑”이 떠오른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이 노래는 너무 오래되어 정확한 시작을 알기 어렵다. 누군가의 입에서 누군가의 입으로, 산길에서 들길로, 슬픔에서 기쁨으로, 이별에서 기다림으로 흘러왔다. 어떤 사람은 그 노래를 민요라고 부른다. 어떤 사람은 한민족의 영혼이 담긴 노래라고 말한다.
그 안에 “알이랑”, 곧 하나님과 함께 고개를 넘어간다는 오래된 기억과 영적 흔적이 담겨 있다고 보는 해석도 있다.
물론 이런 해석은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모든 사람이 쉽게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한민족의 깊은 뿌리 속에 하나님을 향한 오래된 흔적이 있다는 믿음은 결코 가볍지 않다.
수천 년의 역사 속에서 우리는 족장들의 신앙을 잃어버렸을 수 있다. 우상숭배로 어둠에 빠졌을 수 있다. 900번이 넘는 외침을 받았다고 말할 만큼 많은 고난을 겪었다. 침략과 가난, 분단과 전쟁, 눈물과 이별의 역사를 지나왔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이 민족을 버리지 않으셨다. 역사의 마지막 때까지 보존해 주셨다.
왜인가.
마지막 때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벨렉의 후손인 유대인은 예수님의 초림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그렇다면 욕단의 후손으로 이해되는 한민족은 예수님의 재림과 관련된 마지막 때의 부르심을 감당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리고 재림의 가장 중요한 열쇠는 연합이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7장 21절에서 기도하셨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마지막 때 세상이 예수님을 믿게 되는 중요한 표지는 교회의 하나 됨이다.
이것이 에하드의 부르심이다.
분열이 깊은 민족에게 주어진 연합의 부르심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역설이 나타난다.
한국인이 연합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하면 어떤 사람은 고개를 갸웃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웃을지도 모른다.
한국인이 연합이라니.
한국인이 얼마나 질투와 경쟁심이 강한 민족인데.
얼마나 잘 나뉘고, 얼마나 쉽게 편을 가르는데.
그 말에도 일리가 있다.
한국에는 외국인이 들으면 이해하기 어려운 속담이 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
남도 아니고 원수도 아니다. 사촌이다. 그런데 사촌이 잘되면 왜 배가 아픈가. 외국인은 이 정서를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한국인은 어느 정도 안다. 알고 싶지 않아도 안다. 비교와 시기, 경쟁과 자존심이 우리 안에 얼마나 깊이 스며 있는지를 안다.
20세기 후반 한국 교회는 기도와 전도, 교회 성장에서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동시에 분열이 심한 교회라는 이미지도 갖게 되었다. 한 미국 목사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전 세계에서 연합하지 않고 분열하면서도 성장하는 교회는 한국 교회밖에 없다.”
뼈아픈 말이다.
그렇다면 질문해야 한다.
이 갈등과 분열, 시기와 경쟁의 심리는 원래부터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에게 주신 것인가. 이것이 우리의 본래 데스티니인가.
그럴 리 없다.
하나님은 에하드의 하나님이시다. 신명기 6장 4절은 말한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시니.”
여기서 “하나”는 히브리어로 에하드다. 스가랴 14장 9절도 마지막 날에 여호와께서 온 땅의 왕이 되시고, 그 이름이 하나일 것이라고 말씀한다. 역사의 마지막에 선포되고 확증되는 하나님의 이름이 에하드와 연결되어 있다.
그렇다면 에하드의 하나님께서 어느 민족에게 갈등과 분열과 시기의 영을 부으실 리가 없다.
그렇다면 이것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오히려 한민족의 데스티니가 에하드이기 때문에, 사탄은 오래전부터 그것을 왜곡해 온 것이다. 부르심이 클수록 공격도 깊다. 원래의 목적이 연합이기 때문에, 원수는 분열을 심어 놓았다. 원래 하나 됨의 부르심이 있기 때문에, 원수는 시기와 경쟁과 프레임의 문화를 만들어 놓았다.
하나님께서 본래 우리 민족에게 주신 데스티니는 에하드다.
연합이다.
하나 됨이다.
함께 서는 것이다.
그러나 사탄은 그것을 왜곡하여 분열과 경쟁과 비교의 구조로 바꾸어 놓았다.
디아스포라, 흩어진 자들의 표적
이제 다시 케이팝 데몬 헌터스를 보아야 한다.
이 작품이 시대의 표적처럼 보이는 이유가 있다. 그 안에는 몇 가지 예언적 싸인처럼 보이는 요소들이 있다.
첫째, 감독 매기 강은 한국계 캐나다인이다. 이 작품을 만든 사람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한국계 디아스포라와 연결되어 있다.
이것은 우연처럼 보이지만,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지점이다.
180개가 넘는 나라에 흩어져 사는 코리안 디아스포라는 말라기 4장 5절과 6절의 말씀을 풀어낼 때 매우 중요한 통로가 될 수 있다. 한국 안에 있는 한국인만이 아니라, 세계 곳곳에 흩어진 한국인들이 마지막 때의 연합과 회복의 메시지를 들고 일어날 수 있다.
디아스포라는 흩어짐의 아픔을 가지고 있다. 고향을 떠난 사람들, 언어와 문화 사이에 서 있는 사람들, 두 세계에 속했지만 어느 한쪽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하는 사람들. 그러나 바로 그들이 열방과 연결되는 통로가 된다.
흩어진 자들이 다시 하나 됨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
이것은 말라기 4장의 그림과 닮아 있다. 끊어진 마음이 이어지고, 세대가 연결되고, 흩어진 유업이 다시 흐르는 그림이다.
하나님은 흩어진 자들을 통해 다시 하나 되게 하실 수 있다.
유업이 다음 세대에게 흘러갈 때
둘째, 이 작품의 음악과 관련된 인물 가운데 이재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는 미국에서 태어나 한국으로 와서 오랜 시간 SM 연습생으로 지냈고, 다시 미국으로 가서 음악을 공부했다. 그리고 그는 한국 영화계의 원로인 신영균 장로의 외손녀로 알려져 있다.
신영균 장로는 서울대 출신의 치과의사였고, 한국 영화계를 대표하는 배우였다. 신성일과 더불어 한국 영화사의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는 2010년 명보극장과 제주 영화박물관을 한국 영화예술 진흥을 위해 기부했다. 당시 시가로 매우 큰 규모의 기부였다.
그는 자신이 받은 유업을 다음 세대를 위해 흘려보낸 사람이다.
이것을 영적으로 보면 의미가 있다.
성경에서 아버지는 단순히 생물학적 아버지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조상, 유업, 영적 계승을 의미한다. 창세기에서 야곱은 말년에 요셉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자기 아들로 삼고 축복했다. 유업이 다음 세대로 흘러간 것이다.
이재가 할아버지 신영균의 유업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상징적 의미를 가진다. 마지막 때 다음 세대가 자신의 데스티니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아버지 세대의 유업이 필요하다.
아버지 세대의 축복.
헌신.
눈물.
씨앗.
그리고 때로는 자신이 다 거두지 못한 꿈.
그것이 자녀 세대 안에서 열매 맺는다.
이것이 말라기 4장 5절과 6절의 핵심이다.
아버지의 마음이 자녀에게로, 자녀의 마음이 아버지에게로 돌이키는 것이다.
프레임이 깨지는 자리
셋째, 이 영화는 프레임을 깨뜨리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루미는 헌터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귀신의 문양이 있다. 진우는 사자보이즈의 리더로 데몬들과 함께 있다. 그러나 그는 본질적으로 인간이다. 상처받은 인간이고, 죄책감에 묶인 인간이며, 여전히 구원을 갈망하는 인간이다.
프레임으로 보면 모든 것은 간단하다.
루미는 헌터다.
진우는 데몬 편이다.
루미는 선이고, 진우는 악이다.
루미는 보호자이고, 진우는 적이다.
그러면 이야기는 단순해진다. 선은 악을 제거하면 된다. 헌터는 데몬을 죽이면 된다. 질문은 필요 없다.
그러나 영화는 그 단순한 프레임을 깨뜨린다.
루미 안에는 숨겨진 문양이 있다. 진우 안에는 아직 죽지 않은 인간성이 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상처를 발견하고, 서로를 받아들이며, 프레임 너머의 진짜 얼굴을 보게 된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메시지를 던진다.
우리는 사람을 너무 쉽게 규정한다. 보수냐 진보냐, 어느 교단이냐, 어느 지역 출신이냐, 어느 학교를 나왔느냐, 어느 세대냐, 어떤 문화적 취향을 가졌느냐에 따라 사람을 판단한다. 한두 가지 특징으로 그 사람 전체를 설명해 버린다.
그러나 한 사람 안에는 우주가 담겨 있다.
한 사람은 하나의 라벨로 설명되지 않는다. 누군가는 문화사역자로 볼 수 있고, 누군가는 방송 진행자로 볼 수 있고, 누군가는 성령사역자로 볼 수 있고, 누군가는 부흥운동가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중 하나만으로 한 사람 전체를 설명할 수 없다.
사람은 프레임보다 크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 안에 넣어 두신 부르심과 가치와 가능성은 우리가 붙이는 라벨보다 훨씬 크다.
그러므로 우리는 프레임을 벗어나야 한다. 그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일치하는 것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함께 연합해야 한다.
“우리”라는 말의 따뜻함과 위험
한국어에는 이상한 아름다움이 있다.
우리는 내 것인데도 “우리”라고 말한다.
내가 다니는 회사인데 “우리 회사”라고 말한다. 상대방은 그 회사에 다니지 않는데도 그렇게 말한다. 내가 키우는 강아지인데 “우리 강아지”라고 말한다. 내가 사는 동네인데 “우리 동네”라고 말한다.
심지어 내 아버지와 어머니도 “우리 아빠”, “우리 엄마”라고 한다. 모르는 남과 대화하면서도 “우리 남편”, “우리 아내”라고 말한다. 문자 그대로라면 이상하다. 그러나 한국어 안에서는 너무 자연스럽다.
왜 우리는 이렇게 “우리”라는 말을 자주 사용할까.
한국인은 개인보다 관계를 먼저 느끼는 경향이 있다. 내가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 저 사람은 어디에 속해 있는지, 나와 어떤 공통분모가 있는지를 중요하게 여긴다.
그래서 처음 만나면 묻는다.
고향이 어디예요.
어느 학교 나오셨어요.
어디 사세요.
어느 회사 다니세요.
혹시 누구 아세요.
혈액형이 뭐예요.
MBTI가 뭐예요.
상대가 어느 그룹에 속한 사람인지 알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나와 공통분모를 찾으면 갑자기 마음의 거리가 가까워진다.
“어, 나도 거기 나왔는데.”
“어, 나도 그 사람 아는데.”
“어, 우리 같은 고향이네.”
그 순간 낯선 사람은 조금 덜 낯선 사람이 된다.
이것은 공동체성의 장점이다. 한국인은 정이 있다. 함께 먹고, 함께 울고, 함께 버틴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가족처럼 달려드는 힘이 있다.
그러나 이 공동체성에는 그림자도 있다.
우리 안에 들어오면 따뜻하지만, 우리 밖에 있으면 차갑다. 우리 편에게는 관대하지만, 다른 그룹에 속한 사람에게는 쉽게 경계심을 가진다. “우리”라는 말이 아름답지만, 그 “우리”가 너무 작아지면 곧바로 “그들”을 만들어 낸다.
이것이 프레임의 시작이다.
작은 우리가 많아질수록 큰 우리는 사라진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에하드는 작게 쪼개진 우리들 사이에서 길을 잃는다.
왜곡된 공동체성을 넘어 에하드로
하나님께서는 우리 민족에게 마지막 때를 위한 에하드의 데스티니를 주셨다.
그러나 사탄은 그 부르심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고, 오래전부터 우리 안에 왜곡된 공동체성을 심어 놓았다.
그 결과 우리는 집단주의적 관계성으로 잘게 나뉘었다. 호남과 영남, 보수와 진보, 남성과 여성, 기성세대와 다음 세대, 장로교와 감리교, 어느 교단, 어느 학교, 어느 지역, 어느 사역 그룹으로 끝없이 나뉘어 왔다.
겉으로는 공동체성을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더 큰 하나 됨을 가로막는 작은 울타리들이 되어 버렸다.
“우리”라는 말은 아름답다. 그러나 그 “우리”가 너무 작아지면 배척의 언어가 된다.
이제 우리는 우리 민족에게 주신 하나님의 데스티니로 돌아가야 한다. 왜곡된 공동체성의 틀을 벗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 됨으로 돌아가야 한다. 교단과 교파, 신학적 해석의 차이, 문화적 관점의 차이를 넘어 진리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손을 잡아야 한다.
물론 이것은 진리를 포기하자는 말이 아니다. 아무 것이나 다 받아들이자는 말도 아니다. 그러나 본질이 아닌 것 때문에 서로를 정죄하고 배척하는 태도는 내려놓아야 한다.
서로의 다름이 불신과 비방의 이유가 아니라, 오히려 에하드의 이유가 되어야 한다.
연합은 모든 사람을 똑같이 만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창조하지 않으셨다. 눈의 결정체가 모두 다르듯이, 사람마다 기질과 관점과 성향이 다르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에하드가 필요하다.
다르기 때문에 함께해야 한다.
서로 다르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를 더 풍성하게 드러낼 수 있다.
하나님 나라는 우주보다 크고 다양하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를 섬기는 사람들도 서로의 다양성을 통해 더 큰 하나 됨을 이루어야 한다.
케데헌이 던지는 마지막 질문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단순한 애니메이션이 아니다.
이 작품은 우리 시대를 향한 하나의 표적처럼 보인다. 한국 문화가 세계로 퍼져 나가는 것을 넘어, 이제 세계가 한국의 정서와 이야기와 감각 안으로 들어오고 있다.
그리고 그 작품의 중심에는 영혼을 둘러싼 전쟁, 상처의 직면, 프레임의 붕괴, 서로 다른 존재들의 연합이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루미와 진우는 서로 다른 프레임 안에 갇혀 있었다. 루미는 헌터였고, 진우는 데몬의 세계에 속한 존재처럼 보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서로를 알아가면서 프레임 너머에 있는 진짜 사람을 보게 된다.
상처를 본다.
갈망을 본다.
아직 꺼지지 않은 빛을 본다.
이것이 오늘 한국 교회와 한민족에게 필요한 메시지다.
우리는 서로를 너무 쉽게 규정해 왔다. 너무 쉽게 나누어 왔다. 너무 쉽게 정죄해 왔다. 그러나 하나님은 마지막 때에 에하드의 부르심으로 우리를 다시 부르고 계신다.
프레임을 깨뜨리라.
상처를 직면하라.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라.
자녀의 마음을 아버지에게로 돌이키라.
이것이 말라기 4장 5절과 6절의 메시지다.
에하드를 위해 기도하라
이제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에하드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우리 안에 만들어진 프레임을 깨뜨려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사람을 너무 쉽게 판단하고 규정하는 마음을 내려놓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내가 속한 작은 “우리”를 넘어, 하나님 나라의 더 큰 “우리”를 보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은 마지막 때에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시고, 자녀들의 마음을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신다.
이것은 세대의 회복이다.
유업의 회복이다.
부르심의 회복이다.
그리고 연합의 회복이다.
한국 교회는 이제 분열의 이미지에서 벗어나야 한다. 한민족은 왜곡된 공동체성을 넘어 에하드의 부르심으로 나아가야 한다.
디아스포라와 본토가 연결되어야 한다.
아버지 세대와 자녀 세대가 연결되어야 한다.
교단과 교파가 진리 안에서 연결되어야 한다.
남과 북이 하나님의 때에 연결되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데스티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에게 주신 마지막 때의 부르심이다.
그리고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그 부르심을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시대의 표적과 같은 작품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시대의 표적 앞에서 깨어 있어야 한다.
한국이 주목받는 것을 단순한 자랑거리로만 삼아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왜 이 작은 나라를 세계 앞에 드러내고 계시는지를 물어야 한다. 왜 세계가 한국을 바라보게 하시는지를 분별해야 한다.
그리고 그 부르심 앞에 겸손히 서야 한다.
에하드를 위해 기도하자.
내 안의 프레임을 깨뜨리자.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자.
아버지의 마음이 자녀에게로, 자녀의 마음이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는 마지막 때의 회복을 위해 기도하자.
사람은 누구나 상처를 가지고 살아간다. 겉으로는 괜찮아 보이지만, 마음 깊은 곳에는 말하지 못한 아픔이 있다. 어떤 상처는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남아 있고, 어떤 상처는 실패의 기억으로 남아 있으며, 어떤 상처는 죄책감과 수치심의 형태로 남아 있다.
사람들은 그 상처를 잘 드러내지 않는다. 감춘다. 숨긴다. 잊은 척한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환경이 바뀌면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성공하면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면 더 이상 아프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상처는 숨긴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외면한다고 치유되지 않는다. 오히려 숨기면 숨길수록 더 깊이 우리 안에 자리 잡는다. 그리고 어느 순간 우리의 목소리를 잠기게 하고, 우리의 자유를 빼앗고, 우리의 잠재력을 억누른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보여 주는 중요한 메시지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상처는 직면할 때 치유된다. 마주하지 않으면 바로잡을 수 없다.
헌트릭스와 혼문의 이야기
이 작품의 기본 스토리는 고대로부터 이어지는 영적 전쟁의 이야기다. 귀마는 데몬들을 통해 사람들의 영혼을 사로잡아 자신에게로 끌고 가려고 한다. 그러나 시대마다 노래를 통해 이들을 물리치고 사람들을 자유케 하는 헌터들이 등장한다. 이 헌터들의 사명은 계승되어 왔다.
현대에 그 사명을 받은 이들이 루미, 미라, 조이다. 이들은 세계적인 걸그룹 헌트릭스의 멤버들이다. 겉으로는 화려한 케이팝 스타들이지만, 실제로는 노래로 데몬들을 물리치고 사람들의 영혼을 자유케 하는 헌터들이다.
이들의 활동을 통해 혼문이 점점 완성되어 간다. 혼문이 완성되어 닫히면 더 이상 귀마와 데몬들은 인간 세상에 들어올 수 없다. 그러므로 헌트릭스의 사명은 단순히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노래는 영적 전쟁의 무기이며, 그들의 사명은 사람들의 영혼을 지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세 명 중 리더인 루미에게는 감추어진 비밀이 있다.
루미가 숨기고 있는 문양
영화의 앞부분에는 어린 시절 루미가 등장한다. 루미는 어머니의 무덤 앞에 앉아 노래를 부른다. 그 곁에서 함께 노래를 부르며 루미의 머리를 빗겨 주는 사람이 셀린이다. 루미의 어머니 무덤의 비석을 보면, 어머니의 이름은 류미영이다. 그녀 역시 헌터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때 어린 루미가 셀린에게 묻는다.
“셀린, 헌터는 데몬이면 다 죽여요?”
셀린은 대답한다.
“그래.”
그러자 루미가 다시 묻는다.
“문양이 있으면 다요?”
그리고 자신의 옷소매를 걷는다. 그 안에는 데몬의 문양이 있다. 루미는 얼른 소매를 내려 그것을 숨긴다.
루미는 헌터의 딸이다. 그런데 동시에 그녀에게는 데몬의 문양이 있다. 이것은 루미의 정체성 안에 깊은 갈등이 있음을 보여 준다. 그녀는 헌터로 부름받았지만, 자기 안에는 데몬과 연결된 흔적이 있다. 사람들을 자유케 하는 사명을 받았지만, 자기 안에는 숨겨야 할 어둠이 있다.
귀마는 루미를 향해 말한다. 헌터들 가운데 나와 똑같은 문양을 가진 아이가 있다. 그런데 그를 물리칠 방법이 없다. 이 설정을 보면 루미는 귀마와 헌터였던 류미영 사이에서 태어난 딸로 추정된다. 영화는 아직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다. 아마도 이 작품은 2편과 3편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루미는 자신 안에 있는 문양을 숨기고 살아간다.
셀린은 루미에게 말한다. “너는 헌터야. 이 문양을 공개하면 안 돼. 미라와 조이에게도 비밀로 해야 해. 지금 인기가 절정에 이르고 혼문이 완성되면 이 문양은 사라질 거야. 그러니 그때까지는 숨겨야 해.”
이 말은 그럴듯해 보인다. 조금만 더 참으면 된다. 조금만 더 숨기면 된다. 사명을 완수하면 상처는 없어질 것이다. 성공하면 문제는 해결될 것이다. 혼문이 완성되면 문양은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반대의 일이 일어난다. 루미가 숨기면 숨길수록 그녀의 목소리는 잠기기 시작한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노래해야 하는 사람이 노래하지 못하게 된다. 그로 인해 멤버들 사이에 갈등이 생기고, 혼문은 오히려 열리며 데몬들이 더 많이 쏟아져 나온다.
숨긴 상처는 사라지지 않는다. 숨긴 어둠은 약해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의 목소리를 막고, 관계를 무너뜨리고, 사명을 방해한다.
진우의 상처와 죄책감
한편 악령들의 세계에서는 한 존재가 비파를 연주하며 등장한다. 그는 진우다. 귀마는 헌트릭스를 무너뜨리기 위해 보이그룹을 만들고, 그들이 혼문을 완성하지 못하도록 사자보이즈를 세운다. 그 중심에 진우가 있다.
진우에게도 깊은 상처가 있다. 400년 전, 그는 극심한 기근과 흉년 속에서 살고 있었다. 어머니와 어린 여동생을 먹여 살려야 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는 비파를 들고 거리로 나가 노래했지만 아무도 그의 노래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아무도 그를 주목하지 않았다. 아무도 그의 고통을 알아주지 않았다.
그때 한 목소리가 들린다.
“너는 지금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너는 네 가족들을 살릴 수 없어. 내가 도와줄게.”
그것은 귀마의 유혹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 날부터 사람들은 진우의 노래에 열광하기 시작한다. 그는 어머니와 여동생을 데리고 궁으로 들어가 호의호식하며 살게 된다. 겉으로는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진우의 몸에는 악령의 문양이 올라온다. 그는 점점 악령들의 세계로 끌려가게 되고, 결국 데몬들의 세계에서 살게 된다. 그가 떠난 뒤 어머니와 여동생은 궁에서 쫓겨나 더 비참한 삶으로 전락한다.
귀마는 이 사건을 이용해 진우를 조종한다. “너는 가족들을 저버렸다.” 이 죄책감은 진우를 묶는 사슬이 된다. 그는 자신이 사기꾼인지 괴물인지 알 수 없어 괴로워한다. 자신 안에 있는 어둠을 미워하면서도, 그 어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루미는 자신의 문양을 숨기고 있고, 진우는 자신의 죄책감에 묶여 있다. 두 사람 모두 상처를 가지고 있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진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한다.
Free: 마주하지 않으면 바로잡을 수 없다
헌트릭스와 사자보이즈가 대립하는 가운데, 진우는 루미에게 데몬의 문양이 있음을 발견하고 연락한다. 두 사람은 만나기 시작하고, 티격태격하면서도 조금씩 서로의 배경을 이해하게 된다.
그러던 중 헌트릭스와 사자보이즈의 사인회 장면이 나온다. 루미와 진우가 같은 테이블에서 사인을 하고 있을 때, 한 여자아이가 진우에게 자신이 그린 그림을 건넨다. 그 그림 속 진우에게는 천사의 날개가 달려 있다. 아이는 말한다.
“당신의 영혼은 아름다워요.”
진우는 자신을 괴물이라고 생각한다. 귀마에게 속았고, 가족을 저버렸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한 아이는 그의 영혼이 아름답다고 말한다. 이것은 진우 안에 아직 완전히 죽지 않은 선함과 갈망이 있음을 보여 준다.
이후 북촌 한옥마을 기와지붕을 배경으로 루미와 진우가 함께 부르는 노래가 나온다. 그 노래가 “Free”다. 이 노래는 이 영화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노래 가운데 하나다.
루미는 고백한다. 숨기려 했지만, 뭔가 고장 난 것 같다고. 노래하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고. 그 말이 계속 목에 걸려 나오지 않았고, 웃으려 했지만 숨이 막혔다고. 그러나 진우 곁에서야 비로소 숨을 쉴 수 있다고 말한다.
진우도 고백한다. 자신 안에 누구도 뚫을 수 없을 것 같았던 어둠이 있었지만, 루미가 그 어둠을 뚫고 다가왔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이 사기꾼인지 괴물인지 혼란스럽다고 말한다. 그러나 동시에 처음으로 누군가를 믿어보고 싶다고 말한다.
그리고 두 사람은 함께 노래한다.
“대면하지 않으면 바로잡을 수 없어.
마주하지 않는다면 바로잡을 수 없어.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면
우리는 자유가 될 거야.”
이 가사는 이 작품의 핵심 메시지다. 대면하지 않으면 바로잡을 수 없다. 마주하지 않으면 자유할 수 없다.
상처는 숨긴다고 치유되지 않는다
우리 모두에게는 상처가 있다. 문제는 상처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다. 문제는 그 상처를 어떻게 대하느냐이다.
사람들은 상처를 감춘다. 왜냐하면 드러내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나를 이상하게 볼까 봐 두렵다. 내가 무너질까 봐 두렵다. 하나님께서 나를 책망하실까 봐 두렵다. 그래서 괜찮은 척한다. 웃는다. 사역한다. 노래한다. 열심히 살아간다. 그러나 속에서는 숨이 막힌다.
루미가 그랬다. 그녀는 헌터로서 노래해야 했지만, 숨긴 문양 때문에 목소리가 잠겼다. 진우도 그랬다. 그는 사람들을 사로잡는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졌지만, 내면 깊은 곳에서는 죄책감과 수치심에 묶여 있었다.
사람의 상처는 숨긴다고 없어지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면 잊혀질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환경이 바뀌면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어떤 사람은 진우처럼 “나는 어쩔 수 없어” 하고 포기하며 산다. 어떤 사람은 루미처럼 “혼문이 완성되면 내 문양은 없어질 거야” 하며 미래의 어떤 사건이 자신을 자동으로 치유해 줄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러나 상처는 그렇게 치유되지 않는다. 직면해야 한다. 마주해야 한다. 빛 가운데로 가지고 나와야 한다.
부활하신 주님과 베드로의 상처
요한복음 21장은 상처를 직면하게 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 준다.
예수님은 이미 부활하셨다. 부활하신 날 저녁에 제자들을 찾아오셨고, 그들 가운데 베드로도 있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평강을 선포하시고 떠나셨다.
그런데 베드로에게는 아직 풀리지 않은 짐이 있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지만, 베드로의 마음은 여전히 무거웠다. 왜냐하면 그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기 때문이다.
유월절 만찬 자리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오늘 밤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그때 베드로는 자신 있게 말했다.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습니다. 죽기까지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다. 그냥 모른다고 한 정도가 아니었다. 저주하며 맹세하면서 예수님을 부인했다. 그리고 닭이 울었을 때, 그는 자신의 실패를 깨달았다.
예수님은 부활하셨다. 그러나 베드로의 실패의 기억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는 용서받았을지 모르지만, 아직 자기 안의 상처와 수치심을 직면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다시 갈릴리 호수로 나가 고기를 잡는다. 마치 예전의 자리로 돌아가려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때 예수님이 찾아오신다.
숯불 앞에서 다시 만난 주님
요한복음 21장 9절은 이렇게 말씀한다.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여기서 매우 중요한 단어가 나온다. “숯불”이다. 헬라어로는 안드라키아라는 단어다. 이 단어는 요한복음 전체에서, 더 나아가 신약성경 전체에서 딱 한 번 더 등장한다. 바로 요한복음 18장이다.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의 집 뜰에서 심문을 받으실 때였다. 그때 베드로는 그 뜰 안에 들어갔다. 문 지키는 여종이 묻는다.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베드로는 대답한다. “나는 아니라.”
요한복음 18장 18절은 그때 상황을 이렇게 묘사한다.
“그 때가 추운 고로 종과 아랫사람들이 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
여기서 “불”이 바로 숯불, 안드라키아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했던 그 자리에는 숯불이 있었다. 그리고 요한복음 21장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베드로를 다시 숯불 앞으로 부르신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실패를 모른 척 넘어가지 않으신다. “괜찮다. 잊어버려라.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다”라고만 하지 않으신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그의 실패의 기억과 마주하게 하신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했던 숯불. 그 수치와 실패와 두려움의 기억이 담긴 숯불. 예수님은 바로 그 숯불 앞에서 베드로를 다시 만나신다.
왜인가? 대면하지 않으면 바로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마주하지 않으면 치유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상처를 외면하지 않으신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정죄하기 위해 숯불 앞으로 부르신 것이 아니다. 베드로를 부끄럽게 만들고 망신 주기 위해 부르신 것도 아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회복시키기 위해 그 자리에 부르셨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부인했던 그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하신다. 그러나 그 기억을 떠올리게 하시는 이유는 베드로를 무너뜨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기억 속에 묶여 있는 베드로를 풀어 주시기 위해서다.
사람들은 자신의 상처를 직면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직면하면 너무 아플 것 같기 때문이다. 무너질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직면하는 상처는 우리를 죽이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를 살린다.
예수님 없는 직면은 절망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하는 직면은 치유가 된다. 주님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방식으로 상처를 들추지 않으신다. 사랑으로 다가오시고, 회복시키기 위해 만지신다.
상처를 핥으시는 하나님
스위스 의사이자 기독교 상담가였던 폴 투르니에는 사람의 상처를 다루는 데 깊은 통찰을 남긴 인물이다. 그의 책 가운데 한국어로는 『귀를 핥으시는 하나님』이라고 번역된 책이 있다. 원제의 의미는 “우리의 상처를 핥으시는 하나님”에 가깝다.
이 표현은 매우 인상적이다. 동물의 몸에 상처가 생기면 어미나 가까운 동물이 그 상처를 핥아 주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애정의 표현이면서 동시에 치유의 행위다. 하나님께서도 그런 분이시다. 하나님은 차갑게 진단만 하시는 분이 아니다. 멀리서 “네가 잘못했다”고 꾸짖기만 하시는 분도 아니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가까이 오셔서 우리의 상처를 다정하게 어루만지시는 분이다.
그런데 왜 한국어 제목은 “귀를 핥으시는 하나님”이라고 번역되었을까? 이것도 의미가 있다. 자신의 진짜 모습을 직면하기 힘들어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내 안의 깊은 상처를 말씀하실까 봐 두렵다. 내가 외면하고 싶은 것을 드러내실까 봐 두렵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우리에게 강압적으로 밀고 들어오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부드럽게 마음을 두드리신다. 마치 귀를 핥으시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이 열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준비시키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정죄하기 위해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치유하기 위해 말씀하신다.
직면의 고통과 죄의 고통
사람들은 상처를 직면하는 것이 괴로워서 외면한다. 그러나 직면의 고통은 일시적인 고통이다. 순간적인 고통이다. 반면 외면의 고통은 오래 간다. 숨겨진 상처는 계속해서 삶을 눌러 버린다. 관계를 왜곡하고, 사명을 막고, 목소리를 잠기게 한다.
이것은 죄의 원리와 정반대다. 죄는 순간적인 쾌락을 준다. 그러나 그 뒤에는 큰 고통이 따라온다. 죄책감, 수치심, 좌절, 중독, 더 깊은 수렁이 따라온다. 죄는 처음에는 달콤하지만 나중에는 쓰다. 처음에는 자유처럼 보이지만 나중에는 감옥이 된다.
반대로 상처를 직면하는 일은 처음에는 아프다. 그러나 그 아픔은 우리를 자유로 이끄는 아픔이다. 잠깐의 고통을 지나면 빛이 들어온다. 숨겨진 것이 드러날 때, 그것은 더 이상 어둠의 힘을 갖지 못한다.
그래서 에베소서 5장은 이렇게 말씀한다.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그들이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들이라.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은 빛으로 말미암아 드러나나니 드러나는 것마다 빛이니라.”
드러나는 것마다 빛이 된다. 이것이 복음의 원리다. 어둠 속에 감추어 두면 그것은 우리를 지배한다. 그러나 빛 가운데 드러나면 그것은 치유의 자리로 들어간다.
하나님 앞에 드러난 상처는 더 이상 우리를 파괴하는 어둠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빛을 받는 자리가 된다.
말씀 앞에서 자신을 직면하라
그러므로 우리는 상처를 핥으시는 하나님께 마음을 열고 나아가야 한다. 날마다 마음을 다해 말씀 앞에 서야 한다.
성경은 우리가 읽는 책이다. 그러나 동시에 성경은 우리를 읽는 책이다. 처음에는 내가 성경을 읽는다고 생각한다. 내가 말씀을 묵상하고, 내가 본문을 이해하고, 내가 하나님의 뜻을 찾는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마음을 쏟아 말씀 앞에 머물다 보면 어느 순간 알게 된다. 성경이 나를 읽고 있다는 것을.
내가 말씀을 보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나를 보고 있다. 내가 본문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본문이 내 마음을 해석하고 있다. 내가 숨기고 있던 것, 내가 말하지 못했던 것, 내가 외면하고 있던 것들을 말씀이 비추기 시작한다.
히브리서 4장은 이렇게 말씀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다. 말씀은 우리의 겉모습만 보지 않는다. 혼과 영,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듯 우리의 깊은 곳을 비추신다.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신다. 하나님 앞에는 숨겨진 것이 없다. 모든 것이 벌거벗은 것처럼 드러난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를 부끄럽게 만들기 위한 폭로가 아니다. 이것은 정죄가 아니다. 이것은 단순한 징계도 아니다. 이것은 우리를 치유하고 자유케 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드러내시지만, 망신 주기 위해 드러내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직면하게 하시지만, 무너뜨리기 위해 직면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진짜 모습을 보게 하심으로 우리를 회복시키신다.
베드로처럼 다시 숯불 앞에 서라
베드로는 숯불 앞에서 실패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를 다시 숯불 앞으로 부르셨다. 실패의 기억이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예수님은 베드로를 다시 만나셨다.
그 자리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물으신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은 베드로의 실패보다 사랑을 물으셨다. 그의 부인보다 관계를 물으셨다. 그의 수치보다 사명을 다시 세우셨다.
베드로는 그 자리에서 회복된다. 예수님은 그에게 다시 말씀하신다. “내 양을 먹이라.” 실패한 베드로를 버리지 않으시고, 다시 사명의 자리로 부르신다.
이것이 예수님의 치유다. 예수님은 우리의 상처와 실패를 모른 척 덮어 버리시는 분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우리를 끝장내시는 분도 아니다. 주님은 우리가 직면하게 하시고, 회복시키시고, 다시 사명으로 보내신다.
그러므로 우리도 숯불 앞에 서야 한다. 내가 실패했던 그 자리, 내가 부인했던 그 자리, 내가 무너졌던 그 자리, 내가 숨기고 싶었던 그 기억 앞에 주님과 함께 서야 한다.
혼자 서면 두렵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 서면 치유가 시작된다.
상처를 직면하는 용기를 가지라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Free”는 우리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던진다.
“대면하지 않으면 바로잡을 수 없어.
마주하지 않는다면 바로잡을 수 없어.”
이 말은 단지 영화 속 노래 가사가 아니다. 영적인 원리다. 상처는 외면한다고 치유되지 않는다. 수치심은 숨긴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죄책감은 시간이 지난다고 저절로 풀리지 않는다. 어둠은 빛 가운데 드러날 때 힘을 잃는다.
루미는 자신의 문양을 숨겼고, 그럴수록 목소리를 잃어 갔다. 진우는 자신의 죄책감에 묶였고, 그럴수록 귀마에게 조종당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한 기억을 안고 있었고, 주님은 그를 다시 숯불 앞으로 부르셨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부르신다. 숨기지 말라고 하신다. 도망치지 말라고 하신다. 외면하지 말라고 하신다. 그러나 그 부르심은 정죄의 부르심이 아니다. 치유의 부르심이다. 자유의 부르심이다. 다시 사명으로 세우시는 부르심이다.
상처를 직면하는 것은 아프다. 그러나 그 아픔은 우리를 살리는 아픔이다. 빛 앞에 서는 것은 두렵다. 그러나 그 빛은 우리를 태워 버리는 불이 아니라, 우리를 회복시키는 은혜의 빛이다.
그러므로 상처를 핥으시는 하나님께 마음을 열고 나아가라. 하나님의 말씀 앞에 정직하게 서라. 말씀이 나를 읽게 하라. 내 안에 숨겨진 상처와 수치와 두려움을 주님 앞에 드러내라.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그 말씀은 짧다. 그러나 그 안에는 영적 세계의 구조가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도둑은 다른 목적을 가지고 오지 않는다. 잠시 들러 인사를 나누러 오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의 형편을 살피기 위해 오는 것도 아니다. 도둑은 훔치러 온다. 빼앗으러 온다. 결국 무너뜨리러 온다.
사탄과 귀신들의 목적도 그렇다.
그들은 사람의 기쁨을 훔친다. 평안을 훔친다. 정체성을 훔친다. 믿음을 훔친다. 그리고 결국 사람을 죽음과 멸망의 자리로 몰고 간다.
반대로 예수님은 생명을 주러 오셨다. 단지 죽지 않게 하시는 정도가 아니다. 겨우 숨만 붙어 있는 삶이 아니라,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신다.
그러므로 영적 전쟁의 본질은 생명과 멸망의 싸움이다.
하나님은 살리신다.
마귀는 죽인다.
하나님은 회복시키신다.
마귀는 파괴한다.
하나님은 자유롭게 하신다.
마귀는 묶는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보여 주는 세 번째 중요한 메시지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귀신들은 사람의 죄를 먹고 산다.
한류의 흐름과 케데헌 세대
21세기에 들어와 한류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 가운데 하나는 배용준이 출연한 겨울연가였다.
2000년대 초반, 일본에서 겨울연가가 인기를 얻으면서 한국 드라마와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사람들은 한국을 찾기 시작했다. “욘사마의 나라”라는 표현이 생겼고, 한국 음식과 한국 여행지에 대한 관심이 번져 갔다.
비슷한 시기에 보아가 일본에서 활동하며 한국 가수의 가능성을 열었다. 대장금은 아시아권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후 동방신기, 슈퍼주니어, 빅뱅, 원더걸스 같은 그룹들이 등장했다. 한국 대중문화는 조금씩 더 먼 지역으로 흘러갔다. 그때까지만 해도 외국에서는 이것을 주로 Korean Wave라고 불렀다.
그러다가 2012년,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등장했다. 그 노래와 뮤직비디오는 전 세계 사람들이 따라 하는 문화적 현상이 되었다. 가사를 몰라도 사람들은 리듬을 따라 움직였다. 그 이듬해 BTS가 데뷔했고, 이후 블랙핑크가 세계적인 그룹으로 성장했다. 그때부터 한류는 단순한 Korean Wave를 넘어 Hallyu라는 고유명사처럼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후 영화 기생충, 드라마 오징어게임 등을 거치며 한국 콘텐츠는 세계 문화의 중심부 안으로 깊이 들어갔다.
그 흐름 속에서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또 하나의 분기점처럼 보인다.
이 작품 안에는 남산이 있다. 낙산공원이 있다. 호랑이와 까치가 있고, 사우나가 있고, 한의원이 있다. 컵라면, 떡볶이, 오뎅, 김밥이 있다. 김밥 위에 뿌려진 깨가 있고, 자르지 않고 통째로 먹는 김밥이 있다. 새우깡을 비롯한 한국 과자들이 등장하고, 티슈 위에 수저를 놓는 모습도 나온다. 분식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초록색 플라스틱 접시도 있다.
단순히 한국을 배경으로 삼은 정도가 아니다. 한국인의 생활감, 정서, 유머, 음식, 공간, 감정선이 작품 안에 스며 있다.
루미와 진우 사이의 절제된 로맨틱한 감정선도 그렇다. 데이트처럼 보이는 장면에서 팔찌를 파는 아주머니가 나타나 “여자친구한테 하나 사 줘라”고 말한다. 진우가 화들짝 놀라며 “여자친구 아니에요”라고 말하자, 아주머니는 “못난 친구, 이런 친구하고는 사귀지 마세요” 하며 팔찌를 그냥 선물해 준다.
그 장면에는 한국적인 유머가 있다. 민망함과 정, 오지랖과 따뜻함이 뒤섞인 장면이다. 한국 사람이라면 그 분위기를 어렵지 않게 알아챈다.
이런 점에서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단순히 또 하나의 한류 콘텐츠가 아니다. 전 세계가 한국적 감성과 문화를 따라 하기 시작하는 새로운 계기가 될 수 있다. 말하자면 케데헌 세대, KDH Generation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을 문화 현상으로만 볼 수는 없다.
그 안에는 중요한 영적 메시지가 담겨 있다.
무속적 요소를 넘어서는 기독교적 메시지
지난 시간에는 케이팝 데몬 헌터스 안에 무속적인 요소가 등장한다는 점을 살펴보았다.
초대 헌터스의 배경에는 무당의 이미지가 있다. 악령을 막는 혼문이라는 설정도 등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이 작품을 기독교적으로 위험하게 볼 수 있다.
그 반응은 이해할 수 있다. 무속, 귀신, 악령, 저승사자 같은 요소들은 기독교적 감각 안에서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을 조금 더 넓은 기독교 세계관 안에서 볼 필요가 있다.
나니아 연대기에는 마녀, 요정, 사티로스, 드라이어드가 등장한다. 반지의 제왕에는 엘프와 마법사와 신화적 존재들이 나온다. 그러나 그 작품들은 단순히 신화나 마법을 찬양하는 작품으로만 읽히지 않는다. 그 안에는 선과 악, 희생과 구속, 유혹과 순종, 빛과 어둠의 싸움이 담겨 있다.
마찬가지로 케이팝 데몬 헌터스에도 무속적 요소가 부분적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그것만 보고 작품 전체를 배제해 버리면, 이 작품이 담고 있는 중요한 기독교적 메시지를 놓칠 수 있다.
이 작품이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핵심 메시지 가운데 하나는 이것이다.
귀신들은 사람의 죄를 먹고 산다.
영혼을 먹고 사는 존재들
작품 속 귀신들은 사람들의 영혼을 빼앗아 가려 한다. 그러나 그 시도는 번번이 헌트릭스에 의해 막힌다. 그러자 어둠의 세계는 고민한다.
어떻게 헌트릭스를 무너뜨릴 수 있을까.
어떻게 사람들의 영혼을 다시 빼앗을 수 있을까.
그때 한 인물이 아름다운 비파를 퉁기며 등장한다. 진우다. 그는 악마화된 존재, 곧 demonized 된 존재로 나타난다.
작품 속 노래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머나먼 옛날 강한 마왕이 살았지. 절대적인 힘을 지닌, 영혼을 먹고 사는 존재였어. 그러던 어느 날 헌터들이 노래를 불렀고, 그는 굶주려야 했어.”
여기서 중요한 영적 원리가 드러난다.
영혼을 먹고 사는 존재.
이 표현은 단순한 판타지적 설정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성경적 원리가 담겨 있다.
귀신들은 스스로 강해지지 못한다. 그들이 몸을 단련하거나, 무술을 배우거나, 전투 훈련을 해서 강해지는 것이 아니다. 어둠의 영들은 무엇을 먹고 강해지는가.
사람의 영혼을 먹고 강해진다. 더 정확히 말하면, 사람의 죄와 상처와 중독과 파괴를 통해 힘을 얻는다.
사탄과 귀신들은 사람을 살리는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사람을 이용한다. 사람의 욕망을 자극한다. 죄를 미끼로 던진다. 그 죄를 통해 사람의 영혼을 묶는다. 그리고 결국 그 사람을 무너뜨리고 파괴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도둑이 오는 목적은 분명하다.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다.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역사
목회 현장에서는 설명하기 어려운 일들을 보게 된다.
어떤 사람은 반복적으로 어둠의 압박을 받는다. 어떤 사람은 귀신 들림과 같은 현상을 경험한다. 어떤 사람은 오래된 상처와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점점 더 깊은 절망 속으로 끌려 들어간다. 어떤 사람은 결혼하고 임신한 상태에서도 감당할 수 없는 어둠의 압박 속에서 극단적인 선택으로 내몰리기도 한다.
물론 자살이나 정신적 고통을 단순하게 말해서는 안 된다. 거기에는 심리적 요인, 환경적 요인, 의학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을 수 있다. 고통당하는 사람을 정죄해서도 안 되고, 유가족에게 함부로 상처를 주어서도 안 된다.
그러나 성경적 세계관으로 볼 때, 사람을 절망과 죽음과 멸망으로 몰아가는 배후에는 분명히 어둠의 역사가 있다.
사탄은 생명을 미워한다.
귀신들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을 미워한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을 속인다. 묶는다. 고립시킨다. 수치심에 빠뜨린다. 결국 죽음으로 몰고 가려 한다.
이것이 요한복음 10장 10절이 말하는 도둑의 일이다.
도둑은 사람의 생명을 도둑질한다.
정체성을 도둑질한다.
소망을 도둑질한다.
그리고 결국 죽이고 멸망시키려 한다.
반면 예수님은 생명을 주신다.
그러므로 이 싸움의 본질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죄는 단순한 실수가 아니다. 죄는 어둠의 영들이 사람을 붙잡는 통로가 된다.
진우의 비극과 죄의 거래
진우의 배경 이야기는 이 원리를 잘 보여 준다.
400년 전, 그는 극심한 가난 속에 살고 있었다. 그의 곁에는 어머니와 어린 여동생이 있었다. 진우는 거리에서 비파를 연주하며 노래를 불렀지만 아무도 그에게 주목하지 않았다.
그는 인정받고 싶었을 것이다. 가족을 먹여 살리고 싶었을 것이다. 자신의 재능이 빛나기를 원했을 것이다. 누군가가 자기 노래를 듣고 멈추어 서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때 귀마가 찾아온다.
귀마는 그를 유혹한다. 거래를 제안한다.
그리고 하룻밤 사이에 모든 상황이 바뀐다. 사람들은 진우의 노래에 주목하기 시작한다. 그는 가족과 함께 궁중에 들어간다. 겉으로 보면 그의 삶은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가난에서 벗어났고, 인정받았고, 가족을 살린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대가가 있었다.
그의 몸과 영혼에 악령의 문양이 점점 퍼져 나가기 시작한다. 죄의 기운이 그를 삼키기 시작한다. 결국 그는 악령들의 세계로 끌려가 살게 된다. 그리고 그가 떠난 뒤 어머니와 여동생은 궁에서 쫓겨나 더 힘든 삶으로 떨어진다.
이것이 죄의 거래다.
처음에는 달콤하다.
처음에는 무언가를 얻는 것처럼 보인다.
인정, 돈, 성공, 쾌락, 위로, 힘, 영향력, 복수의 만족을 주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결국 죄는 사람을 삼킨다.
죄는 사람에게 무언가를 주는 척하다가, 마지막에는 그 사람의 영혼을 빼앗아 간다.
진우는 단순히 악한 인물이 아니다. 그는 유혹을 받았다. 거래했다. 그리고 그 거래의 결과로 악마화된 존재가 되었다.
그의 이야기는 죄가 사람을 어떻게 삼키는지를 생생하게 보여 준다.
죄가 문에 엎드려 있다
창세기 4장은 죄에 대한 중요한 장면을 보여 준다.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하나님은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지만,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다. 그러자 가인은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했다.
그때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이 말씀은 이상하다.
하나님은 죄를 마치 인격적인 존재처럼 묘사하신다. 죄가 문에 엎드려 있다. 죄가 너를 원한다. 죄가 너를 지배하려 한다.
하지만 죄 자체는 인격적인 존재가 아니다. 죄는 행위이고 상태이며 하나님을 거역하는 방향이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죄를 마치 살아 있는 짐승처럼, 사람을 덮치려는 존재처럼 말씀하셨을까.
그 이유는 죄의 배후에서 실제로 역사하는 영적 존재들이 있기 때문이다.
죄 자체가 인격은 아니지만, 죄의 배후에는 사탄과 악령들의 역사가 있다. 죄는 문 앞에 엎드린 짐승처럼 사람을 기다린다. 사람이 마음을 열고 죄를 선택하는 순간, 그 죄를 통해 어둠의 영들이 역사하기 시작한다.
문 앞에 엎드린 짐승이 있다.
아직 방 안으로 들어오지는 않았다. 그러나 기다리고 있다. 숨을 죽이고 있다. 문이 열리기를 기다린다. 사람이 자기 손으로 그 문을 조금 열어 주는 순간, 그것은 안으로 들어온다.
죄는 그렇게 들어온다.
우상은 말 못하지만 끌고 간다
고린도전서 12장 2절에서도 비슷한 표현이 나온다.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 갔느니라.”
우상은 말하지 못한다. 나무나 돌이나 금속으로 만든 형상 자체에는 아무 힘이 없다. 그런데 바울은 사람들이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끌려갔다고 말한다.
왜 그렇게 표현했을까.
우상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우상숭배의 배후에는 귀신들의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 10장에서 바울은 이방인들이 제사하는 것이 귀신에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상은 겉으로 보이는 형상이다. 그러나 그 배후에서 사람을 끌고 가는 존재는 악한 영들이다.
죄도 마찬가지다.
죄 자체는 인격이 아니다. 그러나 죄의 배후에서 사탄과 귀신들이 역사할 때, 사람은 마치 죄가 자신을 끌고 가는 것처럼 느낀다.
원하지 않는데도 끌려간다.
끊고 싶은데 끊어지지 않는다.
미워하면서도 다시 행한다.
이것이 죄의 무서움이다.
중독의 배후에 있는 영적 원리
귀신들은 사람의 죄를 통해 역사한다.
사람이 죄를 반복해서 범하면, 귀신들은 점점 더 강하게 역사한다. 그리고 그 사람의 의지는 점점 더 약해진다. 처음에는 자신이 선택하는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나면 자신이 끌려가는 것처럼 된다.
세상은 이것을 중독이라고 부른다.
중독은 단순한 습관의 문제가 아니다. 물론 뇌의 보상 체계, 심리적 결핍, 환경적 요인도 중요하다. 그러나 성경적 관점에서 보면, 중독의 배후에는 죄를 미끼로 사람의 영혼을 끌고 가는 어둠의 역사가 있다.
처음에는 사람이 죄를 선택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죄가 사람을 선택하는 것처럼 된다.
처음에는 사람이 죄를 즐긴다.
그러나 나중에는 죄가 사람을 조롱한다.
처음에는 죄가 위로처럼 보인다.
그러나 나중에는 죄가 감옥이 된다.
그래서 중독된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만두고 싶은데 그만둘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나를 망치는 줄 아는데도 다시 하게 됩니다.”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사람에게는 죄가 마치 인격적인 존재처럼 느껴진다. 사실은 그 죄의 배후에서 어둠의 영들이 역사하기 때문이다.
로마서 7장의 처절한 고백
로마서 7장은 이런 상태에 있는 사람의 처절한 고백을 보여 준다.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바울은 계속해서 말한다.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이것이 죄 아래 묶인 인간의 상태다.
선을 원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원한다. 하나님의 법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다.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한다. 그런데 내 지체 속에 있는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운다. 그리고 나를 죄의 법으로 사로잡는다.
그래서 바울은 절규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것은 단순한 도덕적 실패의 고백이 아니다.
죄의 법 아래 사로잡힌 인간의 절규다.
자기 힘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고백이다.
의지만으로는 벗어날 수 없다는 고백이다.
자신을 건져낼 구원자가 필요하다는 고백이다.
인간 안에는 깊은 균열이 있다.
선을 알면서도 선을 행하지 못한다. 악을 미워하면서도 악을 반복한다. 끊고 싶은데 다시 돌아간다. 돌아오고 싶지만 다시 끌려간다.
그 균열 앞에서 인간은 결국 묻게 된다.
누가 나를 건져낼 것인가.
죄는 귀신들의 밥이다
목회 현장이나 축사 사역의 현장에서는 이런 표현을 들을 때가 있다.
오랫동안 우상숭배와 제사를 드리던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그것을 중단하면, 축사 과정에서 악한 영들이 “예수쟁이가 되어 제사를 안 드려 우리가 오랫동안 굶었다”는 식의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험은 하나의 영적 원리를 생각하게 한다.
죄는 귀신들의 밥이다.
사람이 죄를 범하면 어둠의 영들은 그것을 통해 힘을 얻는다. 사람이 우상숭배를 계속하면 그 배후의 악한 영들은 더 강하게 역사한다. 사람이 음란, 탐욕, 미움, 거짓, 중독, 분노, 원한, 교만을 반복하면 그 죄를 통로로 귀신들의 영향력이 더 깊어진다.
그러므로 죄는 가볍게 볼 문제가 아니다.
죄는 단순히 “내가 조금 실수했다” 정도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다. 죄는 문을 여는 것이다. 어둠의 영들이 역사할 수 있는 통로를 내어 주는 것이다. 자신의 영혼을 먹이로 내어 주는 것이다.
죄는 결코 혼자 오지 않는다.
죄는 늘 무엇인가를 데리고 온다.
축사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 원리를 모르면 영적 전쟁을 잘못하게 된다.
죄로 인해 귀신들이 역사하고 있는데, 귀신들만 상대해서 싸우려 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마치 무릎이 깨져 피가 철철 흐르는 아이가 울고 있는데, 큰 반창고로 그 아이의 입만 틀어막는 것과 같다.
아이가 우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상처가 문제다.
입을 막는다고 상처가 낫지 않는다.
피가 흐르는 원인을 치료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귀신의 역사만 꾸짖고 죄의 문제를 다루지 않으면, 일시적인 자유함은 있을 수 있어도 근본적인 회복은 어렵다.
귀신을 쫓아내는 것도 필요하다. 그러나 동시에 죄를 회개해야 한다. 죄의 문을 닫아야 한다. 죄의 통로를 끊어야 한다.
이 원리를 모르고 축사만 반복하면 어떻게 되는가.
잠시 개운해진다.
잠시 자유로운 것 같다.
그러나 죄를 업신여기고 그대로 두면 다시 묶인다.
그러다가 또 축사를 받는다.
또 잠시 개운해진다.
그리고 또 죄를 반복한다.
이 과정이 반복되면 사람은 점점 더 영적인 기형 상태로 빠질 수 있다.
그러므로 참된 해방은 두 가지가 함께 가야 한다.
죄를 회개해야 한다.
그리고 어둠의 영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꾸짖어 쫓아내야 한다.
두 개의 법이 우리 안에서 싸운다
로마서 7장 25절에서 바울은 말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우리 안에는 두 개의 법이 있다.
하나는 죄와 사망의 법이다.
또 하나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다.
죄와 사망의 법은 사람을 아래로 끌어내린다. 반복되는 죄, 반복되는 중독, 반복되는 수치심, 반복되는 절망으로 끌고 간다.
중독의 구조는 대체로 이렇게 움직인다.
죄가 주는 일시적인 쾌락이나 위로가 있다. 그러나 그 뒤에는 고통이 찾아온다. 수치심이 찾아온다. 공허함이 찾아온다.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해 다시 더 큰 중독으로 들어간다. 그러면 더 큰 고통이 온다. 다시 더 강한 자극을 찾는다.
중독은 그렇게 사람을 점점 더 깊은 수렁으로 끌고 간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있다.
고통이 찾아오는 것은 단순한 저주가 아니다. 때로 그 고통은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초청이다.
돌아오라.
여기서 멈추라.
이 길은 생명의 길이 아니다.
회개하고 내게로 돌아오라.
하나님은 고통을 통해서라도 사람을 깨우신다.
회개하면 죄의 배후에서 역사하던 귀신들이 약해진다. 묶였던 의지가 풀려나기 시작한다. 전에는 도저히 끊을 수 없을 것 같던 것에 대해 이상하게 마음이 식기 시작한다.
전에는 그렇게 갈망하던 것인데,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이 든다.
왜 이것을 그렇게 원했을까.
그 순간은 은혜의 순간이다.
그리고 그때가 기회다.
생명의 성령의 법을 따라가라
로마서 8장은 복음의 위대한 선언으로 시작된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 말씀은 죄를 가볍게 여기라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죄와 정죄와 사망의 감옥에서 나올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뜻이다.
사탄은 죄를 짓게 한 뒤 정죄한다.
너는 끝났다.
너는 더럽다.
너는 하나님께 갈 수 없다.
너는 또 실패할 것이다.
그러나 복음은 말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그리고 이어서 말씀한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사람에게는 죄와 사망의 법보다 더 강한 법이 필요하다. 그것이 생명의 성령의 법이다.
의지만으로는 죄의 법을 이길 수 없다. 결심만으로는 중독을 끊을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역사하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될 수 있다.
그러므로 회개한 뒤에는 생명의 성령의 법을 따라가야 한다.
죄가 주던 자극을 거부해야 한다. 성령께서 주시는 생명의 갈망을 따라가야 한다. 말씀을 붙들어야 한다. 기도해야 한다. 찬양해야 한다. 공동체 안에 머물러야 한다. 죄의 통로를 끊어야 한다. 다시 묶으려는 환경과 관계와 습관을 정리해야 한다.
해방은 한순간에 시작될 수 있다.
그러나 자유는 계속 걸어가야 한다.
성령의 법을 따라 계속 걸어가야 한다.
귀신을 굶기고 성령을 따르라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상징적으로 중요한 메시지를 보여 준다.
어둠의 영들은 영혼을 먹고 산다. 그들은 사람의 죄와 상처와 중독과 절망을 통해 힘을 얻는다. 그리고 사람을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끌고 가려 한다.
성경도 같은 원리를 보여 준다.
죄가 문에 엎드려 있다.
죄가 너를 원한다.
말 못하는 우상이 사람을 끌고 간다.
죄의 법이 사람을 사로잡는다.
이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죄의 배후에서 역사하는 어둠의 영적 실재를 보여 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죄를 가볍게 여기면 안 된다.
죄는 귀신들의 밥이다.
죄를 반복하면 어둠의 영들은 강해지고, 사람의 의지는 약해진다. 그러나 회개하면 어둠의 영들은 약해진다. 죄의 문이 닫힌다. 묶였던 의지가 풀려난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다시 일으킨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케이팝 데몬 헌터스를 통해 음악을 통한 영적 전쟁이라는 주제를 살펴보았다.
그 작품은 단순히 케이팝을 소재로 한 애니메이션이 아니었다. 적어도 그렇게만 보기에는 무언가 더 깊은 것이 있었다. 노래가 사람의 마음에 어떻게 스며드는지, 음악이 영혼을 어디로 데려갈 수 있는지, 그리고 인간이 얼마나 쉽게 어떤 소리에 사로잡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고 있었다.
노래는 사람을 미혹할 수 있다.
노래는 사람을 자유롭게 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 작품을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또 하나의 질문이 생긴다. 조용히, 그러나 피할 수 없는 질문이다.
이 작품 안에는 무속적인 요소가 있다.
귀신을 물리치는 여성들이 등장한다. 그 배경에는 한국의 오래된 무속적 전통이 암시된다. 저승사자 같은 이미지도 나온다. 사람의 영혼을 빼앗는 악령들이 있고, 그것을 막는 영적 방패 같은 설정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작품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무속적인 요소가 나오기 때문에 무조건 배척해야 하는가.
아니면 그 안에 담긴 더 깊은 메시지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하는가.
오늘 우리가 함께 생각하려는 주제는 이것이다.
기독교 세계관을 넓히라.
이 말은 아무 것이나 받아들이라는 뜻이 아니다. 세상 문화를 아무 분별 없이 수용하라는 뜻도 아니다. 오히려 더 깊이 보라는 뜻이다. 더 성경적으로, 더 넓게, 더 섬세하게 분별하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문화와 이야기와 상상력 속에서도 어떻게 복음의 접촉점을 열어 가시는지를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무속적 모티프와 영적 상상력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앞부분에는 헌트릭스의 기원과 배경이 짧게 소개된다.
오래전 한국의 어느 시대, 악령들이 사람들을 공격했다. 그들은 사람들의 영혼을 빼앗아 귀마에게 바쳤다. 마치 어둠 속에서 사람의 숨결을 수집하는 존재들처럼, 그들은 인간의 마음을 사냥했다.
그때마다 그 악령들을 물리치고 사람들을 보호하는 존재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세 명의 여성이었다. 그중 중심적인 인물은 무당과 연결된 존재로 묘사된다.
감독 매기 강은 과거 무당이 행했던 굿을 하나의 공연으로 보았던 것 같다. 사람들이 함께 모이고, 노래하고, 춤추고,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행위. 그것은 한 사회 안에서 음악과 몸짓과 영적 감각이 하나로 뒤섞인 오래된 무대였을지도 모른다.
작품은 그 상상력에서 출발한다.
노래와 춤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는다. 그렇게 모인 마음이 악령들이 뚫고 들어올 수 없는 거대한 방패가 된다. 작품은 그것을 혼문이라고 부른다.
이 역할은 시대마다 지명된 세 명의 여성들을 통해 이어져 왔다. 그리고 지금 이 시대에 그 부름을 받은 이들이 루미, 미라, 조이, 곧 헌트릭스다.
여기서 분명히 무속적인 요소가 등장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 지점에서 불편함을 느낄 수 있다. 그 반응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무속을 복음과 혼합해서는 안 된다. 귀신을 쫓는 능력이 무당에게서 나오는 것처럼 말해서도 안 된다. 성경적 관점에서 악한 영을 이기는 권세는 오직 하나님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십자가의 승리 안에 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이 작품이 무속을 신앙의 대상으로 권하는 것인가.
아니면 무속적 이미지를 하나의 문화적 모티프로 사용하여, 선과 악, 빛과 어둠, 영혼의 구원과 사로잡힘이라는 더 큰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는가.
이 구분은 중요하다.
매우 중요하다.
저승사자와 사자보이즈
작품에는 헌트릭스에 맞서기 위해 만들어진 보이그룹이 등장한다. 사자보이즈다.
그들은 한국의 무속적 설화 속 저승사자 이미지를 차용하고 있다. 저승사자는 사람이 죽을 때 그 영혼을 저승으로 데려가는 존재로 알려져 있다. 검은 옷, 낯선 얼굴, 피할 수 없는 부름. 한국인의 상상력 속에서 저승사자는 죽음과 경계의 상징이었다.
작품은 그 이미지를 악령적 존재와 연결한다. 사자보이즈는 겉으로는 매력적인 보이그룹이다. 무대 위에서 그들은 빛난다. 사람들은 그들에게 열광한다. 그러나 그들의 본질은 다르다. 그들은 사람들을 홀리고, 영혼을 빼앗는 존재들이다.
성경을 보면 죽음 이후 영혼이 옮겨지는 장면이 나온다. 누가복음 16장에서 거지 나사로가 죽었을 때, 그는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간다. 의인이 죽을 때 천사들이 그를 데려간다는 성경적 이미지가 있다면, 반대로 악인이나 불신자의 죽음 이후 악한 영들이 그 영혼을 끌고 가는 이미지도 상징적으로 상상해 볼 수 있다.
성경이 그것을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영적 세계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으로는 충분한 개연성이 있다.
그래서 사자보이즈가 저승사자 같은 모습으로 등장해 사람들의 영혼을 미혹하는 보이그룹으로 그려지는 것은 흥미롭다. 그들은 매력적이다. 그러나 그 매력의 끝에는 사로잡힘이 있다.
이것은 오늘날 대중문화 속 우상화, 팬덤, 집착, 영혼의 사로잡힘이라는 문제를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문제는 소재가 아니라 메시지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생긴다.
헌트릭스의 뿌리가 무당과 연결되어 있고, 사자보이즈가 저승사자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면, 이 작품은 기독교적으로 완전히 배척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소재와 메시지를 구분해야 한다.
어떤 작품에 무속적 소재가 등장한다고 해서 그 작품이 반드시 무속을 찬양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어떤 작품에 기독교적 소재가 등장한다고 해서 그 작품이 반드시 복음적인 것도 아니다.
영화 파묘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그 영화에는 기독교인 감독과 배우들이 관련되어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었고, 촬영 과정에서 기도했다는 말도 있었다. 그러나 많은 기독교인들은 이 작품을 심각하게 비판했다. 왜냐하면 그 영화가 기독교를 우스꽝스럽고 무력한 종교처럼 보이게 하고, 어둠의 힘을 굉장히 강력하고 매력적인 것으로 묘사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반면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무속적 요소를 모티프로 사용하지만, 전체 구도는 다르다.
악령은 악령으로 묘사된다.
사람의 영혼을 빼앗으려는 어둠의 세력은 부정적으로 그려진다.
그리고 그 악령의 세력에 맞서 사람들을 지키고 자유롭게 하는 싸움이 중심에 있다.
다시 말해 문제는 무속적 이미지가 등장하느냐 자체가 아니다. 그 이미지가 어떤 메시지를 위해 사용되느냐이다.
소재만 보고 판단하면 많은 것을 놓칠 수 있다.
메시지를 보아야 한다.
방향을 보아야 한다.
그 이야기가 사람의 마음을 어디로 데려가는지를 보아야 한다.
나니아와 반지의 제왕을 떠올려 보라
이 지점에서 우리는 C. S.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와 J. R. R. 톨킨의 반지의 제왕을 떠올릴 수 있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은 이 두 작품을 기독교 세계관을 담은 위대한 문학 작품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처음부터 모든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본 것은 아니었다.
나니아 연대기에는 마녀가 나온다. 요정도 나오고, 페가수스도 나오고, 사티로스도 나오고, 드라이어드도 나온다. 사티로스는 반인반수의 존재이고, 드라이어드는 나무의 정령이다.
반지의 제왕에도 엘프가 나오고, 난쟁이가 나오고, 마법사 간달프가 나온다. 거대한 신화적 세계가 펼쳐진다.
이런 요소들은 북유럽 신화, 켈트 신화,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온 것들이다. 그래서 1950년대에 이 작품들이 나왔을 때, 미국과 영국의 일부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은 이 작품들을 비판했다. 아이들에게 참된 기독교 신앙에 혼동을 줄 수 있다는 이유였다.
사실 오늘 우리도 처음 나니아 연대기를 볼 때, 마녀와 마법과 요정이 등장하는 장면에서 멈칫할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많은 기독교인들은 그 작품들의 깊은 메시지를 보게 되었다.
나니아 연대기에서 아슬란은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그의 희생과 부활은 복음의 핵심을 동화적 상상력 안에서 보여 준다. 반지의 제왕은 절대 권력의 유혹, 악의 파괴성, 작은 자들의 순종과 희생, 섭리의 신비를 장대한 서사로 보여 준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작품 안에 신화적 요소가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다.
그 요소들이 어떤 세계관 속에서 사용되고 있느냐이다.
톨킨의 하위 창조
J. R. R. 톨킨은 어릴 때부터 라틴어와 헬라어를 배웠다. 자연스럽게 그리스-로마 신화를 접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을 가장 깊이 사로잡은 것은 북유럽과 게르만 신화였다.
그는 영웅들의 이야기를 사랑했다. 특히 니벨룽겐의 노래와 지그프리트가 용을 죽이는 장면은 그에게 깊은 흔적을 남겼다. 그는 그 이야기가 자신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자신의 삶을 바꾸어 놓았다고 고백했다.
그런데 톨킨은 단순히 신화를 좋아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평생 가톨릭 신앙 안에서 살았던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는 인간의 상상력과 신화 창작을 “하위 창조”라고 보았다.
하나님만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참된 창조주이시다. 그것이 상위 창조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은 하나님께 받은 상상력으로 이야기를 만들고 세계를 그려 낸다. 이것이 하위 창조다.
톨킨에게 신화는 단순한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이 영원과 신성을 향해 더듬어 가는 상상력의 산물이었다.
물론 신화 자체가 복음은 아니다.
그러나 신화 속에는 인간이 하나님을 찾고, 구원을 갈망하고, 악을 이기는 선을 기다리는 마음이 반영될 수 있다.
루이스의 젠주흐트
C. S. 루이스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그는 어머니를 잃은 뒤, 어린 시절부터 깊은 상실과 갈망을 안고 살았다. 마음속 어딘가에 채워지지 않는 공간이 있었다. 설명할 수 없고, 이름 붙이기 어려운 공간이었다.
그러던 중 그는 북유럽 신화를 읽으며 자기 영혼을 흔드는 강렬한 갈망을 경험했다. 그는 그것을 독일어로 젠주흐트라고 불렀다.
Sehnsucht.
단순한 그리움이 아니다. 이 세상 안에서는 완전히 채워지지 않는 갈망이다. 멀리 있는 무엇인가를 바라보며 찾는 마음이다. 이 땅의 어떤 것으로도 완전히 만족되지 않는, 사라지지 않는 영원의 갈망이다.
전도서 3장 11절은 이렇게 말씀한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사람 안에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지으셨다.
루이스는 훗날 깨닫게 된다. 이 세상에서는 채워지지 않는 갈망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만을 위해 창조된 존재가 아니라는 증거라는 것을.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지음 받은 존재다.
그러므로 이 땅의 아름다움과 이야기와 음악과 신화가 우리 안에 깊은 갈망을 깨울 때, 그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갈망일 수 있다.
신화가 복음으로 완성되다
1931년 9월, 옥스퍼드에서 톨킨과 루이스, 그리고 휴고 다이슨이 함께 산책하며 긴 대화를 나누었다.
밤이었을 것이다.
영국의 공기는 조금 습했을 것이고, 가로등 불빛은 오래된 길 위에 희미하게 떨어졌을 것이다.
그들은 걷고, 말하고, 멈추었다가 다시 걸었을 것이다.
그날의 대화는 루이스가 무신론에서 기독교 신앙으로 돌아오는 데 매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톨킨은 루이스에게 말했다. 이교도의 신화들은 신성을 향한 인간 상상력의 진정한 꿈들이라고. 여러 신화 속에는 죽음과 부활, 희생과 구원, 악을 이기는 선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부분적이고 상징적인 꿈이었다.
그런데 복음 안에서는 그 꿈들이 실제 역사 속에서 현실이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십자가, 부활은 신화적 상상이 아니다. 그것은 역사 속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사건이다.
루이스는 이 말을 들으며 자신이 북유럽 신화와 그리스-로마 신화를 읽을 때 느꼈던 그 설명할 수 없는 갈망이 사실은 하나님을 찾고 있는 내면의 갈망이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신화는 복음의 대체물이 아니다.
그러나 신화는 복음을 향한 갈망을 깨우는 하나의 길이 될 수 있다.
이것이 기독교 세계관을 넓히는 일이다.
세상의 이야기들을 무조건 복음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 안에 있는 갈망과 질문과 상징을 통해 사람들을 복음으로 인도할 수 있어야 한다.
바울이 아덴에서 본 것
사도행전 17장은 이 문제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본문이다.
바울은 아덴에 도착했다. 그 도시는 그리스 철학과 예술과 종교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동시에 수많은 우상으로 가득한 도시였다. 거리를 걸을 때마다 신들의 형상이 보였을 것이다. 돌과 금속과 이름 없는 제단들이 도시 곳곳에 서 있었을 것이다.
성경은 바울이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한 첫마디를 보라.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바울은 그들의 우상숭배를 보고 분노했다. 그러나 그들과 대화할 때는 그들의 종교성을 접촉점으로 삼았다.
그는 이렇게 시작하지 않았다.
“너희는 다 틀렸다.”
“너희의 문화는 전부 쓰레기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그들 안에 있는 종교적 갈망을 인정하며 대화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이 세워 둔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는 제단을 보았다고 말했다.
그것은 분명히 우상숭배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그것을 모티프로 삼아 참된 하나님을 증거했다.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이것이 바울의 탁월함이다.
그는 우상숭배를 인정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상숭배 속에서도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인간의 왜곡된 갈망을 보았다. 그리고 그것을 복음의 접촉점으로 사용했다.
알지 못하는 신에서 창조주 하나님으로
바울은 아덴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이렇게 소개한다.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바울은 그들의 제단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그들을 그 제단에 머물게 하지 않았다.
그는 그들을 창조주 하나님께로 인도했다.
하나님은 인간이 만든 신전 안에 갇혀 계신 분이 아니다.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아야만 존재하시는 분도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분이다.
그리고 바울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까지 증거한다.
이것이 중요하다.
문화적 접촉점은 출발점이지 결론이 아니다.
신화와 예술과 음악과 대중문화는 복음으로 가는 대화의 문이 될 수 있지만, 그것 자체가 복음은 아니다.
결국 우리는 그 문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나아가야 한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를 어떻게 볼 것인가
이제 다시 케이팝 데몬 헌터스로 돌아와 보자.
지난 시간에 우리는 이 작품 안에 음악을 통한 영적 전쟁이라는 메시지가 있음을 보았다. 사탄은 음악을 통해 사람들의 영혼을 미혹할 수 있다. 반대로 하나님께 드려지는 거룩한 음악, 찬양은 어둠의 세력을 물리치는 영적 무기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이 작품에는 그것 말고도 또 다른 중요한 기독교적 메시지들이 담겨 있다.
선과 악의 대결.
영혼을 빼앗기지 않기 위한 싸움.
공동체가 하나 되어 어둠을 막는 장면.
자기 안의 어둠과 수치를 직면하고 진실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
이 모든 요소들은 기독교적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만일 우리가 이 작품 안에 무속적 소재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이것은 기독교적일 수 없다. 무조건 잘못된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많은 것을 잃어버리게 된다.
바울이 아덴 사람들의 “알지 못하는 신” 제단을 보고 그것을 복음의 접촉점으로 사용했던 것처럼, 우리도 이 시대의 문화 속에서 복음의 접촉점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루이스가 말한 동화적 장치
C. S. 루이스는 자신이 왜 동화 속에 마법과 신화적 요소를 사용했는지 설명한 적이 있다.
그는 아이들에게 마법을 믿으라고 가르치기 위해 마법을 쓴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것을 동화적 장치로 사용했다. 그 장치는 아이들의 상상력을 열고, 그 상상력 안에서 선과 악, 희생과 구속, 용기와 믿음을 배우게 하는 도구였다.
나니아 연대기를 읽는 아이들은 상상 속 세계에서 선과 악의 싸움을 경험한다. 아슬란의 희생을 통해 대속의 의미를 느낀다. 부활의 기쁨을 동화적 언어로 맛본다.
마법과 요정은 메시지의 본질이 아니다.
그것들은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상징적 도구다.
이 관점에서 보면 케이팝 데몬 헌터스 안의 무속적 요소도 단순히 배척만 할 것이 아니라 분별해야 한다.
그것이 무속 신앙을 권하는 것인가.
아니면 한국적 문화의 상징을 빌려 영적 전쟁과 구원과 공동체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장치인가.
우리는 그것을 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사용하신다
왜 하나님은 이런 것들조차 사용하셔서 사람들을 당신께로 이끄시는가.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마음 때문이다.
디모데전서 2장 4절은 말한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베드로후서 3장 9절도 말한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나님은 한 사람도 멸망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모든 사람이 진리를 알고 구원받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다양한 통로를 사용하신다.
자연을 통해 말씀하시고, 양심을 통해 말씀하시고, 고난을 통해 말씀하시고, 때로는 문화와 예술과 이야기 속에서도 사람의 마음을 두드리신다.
물론 문화가 곧 계시라는 뜻은 아니다. 성경만이 하나님의 특별계시이며, 복음의 기준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일반은총의 세계 속에서도 사람들의 마음에 질문을 일으키신다.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깨우신다. 복음을 향한 길을 준비하신다.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바울
바울은 고린도전서 9장에서 복음을 전하는 자신의 태도를 이렇게 설명한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바울은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과 같이 되었다.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율법 아래 있는 자처럼 되었다. 율법 없는 자들에게는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되었다. 약한 자들에게는 약한 자와 같이 되었다.
그 이유는 하나였다.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었다.
이것은 타협이 아니었다. 바울은 복음의 본질을 양보하지 않았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상대의 언어와 문화와 상황 속으로 들어갔다.
이것이 선교적 지혜다.
사도행전 16장에서 바울은 디모데를 데리고 선교 여행을 떠나기 전에 그에게 할례를 행했다. 바울은 율법으로 구원받는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갈라디아서에서는 할례를 구원의 조건으로 삼는 것을 강하게 반대했다.
그러나 디모데의 아버지가 헬라인이라는 사실을 그 지역 유대인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복음 전파에 불필요한 장애물이 생기지 않도록 그에게 할례를 행한 것이다.
이것이 바울의 태도다.
복음의 본질은 결코 양보하지 않는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자신의 문화적 고집은 내려놓을 수 있다.
트로트에도, 헤비메탈에도 복음을 담을 수 있다
이 원리를 오늘 우리에게 적용해 보자.
어떤 사람이 노래를 좋아하는데 오로지 트로트만 좋아한다고 해 보자. 그렇다면 우리는 트로트에 복음을 담을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사람이 헤비메탈을 좋아한다면, 그 장르 안에서도 복음을 담을 방법을 고민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세대가 케이팝에 열광한다면, 우리는 케이팝이라는 문화적 언어를 통해 그들에게 복음의 메시지를 전할 길을 찾아야 한다.
물론 모든 장르와 모든 문화가 자동으로 거룩한 것은 아니다. 어떤 음악은 분명히 죄를 미화하고, 정욕을 부추기고, 폭력과 허무를 확산시킬 수 있다. 그런 것은 분별해야 한다.
그러나 장르 자체를 무조건 악으로 규정해서는 안 된다.
문제는 그 안에 무엇을 담느냐이다.
어떤 영이 그것을 이끌고 있느냐이다.
어떤 메시지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느냐이다.
기독교 세계관이 좁아지면 우리는 세상을 두려워만 하게 된다. 그러나 기독교 세계관이 넓어지면 우리는 세상을 분별하면서도 그 안에서 복음의 길을 찾게 된다.
창조주 하나님과 인간의 갈망
하나님은 온 세상의 창조자이시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그분이 창조하신 것이다. 인간의 목소리도 하나님이 만드셨고, 리듬과 선율을 느끼는 감각도 하나님이 주셨다. 색채와 이야기와 상상력도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선물이다.
죄는 이 모든 것을 왜곡한다.
음악이 우상숭배의 도구가 될 수 있다. 예술이 정욕과 교만을 섬기는 도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죄가 왜곡했다고 해서 창조 세계 자체가 사탄의 소유가 되는 것은 아니다.
창조 세계의 주인은 여전히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문화를 볼 때 두 가지를 동시에 보아야 한다.
하나는 죄로 인한 왜곡이다.
다른 하나는 그 안에 남아 있는 창조의 흔적이다.
인간이 아름다움을 갈망하고, 구원을 꿈꾸고, 악을 이기는 선의 이야기에 감동하고, 죽음을 넘어서는 생명을 상상하는 것은 그 안에 하나님께서 주신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 갈망을 사용하신다.
그 갈망을 깨워 복음으로 이끄신다.
신화도, 음악도, 이야기들도, 때로는 대중문화도 그 통로가 될 수 있다.
기독교 세계관을 넓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기독교 세계관을 넓혀야 한다.
이것은 세상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이라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더 성경적으로, 더 깊이, 더 넓게 보라는 말이다.
좁은 세계관은 소재만 보고 판단한다.
무당이 나오면 무조건 나쁘다.
마법사가 나오면 무조건 틀렸다.
신화적 존재가 나오면 무조건 위험하다.
그러나 넓은 기독교 세계관은 소재만 보지 않는다. 메시지와 방향을 본다.
이 이야기가 사람을 어디로 이끄는가.
어둠을 미화하는가, 아니면 어둠을 폭로하는가.
우상숭배를 권하는가, 아니면 우상숭배의 위험을 드러내는가.
인간의 영혼을 절망으로 끌고 가는가, 아니면 구원과 희망을 갈망하게 하는가.
바울은 아덴의 우상들 앞에서 복음의 문을 보았다.
톨킨과 루이스는 이교 신화 속에서 복음을 향한 인간의 갈망을 보았다.
우리는 오늘 대중문화 속에서도 이 시대 사람들의 두려움과 갈망과 질문을 읽어야 한다. 그리고 그 질문에 복음으로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모든 것을 복음을 위한 통로로 보라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우리 시대의 흥미로운 문화 현상이다.
이 작품에는 무속적 요소가 있다. 그러나 동시에 영혼을 빼앗으려는 어둠의 세력, 음악을 통한 미혹, 공동체의 연합, 선과 악의 싸움,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 노래라는 주제도 있다.
이것을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읽어 낼 수 있다면, 이 작품은 복음적 대화를 여는 하나의 도구가 될 수 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모든 것을 사용하신다.
문화도 사용하신다.
예술도 사용하신다.
이야기와 음악도 사용하신다.
사람 안에 있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 곧 이 세상 것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깊은 갈망을 깨우셔서 결국 창조주 하나님께로 이끄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움으로 세상을 피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
분별 없이 세상을 받아들여서도 안 된다.
우리는 바울처럼 보아야 한다.
우상이 가득한 아덴에서도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는 제단을 복음의 접촉점으로 삼았던 바울처럼, 이 시대의 문화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갈망의 흔적을 찾아야 한다.
기독교 세계관을 넓히라.
세상을 사랑해서 세상에 동화되라는 말이 아니다.
세상을 두려워해서 도망치라는 말도 아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세상 속에 있는 갈망과 질문을 복음으로 해석하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 모든 길의 마지막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셔야 한다.
신화가 아니라 복음으로.
상상이 아니라 역사로.
상징이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의 실제 사건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사람들을 인도해야 한다.
하나님은 오늘도 사람들의 마음속에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깨우신다.
그리고 그 갈망의 끝에서 사람들은 마침내 참된 창조주, 참된 구원자, 참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한다.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그들은 하늘을 읽을 줄 알았다.
저녁 하늘이 붉으면 다음 날 날씨가 좋을 것을 알았다. 서쪽 하늘에 구름이 적고, 대기가 안정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반대로 아침 하늘이 붉으면 날이 흐릴 가능성이 컸다. 서쪽에서 구름과 비구름이 몰려올 수 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하늘의 색을 보고 내일의 날씨를 짐작했다.
붉은 하늘을 보고 우산을 준비할지, 밭에 나갈지, 길을 떠날지를 결정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물으셨다.
너희는 하늘은 읽으면서, 왜 시대는 읽지 못하느냐.
천기는 분별하면서, 왜 하나님의 표적은 분별하지 못하느냐.
시대의 표적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한 시대를 향해 주시는 신호다. 하나님께서 역사의 어느 지점에서 사람들에게 보내시는 메시지다. 구약 시대에는 주로 선지자들의 입술을 통해 그런 표적이 주어졌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때때로 영화나 드라마, 음악과 같은 대중문화 속에서도 한 시대의 영적 흐름이 드러난다.
문화는 단순히 소비되는 것이 아니다.
문화는 시대의 꿈을 비추는 거울이다.
때로는 사람들의 두려움을 드러내고, 때로는 감추어진 욕망을 드러내며, 때로는 한 세대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조용히 보여 준다.
그래서 우리는 물어야 한다.
지금 이 시대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무엇에 열광하고 있는가.
무엇을 노래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 노래는 사람들의 영혼을 어디로 데려가고 있는가.
시대의 표적을 읽어야 한다
넷플릭스를 통해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던 대표적인 한국 콘텐츠가 있었다. 오징어게임이다.
달고나.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초록색 트레이닝복.
거대한 인형.
어린 시절의 놀이와 죽음의 공포가 이상하게 뒤섞인 그 세계는 세계인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그런데 그 뒤에 또 다른 작품이 나타났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
말하자면 “케이팝 귀신 사냥꾼”이다.
처음 제목만 보면 조금 이상하다. 케이팝과 데몬, 아이돌과 귀신, 무대와 영적 전쟁이 한 문장 안에 나란히 놓여 있다.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 한 테이블에 앉아 있는 느낌이다. 처음에는 또 하나의 오컬트 영화가 나온 줄 알았다. 귀신, 악령, 주술, 퇴마 같은 어두운 소재를 자극적으로 다루는 작품일 것 같았다.
“아, 또 대중문화를 통해 영적으로 어지럽히는 작품이 나왔구나.”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작품을 들여다보면 조금 다르다. 이 애니메이션은 단순히 오컬트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작품이 아니다. 물론 기독교 작품은 아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성경적 세계관과 연결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중요한 시대적 메시지가 담겨 있다.
이 작품은 한국적인 것들을 하나둘 보여 주는 수준을 넘어선다. 케이팝 아이돌이 등장하고, 수건으로 양머리를 하고 사우나에 앉아 있는 장면이 나온다. 한약방, 김밥, 컵라면, 떡볶이, 한국 과자, 한옥, 남산타워, 낙산성곽, 한국 민화 속 호랑이와 까치가 등장한다.
한국 문화가 조각조각 들어간 것이 아니라, 한국이라는 세계 전체가 애니메이션 안으로 들어가 있다.
더 주목할 만한 것은 그 주제곡이다. “Golden.” 이 노래는 영국 Official Singles Chart와 미국 Billboard Hot 100에서 모두 1위를 기록했다. 단순한 애니메이션 삽입곡이 아니라, 음악과 영상과 한국 문화가 결합된 하나의 세계적 현상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단순한 유행일까.
아니면 시대의 표적일까.
우리는 여기서 멈추어야 한다.
잠깐 멈추어, 이 작품이 왜 이렇게 사람들의 마음을 붙잡는지 물어야 한다.
노래로 싸우는 두 그룹
이 작품의 중심에는 두 그룹이 있다.
하나는 3인조 걸그룹 헌트릭스다. 루미, 미라, 조이. 이들은 겉으로 보면 세계적인 케이팝 아이돌이다. 화려한 무대에 서고, 사람들의 함성을 받고, 빛나는 의상과 음악 속에서 노래한다.
그러나 그들은 단순한 스타가 아니다.
그들은 헌터다.
노래를 통해 악령들을 물리치고 사람들의 영혼을 지키는 존재들이다.
다른 한쪽에는 5인조 보이그룹 사자보이즈가 있다. 이들도 겉으로는 매력적인 아이돌처럼 보인다. 팬들을 사로잡고, 무대 위에서 완벽하게 움직이며, 사람들의 마음을 홀린다.
그러나 그들의 정체는 다르다.
그들은 인간의 영혼을 노리는 악령들이다.
갓을 쓰고 까만 도포를 입은 저승사자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고, 노래를 통해 사람들의 마음을 유혹한다.
한쪽은 노래로 영혼을 자유롭게 한다.
다른 한쪽은 노래로 영혼을 사로잡는다.
이 작품의 중심 구도는 결국 음악을 통한 영적 전쟁이다.
이것은 단순한 판타지가 아니다. 성경적으로 볼 때 음악은 단순한 예술의 영역에만 머물지 않는다. 음악은 사람의 감정과 생각, 기억과 갈망을 깊이 움직인다. 어떤 음악은 사람을 하나님께로 이끌고, 어떤 음악은 사람을 더 깊은 어둠의 세계로 끌고 간다.
노래는 공기처럼 흘러 들어온다.
귀로 들어와 마음에 머문다.
그리고 마음에 오래 머문 것은 결국 삶의 방향을 바꾸기 시작한다.
사탄의 타락과 음악의 문제
음악과 영적 세계의 관계를 생각할 때, 우리는 사탄의 타락을 떠올리게 된다.
이사야 14장은 원래 바벨론 왕을 향한 심판의 노래다. 그러나 오랜 전통 속에서 많은 해석자들은 그 배후에 있는 사탄적 교만과 타락의 원리를 함께 보았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그는 마음속으로 말했다.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여기서 사탄적 교만의 핵심이 드러난다.
피조물이 하나님처럼 되려는 욕망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리에 있어야 할 존재가, 자기 자신을 높이려 한다. 받은 빛을 반사해야 할 존재가, 스스로 빛의 근원이 되려 한다. 거기서 타락이 시작된다.
흥미로운 것은 이사야 14장 11절에 이런 표현이 나온다는 것이다.
“네 영화가 스올에 떨어졌음이여, 네 비파 소리까지로다.”
비파.
현악기의 소리.
추락한 영광과 함께 떨어진 음악의 이미지가 거기 있다.
에스겔 28장에도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두로 왕을 향한 애가 속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네가 지음을 받던 날에 너를 위하여 소고와 비파가 준비되었도다.”
소고는 타악기적 요소를 떠올리게 하고, 비파는 히브리어로 볼 때 관악기적 해석된다. 물론 이 본문들을 가지고 사탄이 원래 천상의 찬양대장이었다고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은 조심해야 한다.
그러나 적어도 성경은 교만과 타락, 영광과 음악의 이미지를 함께 보여 준다.
그리고 역사 속에서 음악은 실제로 두 방향으로 사용되어 왔다.
하나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거룩한 도구다.
다른 하나는 인간의 욕망과 우상숭배를 부추기는 도구다.
음악은 중립적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그 안에 어떤 영이 담기느냐에 따라 사람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끈다.
대중음악과 영혼의 사로잡힘
오늘날 대중음악의 영향력은 엄청나다.
음악은 단순히 귀로 듣는 것이 아니다. 반복해서 듣는 노래는 사람의 정서와 생각 속으로 들어온다. 가사는 가치관을 형성하고, 리듬은 몸과 감각을 움직인다. 그리고 스타를 향한 팬덤은 때때로 숭배에 가까운 형태로 발전한다.
그래서 “아이돌”이라는 단어 자체도 영적으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영어의 idol은 우상이라는 뜻이다. 물론 현대 대중문화에서 아이돌은 단순히 인기 있는 가수나 스타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그러나 단어가 가진 원래 의미를 생각하면, 이 시대의 스타 문화가 얼마나 쉽게 우상화의 구조로 흘러갈 수 있는지 보게 된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에서 사자보이즈가 부르는 노래 “Your Idol”은 그런 점에서 매우 상징적이다.
그 노래는 말한다.
내가 너의 아이돌이 되겠다고.
너를 통제하고 집착하게 만들겠다고.
너는 이미 내게 마음을 주었으니, 이제 영혼을 가져갈 차례라고.
그 말들은 단순한 팬송의 언어가 아니다.
그것은 영혼을 사로잡는 우상숭배의 언어처럼 들린다.
사람은 반복해서 바라보는 것을 닮아간다.
반복해서 듣는 것에 마음이 물든다.
계속해서 열광하는 대상에게 자기 정체성의 일부를 내어준다.
그래서 음악은 단순한 취향의 문제가 아니다.
음악은 영적인 방향성과도 연결될 수 있다.
누구의 노래를 듣고 있는가.
그 노래는 내 안에 무엇을 깨우는가.
그 리듬은 내 마음을 어디로 데려가는가.
그 가사는 내 영혼에 어떤 문장을 심는가.
이 질문은 가볍지 않다.
다윗의 수금과 악령의 떠남
성경은 음악이 영적 세계와 연결될 수 있음을 분명히 보여 준다.
사무엘상 16장에서 사울은 하나님께 버림받은 뒤 악령으로 인해 번뇌한다.
“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그를 번뇌하게 한지라.”
사울의 신하들은 수금을 잘 타는 사람을 구하자고 제안한다. 그리고 다윗이 사울 앞에 불려온다. 다윗은 수금을 들고 와서 손으로 탄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사울이 상쾌하여 낫고 악령이 그에게서 떠나더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한 음악 치료 효과만이 아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기름 부음 받은 사람이었다. 그의 연주는 단순한 기술이 아니었다. 그 안에는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있었고, 기름 부음이 있었다.
그가 수금을 탈 때, 악령의 역사가 물러갔다.
이것이 성경이 보여 주는 음악의 영적 차원이다.
음악은 단순히 분위기를 만드는 도구가 아니다.
하나님께 드려질 때 음악은 찬양이 된다.
그리고 찬양은 영적 전쟁의 무기가 된다.
찬양은 성도의 칼이다
시편 149편은 찬양과 영적 전쟁의 관계를 매우 강하게 보여 준다.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성도의 모임 가운데에서 찬양할지어다.”
처음에는 예배의 장면처럼 들린다. 성도들이 모여 하나님께 노래하는 장면이다. 그러나 시편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들의 입에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있고, 그들의 손에는 두 날 가진 칼이 있도다.”
입에는 찬양이 있고, 손에는 칼이 있다.
이것은 이상한 장면이다. 노래와 칼이 함께 있다. 예배와 전쟁이 함께 있다. 그러나 영적 세계에서는 이것이 낯선 일이 아니다.
찬양은 단순한 감정 표현이 아니다. 찬양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선포하는 행위다. 찬양은 어둠의 권세 앞에서 하나님의 통치와 승리를 선언하는 영적 행위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찬양할 때, 어둠의 권세가 묶인다. 거짓된 왕들과 귀인들이 결박된다. 하나님의 판결이 집행된다.
그러므로 찬양은 예배 순서의 앞부분을 채우는 노래가 아니다.
찬양은 성도의 칼이다.
입술에 들린 영적 무기다.
십자가로 이미 승리하신 그리스도
그러나 여기서 반드시 붙들어야 할 중심이 있다.
음악 자체가 악령을 이기는 것이 아니다.
찬양 자체가 주술처럼 작동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의 승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나온다.
골로새서 2장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을 분명히 말한다.
그분은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던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셨다. 그것을 제하여 버리셨다. 십자가에 못 박으셨다. 그리고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의 빚을 지우셨다.
우리를 정죄하던 증서를 십자가에 못 박으셨다.
그리고 어둠의 권세들을 무력화하셨다.
그러므로 찬양의 능력은 음악적 완성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찬양의 능력은 십자가의 승리를 선포하는 데서 나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기셨기 때문에, 성도의 찬양은 승리의 선언이 된다.
사이렌의 노래와 오르페우스의 노래
이 주제는 그리스 신화 속에서도 흥미롭게 나타난다.
호메로스의 이야기에는 사이렌이 등장한다. 사이렌은 아름다운 노래로 뱃사람들을 유혹해 죽음으로 이끄는 존재다. 그들의 노래는 아름답지만, 그 아름다움의 끝에는 파멸이 있다.
스타벅스 로고에 등장하는 인어 형상의 이미지도 이 사이렌 전승과 연결되어 있다.
오디세우스는 사이렌의 노래를 듣고 싶었다. 그러나 죽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는 부하들의 귀를 밀랍으로 막게 하고, 자신은 돛대에 몸을 묶었다. 유혹의 노래를 들으면서도 몸이 묶여 있었기 때문에 죽음으로 끌려가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또 다른 이야기에는 오르페우스가 등장한다.
오르페우스는 더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함으로써 사이렌의 노래를 압도한다. 거짓된 유혹의 노래를 이기는 방법은 단지 귀를 막는 것만이 아니었다. 더 강하고 더 아름다운 노래가 필요했다.
이것은 영적으로도 중요한 통찰을 준다.
세상의 노래가 사람의 영혼을 사로잡는 시대에 교회는 단지 “듣지 마라”라고만 말해서는 안 된다. 물론 분별해야 한다. 그러나 더 나아가 교회는 더 강력한 찬양, 더 깊은 예배, 더 아름다운 복음의 노래를 회복해야 한다.
어둠의 노래를 이기는 것은 침묵만이 아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새 노래다.
새 노래를 부를 백성
이사야 43장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하나님은 광야에 길을 내시는 분이다.
사막에 강을 내시는 분이다.
막힌 곳에 길을 만드시고, 마른 곳에 물을 흐르게 하시는 분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목적은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려는 데 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찬양하는 존재다. 문제는 찬양하느냐 하지 않느냐가 아니다. 누구를 찬양하느냐이다.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으면 인간은 반드시 다른 것을 찬양한다. 돈을 찬양하고, 성공을 찬양하고, 스타를 찬양하고, 자기 자신을 찬양한다.
결국 영적 전쟁의 핵심은 예배의 대상에 있다.
누가 우리의 마음을 차지하는가.
누가 우리의 노래를 받는가.
누가 우리의 열광과 사랑과 헌신을 받는가.
이것이 영적 전쟁의 본질이다.
음악을 분별하고 찬양을 회복하라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단순한 애니메이션으로만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시대의 표적을 분별하는 눈으로 보면, 이 작품은 오늘날 음악과 영혼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노래가 사람을 살릴 수도 있다.
노래가 사람을 사로잡을 수도 있다.
음악이 예배가 될 수도 있고, 우상숭배의 통로가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대중음악을 무조건 정죄하는 태도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동시에 아무 분별 없이 받아들이는 태도도 위험하다.
중요한 것은 영적 분별이다.
이 음악이 내 영혼을 어디로 이끄는가.
이 가사가 내 마음에 어떤 갈망을 심는가.
이 리듬과 분위기가 내 안에 어떤 정서를 반복적으로 형성하는가.
이 스타와 팬덤 문화가 나를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게 하는가, 아니면 다른 대상을 우상화하게 하는가.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교회가 찬양의 능력을 회복하는 것이다.
세상의 음악이 점점 더 강력한 방식으로 사람들의 감정과 정체성을 사로잡는 시대라면, 교회는 더 깊은 예배와 더 순전한 찬양을 회복해야 한다. 하나님을 향한 새 노래가 다시 성도들의 입술에서 터져 나와야 한다.
시대의 표적 앞에서 깨어 있으라
예수님은 천기는 분별하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하지 못하는 세대를 책망하셨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문화 현상을 단순한 유행으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그 안에 흐르는 영적 메시지를 분별해야 한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세계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는 사실은 단순히 한국 문화의 성공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음악, 아이돌, 영혼, 악령, 전쟁, 찬양이라는 주제가 전 세계인의 상상력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뜻이다.
이 시대가 알든 모르든, 영적 세계에 대한 감각을 다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는 더 깨어 있어야 한다.
세상의 노래가 영혼을 사로잡는 시대에, 우리는 하나님의 새 노래를 불러야 한다. 어둠의 권세가 사람들의 마음을 유혹하는 시대에, 우리는 십자가의 승리를 선포해야 한다. 아이돌이 우상이 되는 시대에,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이 찬양받으실 분임을 증거해야 한다.
아무도 가치 없는 것을 위조하지 않는다.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를 정교하게 위조하는 사람은 없다. 위조지폐가 존재하는 이유는 진짜 지폐가 있기 때문이다. 가짜 명품이 만들어지는 이유는 진짜 명품이 있기 때문이다. 가짜 메시아가 등장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참 메시아가 계시기 때문이다.
성경은 역사의 마지막에 한 악한 존재가 등장할 것을 여러 차례 말한다. 다니엘서는 그를 말하고, 복음서는 그를 암시하며, 바울서신은 그를 설명하고, 요한계시록은 그를 마지막 무대 위에 세운다. 성경은 그를 적그리스도라고 부른다.
적그리스도. 헬라어로는 안티크리스토스다.
‘안티’라는 말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대적한다는 뜻이다. 다른 하나는 대신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보통 첫 번째 뜻에 익숙하다. 적그리스도는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존재다. 맞다. 그는 그리스도를 대적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는 그리스도를 대신하려는 존재이기도 하다.
이것이 더 무섭다.
그는 완전히 낯선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누구나 보자마자 “저 사람은 악하다”고 말할 수 있는 모습으로만 오지 않는다. 그는 어느 정도 그리스도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온다. 메시아처럼 보이고, 구원자처럼 보이고, 세상의 문제를 해결할 사람처럼 보인다. 사람들은 그를 보고 안심할 것이다. 마치 오래 기다린 사람이 마침내 도착한 것처럼 느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참 메시아가 아니다. 그는 가짜다.
자기 땅에 오신 참 메시아
요한복음 1장 11절은 이렇게 말한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이 한 문장은 조용하지만, 그 안에는 깊은 슬픔이 흐른다.
예수님은 자기 땅에 오셨다. 자기 백성에게 오셨다. 자기 집에 돌아온 주인처럼 오셨다. 그러나 그 집의 사람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다. 문은 열리지 않았다. 식탁은 차려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분은 낯선 사람처럼 취급받으셨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메시아로 오셨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된 분으로 오셨다.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다. 선지자들이 기다리던 분으로 오셨다. 그러므로 예수님 자신도 유대인으로 태어나셨다. 그분의 족보는 이스라엘의 역사 속으로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그런데 자기 백성은 그분을 영접하지 않았다.
이것은 단순한 역사적 비극이 아니다. 이것은 앞으로 일어날 더 큰 미혹의 그림자이기도 하다. 참 메시아를 거절한 자들이, 언젠가 가짜 메시아를 받아들이게 될 것이라는 어두운 예고다.
다른 이름으로 오는 자
예수님은 요한복음 5장 4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하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참 이상한 말씀이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셨다. 그러나 사람들은 영접하지 않았다. 그런데 다른 자가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할 것이라고 하신다.
여기서 “다른 자”는 누구인가?
그는 그리스도를 대신해서 오는 자다. 참 메시아가 거절당한 자리에 들어오는 가짜 메시아다. 자기 이름으로 오는 자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지 않고, 자기 이름으로 온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영광을 취한다. 십자가의 길이 아니라 자기 높임의 길을 간다.
성경은 “다른”이라는 말을 여러 방식으로 사용한다. 헬라어에는 헤테로스가 있고 알로스가 있다. 헤테로스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을 말한다. 완전히 다른 종류다. 반면 알로스는 같은 종류 안에서 다른 것을 말한다. 모양은 다르지만 본질적으로 유사한 범주 안에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다른 자”는 전혀 무관한 어떤 이방의 괴물이 아니다. 그는 메시아적 기대 안으로 들어오는 존재다. 그리스도와 비슷한 옷을 입고, 그리스도와 비슷한 말투를 흉내 내며, 그리스도와 비슷한 자리에 앉으려는 존재다.
다니엘서 11장은 마지막 때 등장할 악한 왕을 말한다. 그는 자기 마음대로 행한다. 스스로를 높인다. 모든 신보다 자신을 크게 여긴다. 신들의 신을 대적하는 비상한 말을 한다. 그리고 다니엘서는 그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가 모든 것보다 스스로 크다 하고 그의 조상들의 신들과 여자들이 흠모하는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며 어떤 신도 돌아보지 아니하고.”
여기서 눈에 들어오는 표현이 있다.
“그의 조상들의 신들”이다.
이 말은 가볍지 않다.
히브리어 표현으로 보면, 단순히 이방의 여러 신들을 말하는 것 이상으로 읽힐 수 있다. 이 표현은 히브리어로 엘로헤이, 곧 엘로힘과 같은 계열의 단어를 사용한다.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이라는 의미로 볼 수 있다.
만일 이 인물이 이방인이라면 “그의 조상들의 신들”이라는 표현이 일반적인 다신교적 신들을 가리킬 수도 있다. 그러나 다니엘서의 문맥과 마지막 때의 메시아적 흉내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 표현은 유대인의 조상들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악한 왕은 유대인의 혈통과 연결된 인물로 볼 수 있다.
그 왕은 자기 조상들의 하나님을 돌아보지 않는다.
또한 “여자들이 흠모하는 것”도 돌아보지 않는다. 이 표현은 창세기 3장 15절의 여자의 후손, 곧 메시아의 약속과 연결해서 볼 수 있다.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참 메시아에 대한 오래된 기다림, 그 갈망마저도 그는 돌아보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다. 메시아를 기다리지 않는다. 어떤 신도 돌아보지 않는다. 그는 자기 자신을 가장 높은 자리에 올려놓는다.
이것이 적그리스도의 영이다.
그는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의 폭군으로만 등장하지 않을 수 있다. 오히려 조상들의 하나님을 알 만한 배경을 가진 자, 메시아적 언어를 사용할 줄 아는 자, 유대인의 기대를 이용할 수 있는 자로 등장할 가능성이 있다.
단 지파라는 어두운 그림자
유대인들은 자신의 지파에 대한 의식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바울도 빌립보서 3장에서 자신이 베냐민 지파라고 말한다. 혈통과 지파는 단순한 행정적 분류가 아니었다. 그것은 정체성이고 기억이며 언약의 자리였다.
그렇다면 적그리스도가 유대인 가운데서 등장한다면, 그는 어떤 지파에서 나올 것인가?
오래전부터 교회가 주목해 온 지파가 있다. 단 지파다.
창세기 49장에서 야곱은 죽기 전에 아들들을 불러 예언한다. 그중 단에 대한 예언은 유난히 어둡고 의미심장하다.
“단은 이스라엘의 한 지파 같이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로다. 단은 길섶의 뱀이요 샛길의 독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 자를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
단은 이스라엘의 한 지파다. 바깥에서 온 적이 아니다. 내부에 있다. 그런데 그가 그의 백성을 심판한다. 내부에서 백성을 흔드는 자처럼 묘사된다.
더구나 단은 뱀이다. 길섶의 뱀이요 샛길의 독사다. 성경에서 뱀은 단순한 동물이 아니다. 창세기 3장의 뱀은 인간을 미혹했다. 요한계시록은 옛 뱀을 마귀요 사탄이라고 부른다. 뱀은 미혹과 배반과 사탄적 지혜의 상징이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 자를 뒤로 떨어지게 한다”는 말도 의미심장하다. 창세기 3장 15절에서 하나님은 뱀이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발꿈치를 무는 것. 뒤에서 넘어뜨리는 것. 배반과 기습의 이미지가 거기 있다.
야곱은 이 예언을 말하다가 갑자기 이렇게 고백한다.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
마치 어두운 밤길을 걷다가 멀리서 무엇인가를 본 사람처럼, 야곱은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린다고 말한다. 단 지파와 관련된 어떤 깊은 어둠을 본 것처럼 보인다.
우상숭배의 통로가 된 단
사사기 18장을 보면 단 지파의 어두운 역사가 나타난다. 단 지파 사람들은 라이스로 올라가 그곳을 점령하고 정착한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미가의 집에 있던 우상과 제사장을 가져간다. 그리고 자신들의 땅에 우상숭배의 체계를 세운다.
이후 북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단은 우상숭배의 중요한 중심지가 된다. 여로보암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는 벧엘에, 하나는 단에 세운다. 단은 북이스라엘의 우상숭배가 퍼져 나가는 문이 된다.
단은 이스라엘 안에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하나님께로 이끄는 통로가 아니라 우상숭배로 이끄는 통로가 되었다. 내부에 있으면서 백성을 어둠으로 이끄는 지파가 된 것이다.
이 모습은 마지막 때 이스라엘 내부에서 등장해 백성을 미혹할 적그리스도의 그림자처럼 보인다.
요한계시록의 침묵
요한계시록 7장에는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 인침을 받은 14만 4천 명이 나온다. 각 지파에서 1만 2천 명씩 인침을 받는다. 그런데 그 명단을 읽다 보면 이상한 점이 있다.
단 지파가 빠져 있다.
대신 요셉과 므낫세가 들어간다. 에브라임은 요셉의 유업을 대표하는 지파로 볼 수 있고, 므낫세가 따로 언급된다. 그러나 단은 없다.
성경은 왜 단이 빠졌는지 직접 설명하지 않는다. 침묵한다. 그러나 성경의 침묵이 때로는 말보다 더 크게 들릴 때가 있다. 많은 초기 교회 해석자들은 이 침묵을 주목했다. 단 지파가 마지막 때 인침 받은 지파 명단에서 빠진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본 것이다.
그들은 창세기 49장의 단 예언, 사사기 18장의 우상숭배, 요한계시록 7장의 단 지파 누락을 함께 보았다. 그리고 적그리스도가 단 지파에서 나올 수 있다는 해석을 제시했다.
이것을 절대적인 교리로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매우 오래된 해석이며, 결코 가볍게 지나칠 수 없는 성경적 단서이다.
초기 교회가 보았던 것
이 가르침은 초기 교회 안에서 상당히 널리 알려져 있었다. 2세기의 변증가 이레니우스는 적그리스도와 단 지파의 관련성을 언급했다. 그의 영향을 받은 히폴리투스도 이 견해를 발전시켰다. 히폴리투스는 초기 교회에서 적그리스도 연구와 관련해 중요한 인물이었다. 이후 암브로시우스와 같은 교부들의 흐름 속에서도 이 주제는 계속 언급되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 가르침은 점점 희미해졌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4세기에 기독교는 거대한 전환을 맞이한다.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가 공인되었고, 380년에는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었으며, 391년에는 이방 종교가 금지되었다. 박해받던 교회가 제국의 중심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 과정에서 로마 제국과 결합한 기독교 체제가 형성되었다. 이것이 훗날 로마 가톨릭 체제로 발전했다.
문제는 요한계시록의 상징들이 로마 제국과 너무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요한계시록 13장은 짐승과 거짓 선지자를 말하고, 요한계시록 17장과 18장은 바벨론 음녀와 세상 권세의 결탁을 말한다. 종교개혁 시대의 많은 개혁자들은 이러한 본문을 로마 가톨릭, 특히 교황 체제와 연결해서 해석했다.
그러나 로마 제국과 결합한 교회는 그런 해석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자신들이 서 있는 체제 자체가 계시록의 심판 구조와 연결될 수 있다는 해석은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그래서 점차 요한계시록은 상징적으로만 읽히기 시작했고, 적그리스도에 대한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해석도 약화되었다.
그 과정에서 적그리스도가 유대인, 특히 단 지파에서 나올 수 있다는 초기 교회의 해석도 점점 뒤로 밀려나게 되었다.
그러나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 상황은 다시 바뀌었다. 많은 종교개혁자들은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의 체계를 로마 가톨릭, 특히 교황 제도와 연결해서 보았다. 이후 근대와 현대의 성경 교사들 가운데서도 적그리스도가 유대인 가운데서 등장할 것이라고 본 이들이 있었다. 아더 핑크와 찰스 라이리 같은 이들이 그러한 흐름 속에 있다.
세부적인 해석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큰 흐름은 분명하다. 적그리스도는 단순히 교회 밖에서, 기독교와 전혀 무관한 방식으로만 등장하지 않는다. 그는 참 메시아를 흉내 낸다. 그는 그리스도를 대신하려 한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메시아로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그들의 기대와 가까운 자리에서 등장할 가능성이 있다.
위조품은 진짜를 가리기 위해 존재한다
적그리스도는 위조품이다. 가짜 메시아다.
그러나 위조품이 있다는 것은 진짜가 있다는 뜻이다. 가짜가 존재한다는 것은 진짜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다. 사탄은 가치 없는 것을 위조하지 않는다. 참 메시아가 계시기 때문에 가짜 메시아를 만든다.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이시기 때문에 적그리스도는 그 생명을 가리려 한다.
가짜의 목적은 단순하다. 진짜를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 대신 다른 이름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다. 십자가 대신 영광을, 회개 대신 번영을, 순종 대신 자기실현을, 하나님 나라 대신 인간 왕국을 붙들게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4장에서 말씀하셨다.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마지막 때의 핵심은 미혹이다. 미혹은 대개 노골적인 거짓말로 오지 않는다. 미혹은 진실과 비슷한 얼굴을 하고 온다. 익숙한 단어를 사용한다. 성경적인 표현을 빌린다. 메시아적 기대를 이용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속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짜를 분별해야 한다.
그러나 가짜를 분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가짜를 끝없이 연구하는 것이 아니다. 진짜를 깊이 아는 것이다.
진짜를 만져 본 사람은 가짜를 안다
위조지폐 감별사들은 가짜 지폐만 연구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들은 진짜 지폐를 반복해서 본다. 만진다. 빛에 비추어 본다. 질감을 익힌다. 냄새와 무게와 촉감을 기억한다. 진짜에 익숙해진 사람은 가짜를 만났을 때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을 안다.
영적인 분별도 그렇다.
적그리스도를 분별하려면 그리스도를 알아야 한다. 가짜 메시아를 분별하려면 참 메시아를 깊이 알아야 한다. 예수님의 음성에 익숙해야 한다. 예수님의 성품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의 길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마음 깊이 새겨야 한다.
요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성경을 연구하면서도 예수님께 오지 않을 수 있다. 이것은 무서운 말씀이다. 성경을 읽지만 주님을 모를 수 있다. 교리를 알고, 예언을 알고, 마지막 때의 시나리오를 알고, 적그리스도에 대해 말할 수 있지만, 정작 예수께 가까이 가지 않을 수 있다.
그러면 위험하다.
성경은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책이다. 율법도 그리스도를 향하고, 선지서도 그리스도를 향하고, 시편도 그리스도를 향하고, 복음서와 서신서와 요한계시록도 그리스도를 향한다. 적그리스도에 대한 연구도 결국 그리스도를 더 선명하게 보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가짜를 폭로하는 목적은 진짜를 사랑하기 위해서다.
예수를 바라보는 사람
히브리서 12장 2절은 말한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결국 우리의 시선은 예수께 머물러야 한다.
적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아는 것은 중요하다. 마지막 때의 미혹을 분별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의 중심은 적그리스도가 아니다. 우리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다.
예수님은 참 메시아이시다. 유대인의 메시아로 오셨지만, 동시에 온 세상의 구원자로 오셨다. 자기 백성에게 거절당하셨지만, 그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적그리스도는 자기 이름으로 온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셨다.
적그리스도는 자기를 높인다. 예수님은 자기를 낮추셨다.
적그리스도는 십자가 없는 영광을 약속한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부활의 영광으로 들어가셨다.
적그리스도는 사람들을 미혹하여 자기에게 속하게 한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생명으로 인도하신다.
가짜 메시아는 지배한다.
참 메시아는 구원한다.
가짜 메시아는 사람을 자기 왕국의 재료로 삼는다.
참 메시아는 자기 생명을 주어 사람을 살린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를 바라보아야 한다. 성경을 읽을 때 예수를 만나야 한다. 예언을 연구할 때도 예수께 더 가까이 가야 한다. 마지막 때를 말할 때 두려움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참 메시아이신 예수께 더 깊이 뿌리내려야 한다.
가짜 메시아의 시대에 참 메시아를 붙들라
마지막 때에는 많은 미혹이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빌려 등장할 것이다. 많은 사람이 자신을 구원자처럼 포장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적그리스도가 등장할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를 대적하면서도 그리스도를 대신하려 할 것이다.
그는 유대인들이 영접할 수 있는 모습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 유대적 배경을 가지고, 메시아적 기대를 이용하며, 참 메시아 대신 자신을 세우려 할 것이다. 다니엘서의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창세기 49장의 단 지파 예언, 요한계시록 7장에서 단 지파가 빠진 점, 초기 교회의 해석 전통은 모두 이 가능성을 생각하게 만든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면 안 된다.
적그리스도 연구의 끝은 적그리스도가 아니다. 그 끝은 예수 그리스도다. 가짜에 대해 말하는 이유는 진짜를 더 분명히 보기 위해서다. 어둠을 말하는 이유는 빛을 붙들기 위해서다. 미혹을 경고하는 이유는 진리를 사랑하기 위해서다.
가짜가 있다는 것은 진짜가 있다는 뜻이다.
적그리스도가 있다는 것은 참 그리스도께서 계시다는 뜻이다.
미혹이 강해진다는 것은 우리가 더욱 진리에 뿌리내려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알아야 한다. 성경을 단지 교리적으로만 읽지 말고, 그 안에서 그리스도를 만나야 한다. 예수님의 성품과 길과 십자가와 부활에 익숙해져야 한다. 그래야 가짜가 등장할 때 흔들리지 않는다.
이스라엘을 사랑하게 되는 길은 대개 조용한 깨달음에서 시작된다.
처음에는 성경을 읽다가 막히는 지점이 생긴다. 로마서 9장에서 11장까지를 읽는데, 마음 한쪽에서 질문이 생긴다. 정말 교회가 이스라엘을 완전히 대신한 것인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언약은 모두 과거의 이야기가 되었는가. 이스라엘은 더 이상 하나님의 구속사 안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지 않는가.
오랫동안 그렇게 배워 왔던 사람도 있다. 교회가 이스라엘을 대신했다는 대체신학의 틀 안에서 성경을 읽어 온 사람도 있다. 그런데 어느 날 책을 통해, 강의를 통해, 혹은 성령님의 직접적인 조명 속에서 그 생각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아니다.
이스라엘은 여전히 이스라엘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언약을 잊지 않으신다.
유대인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구속사 안에서 중요한 자리에 있다.
그 깨달음이 마음에 들어오면, 사람은 이스라엘을 새롭게 보게 된다. 뉴스 속의 한 나라로만 보던 이스라엘이 성경의 언약과 연결되어 보이기 시작한다. 유대인들을 위해 기도하게 되고, 이스라엘의 회복을 사모하게 되고, 기회가 되면 그들을 섬기고 싶어진다.
그 자체는 귀한 일이다.
교회는 이스라엘을 멸시해서는 안 된다. 유대인을 향한 하나님의 언약을 가볍게 여겨서도 안 된다. 반유대주의는 결코 성경적인 태도가 아니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 11장에서 이방인 신자들에게 경고한다. 원가지 앞에서 자랑하지 말라고.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라 뿌리가 너를 보전한다고.
그러나 이스라엘을 사랑하게 된 사람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빠지는 또 하나의 함정이 있다.
그것은 히브리적 뿌리라는 이름으로, 다시 율법적 짐 아래로 들어가는 것이다.
히브리적 뿌리를 찾는 마음
히브리적 뿌리, 영어로는 Hebrew Roots라고 부른다.
그 출발점은 나쁘지 않다. 예수님도 유대인이셨고, 사도들도 유대인이었다. 성경은 히브리적 배경 속에서 주어졌다. 구약성경은 말할 것도 없고, 신약성경 역시 유대적 세계관과 절기와 성전과 회당과 율법의 배경을 알 때 더 깊이 이해되는 부분이 많다.
그래서 성경을 더 깊이 연구하기 위해 히브리적 배경을 배우는 것은 좋은 일이다. 유월절의 의미를 알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더 깊이 보인다. 초막절을 알면 요한복음 7장의 예수님의 외침이 더 생생하게 들린다. 오순절을 알면 사도행전 2장의 성령강림이 더 놀랍게 다가온다.
문제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갈 때 생긴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1세기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안식일에도 회당에 갔고, 주일에도 모였다. 그러므로 우리도 히브리적 뿌리로 돌아가 토요일 안식일 예배와 주일 모임을 함께 가져야 한다.
또 이렇게 말한다.
1세기 메시아닉 유대인들은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뿐 아니라 무교절, 초실절, 나팔절, 속죄일을 포함한 절기들을 지켰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 절기들을 지켜야 한다.
처음에는 성경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한 배움처럼 시작된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것은 의무가 된다.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이 더 성경적이고, 절기를 지키는 사람이 더 영적이며, 코셔를 지키는 사람이 더 순전한 신앙으로 돌아간 사람처럼 여겨진다.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을 사랑하는 마음이 어느새 영적인 사대주의로 바뀐다.
유대적인 것은 더 원형에 가깝고, 이방인 교회는 뭔가 부족한 것처럼 느끼게 된다. 히브리어를 알면 더 깊은 신자가 되고, 절기를 지키면 더 온전한 신앙으로 들어간 것처럼 생각하게 된다. 심한 경우에는 유대인들을 공경한다는 이름으로 반유대인화되거나, 아예 할례를 받고 유대교로 개종하는 경우도 생긴다.
그리고 어떤 유대인 교사들은 이런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의 정서를 이용한다. 유대인 중심적인 가르침을 복음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올려놓고, 이방인 성도들에게 다시 짐을 지우려 한다.
이스라엘을 사랑하려다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자유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림자를 실체로 착각할 때
실제로 이런 가르침을 들은 적이 있다.
요한계시록 1장 10절에 보면 요한은 이렇게 말한다.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여기서 “주의 날”은 교회사적으로 주일, 곧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과 연결되어 이해되어 왔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사도행전에서 안식일은 그냥 안식일이라고 표현한다. 만약 요한이 안식일을 말하려 했다면, 당연히 안식일이라고 썼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1세기 말부터 “주의 날”이라는 표현은 주일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는 주후 110년경 “우리는 더 이상 안식일을 따라 살지 않고 주의 날을 따라 산다”는 취지의 말을 남겼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들은 요한계시록 1장 10절의 “주의 날”을 안식일로 가르친다. 이유는 분명하다. 모든 것의 중심에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히브리적 뿌리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방인 신자들은 그 유산을 존중해야 하고, 그 유산을 소유한 유대인들을 더 높이 존중해야 한다는 흐름으로 간다.
심지어 요한계시록 2장의 에베소 교회 말씀도 그렇게 해석하는 경우가 있다.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예수님께서 에베소 교회에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고 하신 말씀을, 히브리적 뿌리를 회복하라는 식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이것은 본문을 지나치게 끌고 가는 해석이다. 에베소 교회가 잃어버린 처음 사랑은 유대적 형식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다. 복음의 처음 감격이다. 주님을 향한 순전한 헌신이다.
성경의 그림자들은 중요하다. 절기, 안식일, 음식법, 성전 제도는 모두 의미가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실체를 가리키는 그림자다.
골로새서 2장 16절과 17절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몸은 실체를 말한다.
실체는 그리스도이시다.
그림자는 실체를 가리키기 위해 존재한다. 그림자를 연구할 수는 있다. 그림자 안에 담긴 의미를 배울 수는 있다. 그러나 실체가 오셨는데 그림자에 머무는 것은 하나님의 의도가 아니다.
절기는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안식일은 그리스도 안의 참된 안식을 가리킨다.
코셔와 정결법은 거룩함과 구별됨의 원리를 가리킨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의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림자가 아름답다고 해서 그림자를 붙들고 실체를 놓치면 안 된다.
이방인에게 지우지 말아야 할 짐
이 문제에 대해 사도들이 이미 한 번 결정한 적이 있다.
사도행전 15장이다.
초대교회 안에서 큰 논쟁이 일어났다.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기 시작하자, 어떤 사람들은 그들도 할례를 받고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이방인이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유대인처럼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 문제를 두고 예루살렘에서 중요한 회의가 열렸다. 사도들과 장로들이 모여 의논했다. 그리고 결론은 분명했다.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니,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 할지니라.”
여기서 중요한 표현은 이것이다.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니.”
이 결정은 입문자용 규칙이 아니다. 처음 믿는 이방인들에게 일단 가볍게 시작하게 하고, 나중에 신앙이 자라면 코셔도 지키고 안식일도 지키고 절기도 지켜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만일 안식일 준수와 절기 준수와 코셔가 모든 성도에게 필수였다면, 사도들이 이 가장 중요한 회의에서 그것을 언급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율법의 짐을 지우지 않았다.
성령과 사도들은 이방인 성도들에게 복음 안에서 필요한 기본적 기준을 제시했지만, 유대인으로 살아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았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유대인은 예수님을 믿어도 유대인이다. 그들에게는 아브라함의 혈통적 후손으로서 이어져 온 관습과 문화와 절기가 있다. 메시아닉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으면서 동시에 유대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절기를 지키고 율법적 관습을 따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이방인에게 강요하면 안 된다.
이것은 마치 한국인이 아프리카에 선교사로 가서 복음을 전한 뒤, “이제 너희도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니 설날에는 어른들에게 세배해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과 비슷하다. 세배는 한국 문화 안에서는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관습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복음의 일부처럼 만들고, 그렇게 해야 더 신령한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가르치면 잘못이다.
유대인의 절기와 관습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유대인에게는 자연스러운 유산일 수 있다. 그러나 이방인 그리스도인에게 그것을 필수로 요구하면 복음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다.
유대인처럼 될 수는 있어도 유대인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우리가 유대인처럼 행동하는 것은 어떠한가.
그것은 옳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9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바울은 율법 아래 있지 않았지만,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기 위해 율법 아래 있는 자처럼 되었다. 또한 율법 없는 자들을 얻기 위해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되었다. 이것은 복음을 위한 선교적 적응이다.
허드슨 테일러가 중국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중국인의 옷을 입고, 변발을 하고, 중국 음식을 먹었던 것과 같다. 그는 중국인이 되려 한 것이 아니라, 중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그들의 문화 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려면 유대인들의 언어와 문화와 절기와 정서를 이해해야 한다. 그들의 식탁에 앉고, 그들의 질문을 듣고, 그들의 역사적 상처를 존중해야 한다. 때로는 유대인처럼 행동할 수 있다.
그러나 이유가 중요하다.
그것은 복음을 전하기 위함이다.
그들을 얻기 위함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그들 곁에 서기 위함이다.
그러나 그것이 더 성경적이기 때문에, 더 영적이기 때문에, 더 높은 신앙이기 때문에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하면 위험하다.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유대인처럼 행동할 수는 있다.
그러나 유대인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유대인을 사랑해야 한다. 그러나 유대교로 돌아가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을 축복해야 한다. 그러나 이방인 그리스도인으로서 받은 복음의 자유를 버려서는 안 된다.
우리의 뿌리는 히브리적 뿌리보다 더 깊은 곳에 있다.
골로새서 2장 6절과 7절은 말한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우리의 궁극적인 뿌리는 유대교가 아니다.
히브리적 전통도 아니다.
우리의 최종적인 뿌리는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박아야 한다. 그 안에서 세움을 받아야 한다. 그 안에서 믿음에 굳게 서야 한다. 그리고 감사함을 넘치게 해야 한다.
히브리적 배경은 우리를 성경 이해의 풍성함으로 도울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생명이 될 수는 없다. 생명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
한 새 사람을 향하여
결국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이방인이 유대인처럼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한 새 사람이다.
에베소서 2장은 예수님께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막힌 담을 허무셨다고 말한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예수님은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다. 그리고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셨다. 십자가로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다.
한 새 사람은 유대인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방인만으로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한 새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아버지께 나아가는 것이다. 한 성령 안에서 함께 서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 새 사람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유대인은 유대인으로, 이방인은 이방인으로 서야 한다. 이방인 그리스도인이 메시아닉 유대인을 동경하여 유대인화되면, 오히려 한 새 사람은 왜곡된다.
하나님은 유대인을 없애고 이방인만 남기려 하신 것이 아니다. 또한 이방인을 유대인으로 바꾸어 하나 되게 하시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둘을 하나로 만드신다.
다름을 지운 하나가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화목하게 된 하나다.
이것이 복음의 영광이다.
우리는 이스라엘을 사랑해야 한다.
유대인을 축복해야 한다.
성경의 히브리적 배경도 배워야 한다.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은 히브리어에 있지 않다.
우리의 생명은 절기에 있지 않다.
우리의 능력은 안식일 준수에 있지 않다.
우리의 모든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림자를 연구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림자를 붙들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표지판 앞에 머무는 사람들이 아니다.
표지판이 가리키는 예수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이다.
마지막 시대 교회가 회복해야 할 것은 유대적 형식이 아니다.
첫사랑이다.
절기보다 그리스도.
안식일보다 그리스도.
히브리적 뿌리보다 그리스도.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아버지께 나아가는 한 새 사람의 영광을 붙드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이스라엘을 사랑하되, 그리스도를 중심에 두어야 한다.
유대인을 축복하되, 복음의 자유를 잃지 말아야 한다.
히브리적 뿌리를 배우되, 우리의 최종적인 뿌리가 그리스도이심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때 우리는 대체신학의 오류도 피하고, 히브리적 뿌리 운동의 함정도 피할 수 있다.
그리고 마침내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서는 복음의 아름다움을 보게 될 것이다.
세상은 어느 날 갑자기 바뀌지 않는다.
사람들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먼저 공기의 결이 달라진다. 창문은 그대로 있고, 길도 그대로 있고, 아침마다 마시는 커피의 온도도 크게 다르지 않은데,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은 예전과 다른 방식으로 말하고, 다른 방식으로 사고하고, 다른 방식으로 연결되기 시작한다.
시대의 변화는 처음에는 조용하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 변화는 거대한 물결이 되어 사람들의 삶 전체를 밀고 들어온다.
4차 산업혁명이라는 말도 그렇게 등장했다.
2016년 1월, 스위스 다보스 포럼에서 이 말이 공식적으로 언급되기 시작했다. 세계의 정치 지도자들, 경제인들, 학자들, 기술 전문가들이 눈 덮인 다보스에 모여 앞으로의 세계를 이야기했다. 인공지능, 빅데이터, 사물인터넷, 로봇, 블록체인, 초연결 사회. 그 말들은 아직 사람들에게 낯설었지만, 이미 미래는 그 단어들 안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두 달 뒤, 2016년 3월 한국에서 하나의 상징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국이었다.
바둑판은 작았다. 가로세로 19줄의 선이 교차하는 정사각형의 세계. 그러나 그 작은 판 위에서 인류는 자기 자신이 만든 지능과 마주 앉았다. 바둑돌 하나가 놓일 때마다 사람들은 묘한 긴장감을 느꼈다. 그것은 단순히 한 사람의 기사와 한 프로그램의 대결이 아니었다. 인간의 직관과 기계의 계산, 인간 문명의 오래된 자부심과 새로운 시대의 도래가 마주 앉은 장면이었다.
알파고가 이겼을 때, 사람들은 이상한 충격을 받았다.
기계가 계산을 잘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바둑은 달랐다. 바둑은 직관의 영역이고, 기세의 영역이고, 묘수의 영역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그곳에 인간만의 어떤 신비가 남아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그 신비의 방 안으로 인공지능이 조용히 들어왔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었다.
이제 세상은 이전과 같지 않을 것이라고.
4차 산업혁명은 단순한 기술의 변화가 아니다. 그것은 세상이 움직이는 방식의 변화다. 정보가 흐르는 방식, 돈이 움직이는 방식, 권력이 형성되는 방식, 사람들이 연결되는 방식이 바뀌는 것이다.
그리고 이 변화의 중심에 있는 중요한 단어 가운데 하나가 있다.
탈중앙화.
Decentralization.
무너진 금융 시스템과 새로운 길
4차 산업혁명의 한복판에 블록체인과 암호화폐가 있다.
그 이야기를 하려면 잠시 2007년과 2008년으로 돌아가야 한다. 미국에서 시작된 글로벌 금융위기의 시간이다. 그때 세계는 한 번 크게 흔들렸다. 너무 큰 건물이 무너질 때, 사람들은 처음에는 그 소리를 믿지 못한다. 마치 멀리서 천둥이 치는 줄 안다. 그러나 잠시 뒤 땅이 흔들리고, 먼지가 밀려오고, 사람들이 뛰기 시작하면 알게 된다. 무너진 것은 남의 건물이 아니었다는 것을.
2000년대 초반, 미국은 이미 깊은 불안 속에 있었다. 9·11 테러가 있었고,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이라크 전쟁이 이어졌다. 경제는 흔들렸고, 정부는 경기 부양을 위해 초저금리 정책을 펼쳤다.
금리가 낮아지자 사람들은 집을 사기 시작했다. 주택융자 금리가 내려갔기 때문이다. 이전 같으면 집을 살 수 없던 사람들도 대출을 받아 집을 샀다. 너도나도 집을 샀고, 집값은 계속 올랐다.
금융회사들도 계산기를 두드렸다. 부동산 가격이 계속 오른다면, 설령 어떤 사람이 대출금을 갚지 못하더라도 집을 팔면 손해 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고객들의 돈을 주택과 부동산 관련 상품에 엄청나게 투자했다.
한동안 모든 것이 잘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집값은 올랐고, 사람들은 부자가 된 것처럼 느꼈고, 금융회사들은 더 많은 상품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렇게 높이 쌓아 올린 집은 사실 모래 위에 세워져 있었다.
2004년 무렵, 초저금리 정책이 한계에 다다르기 시작했다. 금리는 다시 올라갔다. 주택융자 이자도 올라갔다. 그러자 가난한 대출자들이 이자를 감당하지 못하기 시작했다. 대출금을 갚지 못했고, 파산했다.
부동산 가격은 하락했다. 금융회사들은 대출금을 회수하지 못했다. 증권회사와 금융회사들이 연쇄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시작된 균열은 전 세계로 퍼졌다.
세계 경제는 하나의 거대한 유리병처럼 보였다. 멀리 떨어진 나라의 균열이 곧장 다른 나라의 균열로 이어졌다. 중앙집권화된 금융 시스템이 한 번 흔들리자, 사람들은 자신이 얼마나 그 시스템에 의존하고 있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때 사토시 나카모토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그 이름이 개인인지, 그룹인지, 실제 이름인지, 가명인지 우리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는 한 가지를 분명히 보았다. 중앙집권화된 금융 시스템이 무너지기 시작하면 얼마나 위험한가를 보았다.
은행과 정부와 거대한 금융기관이 모든 거래를 중개하고 통제하는 시스템. 사람들은 그 시스템을 믿고 살아왔다. 그러나 그 시스템이 흔들릴 때, 평범한 사람들의 삶도 함께 흔들렸다.
그래서 사토시 나카모토는 전혀 다른 방식의 거래를 상상했다.
중앙의 권위자가 없어도, 개인과 개인이 직접 안전하게 거래할 수 있는 시스템. 모든 거래 기록이 분산되어 저장되고, 참여자들이 함께 검증하는 구조. 누군가 하나의 중앙 서버를 장악한다고 해서 전체 시스템이 무너지지 않는 방식.
그것이 블록체인의 원리다.
쉽게 말하면, 모든 거래 장부를 한 곳에만 보관하지 않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같은 장부를 함께 가지고 있고, 새로운 거래가 생길 때마다 모두가 그것을 확인한다. 누군가 장부를 조작하려면 한 곳만 바꾸면 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장부를 동시에 바꾸어야 한다.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그 원리를 바탕으로 등장한 것이 비트코인이다.
비트코인은 단순한 가상화폐가 아니다. 그것은 한 시대의 질문에 대한 기술적 응답이었다. 중앙의 권력이 무너질 때 사람들은 어떻게 안전하게 연결될 수 있는가. 거대한 기관을 통하지 않고도 개인과 개인이 어떻게 신뢰를 만들 수 있는가.
이 질문은 단순히 경제의 문제가 아니다.
그 안에는 시대의 흐름이 담겨 있다.
탈중앙화.
중심에서 주변으로.
거대한 기관에서 개인으로.
소수의 통제에서 다수의 참여로.
탈중앙화와 영적 세계의 변화
4차 산업혁명의 키워드 가운데 하나가 탈중앙화라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영적인 세계에서도 비슷한 흐름을 생각하게 된다.
물론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의 기술 흐름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성령의 역사는 블록체인이나 인공지능을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종종 시대의 구조 속에서도 당신의 영적 경륜을 암시하신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변화가 영적 세계의 흐름을 비추는 그림자처럼 보일 때가 있다.
그동안 교회와 사역의 세계도 어느 정도 중앙집권적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몇몇 유명한 사역자들, 몇몇 큰 교회들, 몇몇 중심적인 단체들, 몇몇 두드러진 지도자들을 통해 영적 흐름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사람들은 이름 있는 사람을 찾아갔고, 큰 집회에 모였고, 유명한 강사의 메시지를 들으려고 했다.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들을 사용하지 않으셨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지난 시대에 놀라운 하나님의 사람들을 세우셨다. 빌리 그래함, 오럴 로버츠, 캐서린 쿨만, 데이비드 윌커슨, 존 윔버 같은 사람들. 그들은 자기 시대에 하나님께 쓰임 받은 거인들이었다.
그러나 마지막 때의 부흥은 다른 방식으로 오게 될 것이다.
그 부흥은 한두 명의 슈퍼스타를 중심으로만 움직이지 않는다. 한 사람의 이름, 한 사람의 얼굴, 한 사람의 플랫폼이 아니라, 수많은 이름 없는 사람들, 얼굴 없는 사람들, 조용히 준비된 사람들이 동시에 일어나는 방식으로 오게 될 것이다.
이것이 Nameless, Faceless Generation이다.
이름도 없고 얼굴도 없는 세대.
그들은 무명이라는 뜻에서 하찮은 사람들이 아니다. 얼굴이 없다는 뜻에서 정체성이 없는 사람들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자기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자기 얼굴을 앞세우지 않는 사람들이다. 사람들의 박수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더 갈망하는 사람들이다.
중심에 서려 하지 않지만, 하나님 나라의 중심을 붙드는 사람들.
유명해지려 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통로가 되는 사람들.
자기 왕국을 세우려 하지 않고, 오직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는 사람들.
이런 세대가 일어날 것이다.
폴 케인의 예언
폴 케인은 20세기 후반 은사주의와 예언 사역의 세계에서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의 삶에는 논란도 있었고, 인간적인 연약함도 있었다. 그러나 그를 통해 선포된 몇몇 예언적 메시지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오래 남았다.
1989년 2월, 그는 한 가지 중요한 환상을 보았다. 그리고 그 내용을 애너하임 빈야드교회가 주최한 컨퍼런스에서 나누었다.
그는 장차 nameless, faceless generation이 등장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본 그림은 거대했다.
스타디움이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그 중심에 특정한 한 사람의 이름이 높이 걸려 있지 않았다. 무대 위의 한 인물이 모든 영광을 받는 장면이 아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일어나고 있었다.
병원들이 텅텅 비게 될 것이라고 했다. 병든 자들이 치유되고, 심지어 죽은 자들이 살아나는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했다. 그것이 특정한 몇몇 사역자들의 손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평범한 성도들을 통해 일어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이 너무 놀라운 방식으로 나타나서, 각 나라의 수많은 미디어들이 그 일을 보도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세상 언론이 복음을 믿어서가 아니라, 일어난 일을 외면할 수 없기 때문에 보도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장면을 상상해 보면, 그것은 이상하면서도 가슴 뛰는 그림이다.
병원의 복도는 조용해지고, 휠체어는 빈 채 남겨지고, 스타디움에는 이름 모를 청년들과 어린이들과 노인들이 기도하고 있다. 마이크를 잡은 유명한 한 사람이 아니라, 곳곳에서 기도하는 무명의 사람들이 있다. 카메라는 누구의 얼굴을 클로즈업해야 할지 모른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너무 많은 사람들 위에 동시에 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nameless, faceless generation이다.
두 거인의 퇴장과 부흥의 전조
1989년, 베니 힌도 비슷한 맥락에서 예언적 메시지를 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두 영적인 거인, 오럴 로버츠와 빌리 그래함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장차 대부흥이 시작되는 전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오럴 로버츠는 2009년에 세상을 떠났다.
빌리 그래함은 2018년 2월 21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들은 각각 자기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오럴 로버츠는 치유와 믿음의 사역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쳤고, 빌리 그래함은 전 세계 복음전도 운동의 상징과 같은 사람이었다. 그들의 이름은 한 시대의 산맥처럼 서 있었다.
그러나 산맥도 어느 날 저녁빛 속으로 들어간다.
하나님은 한 시대의 거인들을 사용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거인들이 떠난 뒤에도 멈추지 않는다. 오히려 어떤 때에는 거인들의 퇴장이 다음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처럼 울릴 수 있다.
큰 나무가 쓰러지면 숲은 잠시 텅 빈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빈 공간으로 햇빛이 들어온다. 그 햇빛 아래에서 작은 나무들이 자라기 시작한다.
한두 사람의 거대한 사역자가 아니라, 수많은 이름 없는 사람들이 동시에 일어나는 시대. 어쩌면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를 위해 준비하시는 부흥은 그런 방식일 수 있다.
모든 육체에게 부어지는 성령
이것은 단순한 예언적 상상에만 머물지 않는다. 성경적 근거가 있다.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는 오순절 성령강림을 설명하며 요엘서의 예언을 인용한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여기서 중요한 표현은 모든 육체이다.
성령은 더 이상 특정한 왕, 특정한 선지자, 특정한 제사장에게만 임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영이 모든 육체에게 부어진다. 아들들과 딸들이 예언하고, 젊은이들이 환상을 보고, 늙은이들이 꿈을 꾼다. 남종과 여종에게도 하나님의 영이 부어진다.
이것은 영적 권위의 탈중앙화처럼 보인다.
물론 하나님은 여전히 질서의 하나님이시다. 교회에는 영적 권위와 질서가 필요하다. 그러나 성령의 부으심은 더 이상 소수의 특별한 사람에게만 제한되지 않는다.
모든 육체에게 부어진다.
아들들에게도, 딸들에게도.
젊은이들에게도, 노인들에게도.
남종에게도, 여종에게도.
마지막 때의 성령의 역사는 소수의 슈퍼 크리스천들을 통해서만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일어날 것이다.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은 과거의 놀라운 하나님의 사람들 이상의 사역을 감당하게 될 수 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의 레벨이 갑자기 상승하는 것이다.
그때에는 병을 고친다고 해서 반드시 두드러지는 사람이 되지 않을 것이다. 예언한다고 해서 특별한 사람이 되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그것이 한 사람의 이름을 스타처럼 만들지 않을 수 있다.
왜냐하면 거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사역하는 시대가 올 수 있기 때문이다.
세탁병이 장군이 되는 날
군대에는 보직이 많다. 전투병도 있고, 행정병도 있고, 취사병도 있고, 운전병도 있고, 세탁병도 있다.
언젠가 한 목사님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는 군대에서 세탁병이었다. 세탁병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대개 전쟁의 중심에 서 있는 사람을 떠올리지 않는다. 총을 들고 전방에 서 있는 것도 아니고, 작전을 지휘하는 것도 아니다. 세탁물을 모으고, 빨고, 말리고, 정리하는 일을 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별로 주목받지 못하는 자리다.
그러나 전쟁이 길어지면 모두가 알게 된다. 군대는 총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밥이 있어야 하고, 옷이 있어야 하고, 잠잘 곳이 있어야 하고, 상처를 싸매 줄 사람이 있어야 한다.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섬기는 사람들이 없으면, 전투병도 오래 싸울 수 없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그렇다.
마지막 때에는 무대 위의 몇몇 장군들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어린이, 청년, 노인, 평신도, 이름 없는 중보자, 조용히 섬기던 사람들,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장군들로 일어날 것이다.
세탁병처럼 보이던 사람이 영적 장군이 될 수 있다.
주방에서 섬기던 사람이 치유의 통로가 될 수 있다.
이름 없이 기도하던 노인이 부흥의 불씨가 될 수 있다.
어린아이의 기도가 한 도시의 어둠을 흔들 수 있다.
그날에는 수많은 nameless, faceless한 사역자들이 등장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 온 세상이 부흥의 불길로 휩싸이게 될 것이다.
신부의 영성
이 세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가서를 보아야 한다.
아가서는 단순한 사랑의 노래가 아니다. 그것은 신부의 영성을 보여 주는 책이다. 신랑을 갈망하는 신부, 신랑을 찾아 나서는 신부, 신랑과 더 깊은 사랑 안으로 들어가는 신부의 이야기다.
성경 전체를 길게 펼쳐 보면, 영원 과거에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사랑이 있었다. 삼위 하나님 안의 완전한 사랑과 교제가 있었다. 그런데 영원 미래에는 거기에 신부가 더해진다.
아버지, 아들, 성령, 그리고 신부.
요한계시록 22장 17절은 말한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마지막 장면에서 성령과 신부가 함께 말한다.
“오라.”
이것은 놀라운 말씀이다. 성령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신부도 함께 말한다. 성령과 신부가 한 음성으로 주님의 오심을 부른다.
마지막 때의 교회는 단순히 조직이나 기관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신부로 존재한다.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 신랑과 깊은 사랑 안에 들어간 신부, 신랑의 마음을 알고 신랑과 함께 “오라”고 외치는 신부다.
Nameless, faceless generation은 단순한 사역자 세대가 아니다. 그들은 신부 세대다.
자기 이름을 높이는 사람들이 아니라, 신랑의 이름을 높이는 사람들. 자기 얼굴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아니라, 신랑의 얼굴을 드러내는 사람들. 자기 사역을 세우는 사람들이 아니라, 신랑의 사랑 안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이다.
들로, 동네로 나아가는 신부
아가서 7장 10절에서 13절은 신부의 고백을 담고 있다.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도다. 그가 나를 사모하는구나.”
이 고백은 신부의 정체성이다. 신부는 자기 자신을 자기 소유로 보지 않는다. 그는 신랑에게 속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신랑이 자신을 사모한다는 것을 안다.
그 사랑을 알게 된 신부는 이제 신랑에게 말한다.
“내 사랑하는 자야 우리가 함께 들로 가서 동네에서 유숙하자.”
여기서 들은 광야이며, 시골이며, 메인 라인 바깥의 자리다.
이들은 중심부의 사람들이 아니다. 교단 중심, 유명인 중심, 사역의 크기로 사람을 평가하는 사람들도 아니다. 그들은 광야의 사람들이다. 예수님이 등장하시기 전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외쳤던 것처럼, 그들은 광야에서 준비되고 광야에서 사역하는 사람들이다.
광야는 이름이 사라지는 곳이다.
광야는 얼굴이 드러나지 않는 곳이다.
광야는 사람의 박수가 닿지 않는 곳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종종 광야에서 사람을 만드신다. 광야에서 세례 요한을 준비시키셨고, 광야에서 모세를 다루셨고,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훈련하셨다.
Nameless, faceless generation은 광야의 세대다.
그들은 화려한 중심부에서 만들어지지 않을 수 있다. 조용한 기도의 자리, 작은 공동체, 보이지 않는 순종,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섬김 속에서 준비될 것이다.
그런데 신부는 들로만 가자고 하지 않는다.
“동네에서 유숙하자”고 말한다.
동네는 함께 사는 곳이다. 고립된 개인들의 자리가 아니다. 관계와 일상과 공동체가 있는 곳이다. 이 세대는 혼자 잘난 영웅들이 아니다. 그들은 함께 사는 사람들이다. 함께 기도하고, 함께 울고, 함께 분별하고, 함께 움직이는 사람들이다.
요한복음 17장의 참된 연합은 바로 이런 사람들을 통해 풀리게 될 것이다.
이름 없는 사람들이지만 고립된 사람들이 아니다.
얼굴 없는 사람들이지만 무정체성의 군중이 아니다.
그들은 신랑에게 속한 신부이며, 서로 연결된 공동체다.
사랑 안에서 열매가 익어 간다
아가서 7장 12절과 13절은 계속 말한다.
“우리가 일찍이 일어나서 포도원으로 가서 포도 움이 돋았는지, 꽃술이 퍼졌는지, 석류 꽃이 피었는지 보자. 거기에서 내가 내 사랑을 네게 주리라.”
신부는 신랑과 함께 포도원으로 간다. 포도 움이 돋았는지, 꽃술이 퍼졌는지, 석류 꽃이 피었는지 본다. 이것은 열매의 언어다. 생명의 언어다. 사랑이 익어 가는 언어다.
마지막 때의 nameless, faceless generation은 단순히 능력 사역만 하는 세대가 아니다. 그들은 신랑과 더 깊은 사랑 안에 들어가는 세대다. 병을 고치고, 예언하고, 기적을 행하는 것보다 더 깊은 곳에서 신랑을 사랑하는 세대다.
그
들은 사역의 열매보다 신랑과의 사랑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왜냐하면 사역은 사랑에서 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사랑 없이 나타나는 능력은 결국 사람을 높이게 된다. 그러나 신랑과의 사랑 안에서 흘러나오는 능력은 오직 신랑의 영광을 드러낸다.
아가서 8장 5절에서 친구들은 말한다.
“그의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고 거친 들에서 올라오는 여자가 누구인가.”
이 장면은 참으로 아름답다.
거친 들에서 한 여자가 올라오고 있다. 그녀는 혼자 올라오지 않는다.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고 올라온다. 광야를 지나왔고, 거친 들을 지나왔지만, 그녀는 신랑에게 기대어 올라온다.
이것이 신부의 모습이다.
광야에서 만들어지고, 들에서 준비되고, 동네에서 연합하고, 신랑을 의지하여 올라오는 사람들.
그들이 마지막 때의 신부 세대다.
오순절 운동과 장차 나타날 이삭
R. T. 켄달은 1992년 10월, 런던 웸블리 컨퍼런스센터에서 열린 컨퍼런스 폐회 설교 중 매우 도전적인 메시지를 전했다.
그는 오순절 운동, 혹은 은사주의 운동을 이스마엘에 비유했다. 그리고 장차 이삭이 나타날 것이라고 말했다. 행 2장, 곧 요엘 2장의 예언이 온전히 성취될 날이 올 것이라고 말했다.
이 말은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적으로 들렸다.
왜냐하면 오순절 운동은 지난 100년 동안 엄청난 일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수억 명의 사람들이 이 운동을 통해 하나님 나라로 들어왔다. 성령의 은사와 능력, 방언, 치유, 예언, 선교적 열정이 전 세계로 퍼졌다. 그것은 분명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였다.
그 운동을 위해 평생을 바친 지도자들이 있었다. 그들의 눈물과 헌신과 수고가 있었다. 그래서 켄달의 메시지를 받아들인 사람도 있었지만, 받아들이기 어려워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 마음도 이해할 수 있다. 누군가 평생 섬겨 온 운동을 이스마엘이라고 부른다면, 마음이 아플 수밖에 없다.
그러나 켄달이 말하려 한 핵심은 오순절 운동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장차 더 온전한 성취, 더 깊은 성령의 부으심, 더 넓고 순전한 하나님의 역사가 올 것을 말하고 있었다.
이스마엘도 아브라함의 집에서 태어났다. 이스마엘에게도 하나님의 긍휼이 있었다. 그러나 약속의 아들은 이삭이었다.
지난 세기의 성령 운동은 놀라운 역사였다. 그러나 마지막 때에는 그것을 넘어서는 더 깊은 성령의 부으심이 올 수 있다. 소수의 능력 사역자 중심이 아니라, 모든 육체에게 부어지는 성령의 시대. 이름 없는 신부 세대가 일어나 온 세상을 흔드는 시대.
그것이 장차 나타날 이삭의 그림자일 수 있다.
해가 떠오르는 환상
아직 세상은 완전히 밝지 않았다. 새벽의 끝과 아침의 시작 사이, 하늘은 어둠을 조금씩 밀어내고 있었다. 멀리 수평선 너머에서 빛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희미한 선이었다. 아주 얇은 금빛 선. 그러나 그 선은 점점 넓어졌다. 어둠은 한 번에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빛이 올라오는 방향은 분명했다.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그 장면은 조용했다. 그러나 그 안에는 거부할 수 없는 힘이 있었다. 해가 떠오르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아무도 동쪽 하늘을 손으로 눌러 다시 어둡게 만들 수 없다. 빛은 자기 시간을 따라 올라온다.
하나님의 역사도 때로 그렇다.
오랫동안 준비된 일이 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라 온 씨앗들이 있다. 광야에서 만들어진 사람들이 있다. 이름 없이 기도한 사람들이 있다. 얼굴 없이 섬긴 사람들이 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보신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어느 순간 해가 떠오르듯, 그들이 일어난다.
큰 소리를 내며 등장하지 않을 수 있다. 자기 이름을 걸고 운동을 시작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성령께서 그들 위에 임하시면, 세상은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다.
이름 없이, 얼굴 없이, 그러나 영광으로
4차 산업혁명은 세상의 구조를 바꾸고 있다. 중앙에서 주변으로, 거대한 기관에서 개인으로, 소수의 통제에서 다수의 참여로 흐름이 이동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그보다 더 깊은 차원의 변화를 준비하고 있다.
소수의 유명한 사역자 중심에서, 수많은 성도들이 함께 일어나는 시대로.
무대 위의 한 사람 중심에서, 광야와 동네의 신부 공동체로.
이름과 얼굴을 앞세우는 사역에서, 오직 신랑의 이름과 얼굴을 드러내는 사역으로.
Nameless, faceless generation.
그들은 자기 이름을 지우는 사람들이 아니다.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참된 정체성을 발견한 사람들이다. 자기 얼굴을 감추는 사람들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만이 드러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스타가 되기를 거부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담는 그릇이 된다.
그들은 중심에 서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중심을 붙든다.
그들은 박수를 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늘의 증언을 받는다.
그날에는 어린아이도 예언할 것이다. 청년들은 환상을 볼 것이다. 노인들은 꿈을 꿀 것이다. 남종과 여종에게도 성령이 부어질 것이다. 평신도들이 장군처럼 일어날 것이다. 병원이 비고, 스타디움이 차고, 미디어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도하는 일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그 중심에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이름 하나가 높아지지 않을 것이다.
얼굴 하나가 영광을 독점하지 않을 것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오직 신랑.
오직 하나님의 영광.
성령과 신부가 함께 말할 것이다.
“오라.”
그리고 그 음성은 광야에서, 동네에서, 작은 기도실에서, 병실에서, 거리에서, 학교에서, 가정에서, 이름 없는 성도들의 입술에서 흘러나올 것이다.
해가 떠오르는 것처럼, 조용하지만 막을 수 없게.
그 세대가 오고 있다.
이름 없는 세대.
얼굴 없는 세대.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으로 빛나는 세대.
Nameless, Faceless Generation.
처음 창세기 1장을 펼칠 때, 우리는 아주 오래된 문 앞에 서는 느낌을 받는다.
그 문은 낡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오래되어 낡음이라는 말조차 어울리지 않는다. 시간보다 먼저 있었던 문, 인간의 질문보다 먼저 있었던 문이다. 그 문 앞에서 사람은 자연스럽게 조용해진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성경은 그렇게 시작한다.
이 문장은 짧다. 그러나 이 짧은 문장 안에는 인간이 평생 붙들고 씨름해도 다 풀 수 없는 깊이가 들어 있다. 하나님, 태초, 창조, 하늘과 땅. 이 네 개의 단어만으로도 우주 전체가 열린다. 아니, 우주보다 더 깊은 질문이 열린다.
나는 어디서 왔는가.
이 세계는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우주는 우연인가, 아니면 뜻이 있는가.
인간은 먼지의 우발적 배열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손길을 입은 존재인가.
요즘 교계와 학계에서 자주 논의되는 주제 가운데 하나가 창조과학과 유신진화론이다. 둘 다 창세기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하는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더 깊이 들어가면, 성경과 과학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창조과학은 대체로 하나님을 믿는 과학자들이 성경의 창조를 과학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에서 출발했다. 그 안에는 귀한 동기도 있다. 성경을 버리지 않으려는 마음, 하나님의 창조를 붙들려는 마음, 무신론적 세계관에 맞서려는 마음이 있다.
그러나 문제는 젊은 지구론이다. 지구의 역사를 6천 년에서 1만 년 정도로 보는 해석이다. 이 주장은 현대 천문학과 지질학, 물리학이 말하는 우주의 연대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현대 과학은 우주의 나이를 약 138억 년으로 보고, 지구의 나이를 약 45억 년에서 46억 년 정도로 본다.
이 차이는 작지 않다. 조금 다른 정도가 아니다. 바닷가에 서서 모래 한 줌의 수를 세는 것과 은하계의 별을 세는 것만큼이나 크다.
그래서 학계에서는 창조과학, 특별히 젊은 지구론을 과학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과학이라기보다 신앙적 주장이라고 본다. 과학의 언어를 사용하지만, 과학적 방법론으로 충분히 검증되고 설명되는 체계는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한쪽으로 쉽게 갈 수도 없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 가운데 약 백 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이 유신진화론이다. 무신진화론은 하나님 없이 진화가 모든 생명과 인간을 설명한다고 보는 입장이다. 반면 유신진화론은 하나님께서 진화의 과정을 사용하셔서 생명과 인간을 이끌어 오셨다고 본다.
이 입장은 창조과학의 난점을 피하려 한다. 현대 과학의 연구 결과를 받아들이면서도 하나님 신앙을 유지하려는 시도다. C. S. 루이스나 팀 켈러 같은 인물들도 넓은 의미에서 이 논의와 관련해 언급되곤 한다.
그러나 유신진화론에도 어려움이 있다. 이 입장에서는 창세기 1장부터 3장의 역사성이 약해지기 쉽다. 창조 기사는 실제 역사라기보다 신화적 언어, 상징적 이야기, 신학적 시라고 해석되는 경향이 강해진다. 그러다 보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선포는 남아 있지만, 그 창조의 구체성과 역사성은 점점 희미해진다.
성경은 말하고 있는데, 그 말이 마치 먼 안개 속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창조과학의 젊은 지구론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러나 유신진화론처럼 창세기 1장에서 3장을 신화나 상징으로 밀어 넣는 것도 받아들이기 어렵다. 과학을 무시할 수도 없고, 성경을 약화시킬 수도 없다.
그렇다면 성경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창세기 1장 1절과 2절 사이
창조과학은 대체로 창세기 1장 1절과 2절을 거의 바로 이어지는 사건으로 읽는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그리고 곧이어,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이렇게 읽으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고, 그 직후 땅이 혼돈하고 공허한 상태였으며, 이어지는 6일 창조를 통해 그 땅을 정돈하셨다고 이해하게 된다. 이 구조 안에서는 우주와 지구의 생성연대가 6천 년에서 1만 년 정도라는 설명으로 흐르기 쉽다.
그러나 과연 창세기 1장 1절과 2절은 그렇게 바로 이어지는 말씀인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1절과 2절 사이에는 우리가 쉽게 지나쳐 온 깊은 간격이 있다. 시간의 간격이고, 역사의 간격이며, 어떤 심판의 흔적이 놓여 있는 간격이다.
창세기 1장 1절은 하나님의 원초적 창조를 말한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하신 창조는 완전하고 질서 있으며 목적을 가진 창조다. 하나님은 혼돈의 하나님이 아니시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은 본래 무질서와 공허와 흑암의 덩어리가 아니다.
그런데 2절에 오면 전혀 다른 장면이 나타난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다. 흑암이 깊음 위에 있다. 수면 위에 하나님의 영이 운행하신다. 그 장면은 고요한 창조의 아침이라기보다, 무엇인가 무너진 뒤의 어두운 풍경처럼 보인다. 질서가 아니라 무질서가 있다. 충만함이 아니라 공허가 있다. 빛이 아니라 흑암이 있다.
히브리어로 혼돈은 토후이고, 공허는 보후다. 토후와 보후. 이 두 단어는 단순히 아직 정돈되지 않은 재료 상태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황폐함과 무질서와 비어 있음을 강하게 느끼게 한다.
이 지점에서 이사야 45장 18절을 보아야 한다.
“대저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을 창조하신 이 그는 하나님이시니 그가 땅을 지으시고 그것을 만드셨으며 그것을 견고하게 하시되 혼돈하게 창조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이 거주하게 그것을 지으셨으니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하나님은 땅을 혼돈하게 창조하지 않으셨다고 말씀하신다. 사람이 거주하도록 지으셨다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창세기 1장 2절의 혼돈과 공허는 하나님의 본래 창조 상태가 아니라, 그 이후 어떤 사건의 결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즉 1절과 2절 사이에는 어떤 일이 있었다.
성경은 그 간격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다. 그러나 완전히 침묵하지도 않는다. 성경의 다른 본문들은 그 사이에 있었을 법한 거대한 영적 사건의 그림자를 보여 준다.
“그리고”가 아니라 “그러나”의 느낌
히브리어 성경을 보면 창세기 1장 2절은 단순히 1절의 자연스러운 이어짐처럼만 보이지 않는다. 2절의 접속사는 “그리고”로 번역될 수 있지만, 문맥상 “그런데”, “그러나”의 뉘앙스를 가질 수 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그런데(그러나) 땅은 혼돈하고 공허하게 되었다.
이렇게 읽으면 본문의 분위기가 달라진다.
1절은 완전한 하나님의 창조를 말한다.
2절은 그 창조 세계가 어떤 이유로 황폐해진 상태를 보여 준다.
마치 잘 지어진 집이 있다. 견고하고 아름답게 지어진 집이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집에 다시 들어가 보니, 창문은 깨져 있고, 벽은 그을렸고, 가구는 뒤집혀 있고, 바닥에는 어둠과 먼지가 내려앉아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이 집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창세기 1장 2절도 그런 질문을 하게 만든다.
하나님께서 혼돈하게 창조하지 않으셨다면, 왜 땅은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는가.
인간 이전의 반역
성경은 인간이 창조되기 전에 이미 존재했던 피조물들에 대해 말한다. 천사들이다. 인간보다 먼저 창조된 영적 존재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천사들의 세계 안에서 어느 시점에 반역이 일어났다.
이사야 14장은 그 반역의 그림자를 보여 준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그 존재는 마음속으로 말했다.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이것이 사탄적 교만의 핵심이다.
피조물이 창조주의 자리에 앉으려 한다.
받은 영광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대신, 그 영광을 자기 것으로 삼으려 한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대신 자기 자신을 높이려 한다.
에스겔 28장도 두로 왕을 향한 예언의 배후에서 이와 비슷한 영적 그림자를 보여 준다. 완전한 아름다움, 지혜, 영광, 그리고 타락. 높은 곳에 있던 존재가 교만으로 인해 떨어지는 장면이다.
이 반역은 단순한 도덕적 실패가 아니다. 우주적 질서에 대한 반역이다.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경계를 허물려는 시도다. 하나님만이 앉으실 자리에 피조물이 앉으려 한 사건이다.
그 반역에 대해 하나님은 심판하셨다.
그리고 그 심판의 결과로 창세기 1장 2절의 상태가 되었다.
땅은 혼돈하고 공허하게 되었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가 불완전했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혼돈과 공허를 창조하셨다는 뜻도 아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 안에서 천사적 반역이 있었고, 그 반역에 대한 심판으로 땅이 황폐한 상태가 되었다는 뜻이다.
이렇게 보면 창세기 1장 1절과 2절 사이에는 엄청난 시간의 간격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간격 안에 현대 과학이 말하는 우주의 긴 역사, 지구의 오랜 연대가 자리하게 된다. 우주의 나이가 138억 년이고 지구의 나이가 45억 년에서 46억 년이라는 현대 천문학과 지질학의 설명이 사실이라고 해도, 그것은 창세기 1장의 본문과 반드시 충돌하지 않는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후 어떤 심판의 결과로 땅이 혼돈과 공허의 상태가 되었음을 암시한다. 이어지는 창조의 날들은 그 황폐한 땅을 하나님께서 다시 질서와 생명과 거주 가능한 세계로 회복하시는 장면으로 읽을 수 있다.
이렇게 읽으면 우리는 두 극단을 피할 수 있다.
하나는 과학적 증거를 무시한 채 지구의 역사를 무조건 6천 년에서 1만 년으로 제한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과학의 이름으로 창세기 1장에서 3장을 신화나 상징으로 밀어내는 것이다.
성경은 과학과 싸우는 책이 아니다. 그러나 과학에 의해 폐기될 책도 아니다.
성경과 과학이 다르게 보일 때
종종 성경과 과학의 증거가 서로 다른 말을 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그럴 때 어떤 사람들은 과학의 증거에 귀를 기울인다는 이유로 성경을 뒤로 밀어 둔다. 성경은 고대인의 신화적 세계관일 뿐이라고 말한다. 현대인은 이제 그것을 문자 그대로 믿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시편 12편 6절은 말한다.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
시편 119편 89절은 말한다.
“여호와여 주의 말씀은 영원히 하늘에 굳게 섰사오며.”
예수님도 마태복음 5장 18절에서 말씀하셨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하나님의 말씀은 일시적인 인간의 설명보다 깊다. 인간의 이론은 변한다. 과학의 모델도 발전하고 수정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선다.
그렇다고 과학을 무시하자는 말은 아니다.
과학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관찰하는 귀한 도구다. 우주의 질서, 물질의 구조, 생명의 복잡성, 지구의 역사, 별들의 움직임을 연구하는 일은 창조 세계를 들여다보는 일이다. 참된 과학은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계의 질서를 조심스럽게 읽어 가는 일이다.
문제는 과학 자체가 아니라, 과학을 무신론적 세계관 안에 가두는 태도다. 그리고 반대로, 성경을 믿는다고 하면서 성경 자체를 충분히 깊고 총체적으로 읽지 않는 태도도 문제다.
창조과학의 한계는 여기에 있다. 성경을 믿으려는 열심은 귀하다. 그러나 성경을 총체적으로, 자세히 살피지 못하면 본문이 실제로 열어 주는 가능성을 놓칠 수 있다. 창세기 1장 1절과 2절 사이에 무엇이 있었는지를 보지 못하면, 불필요하게 성경과 과학을 정면충돌시키게 된다.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으라
이사야 34장 16절은 말한다.
“너희는 여호와의 책에서 찾아 읽어보라.”
이 말씀은 단순히 성경을 대충 펴 보라는 말이 아니다.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으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는 빠진 것이 없고, 제 짝이 없는 것이 없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성령께서 그 말씀들을 모으셨다.
성경은 성경으로 풀어야 한다.
창세기 1장 2절의 혼돈을 이해하기 위해 이사야 45장을 보아야 한다. 사탄의 반역을 이해하기 위해 이사야 14장과 에스겔 28장을 함께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창조와 심판과 회복의 흐름을 성경 전체 안에서 보아야 한다.
성경은 단편적인 문장들의 모음이 아니다. 하나님의 큰 이야기다. 창조, 반역, 심판, 회복, 구속, 새 창조로 이어지는 거대한 이야기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조급하게 읽어서는 안 된다. 이미 가지고 있는 틀을 본문 위에 덮어 씌워서도 안 된다. 성경이 스스로 말하게 해야 한다.
베뢰아 사람들처럼
사도행전 17장에는 베뢰아 사람들이 나온다. 그들은 데살로니가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웠다. 그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았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다.
그들에게는 두 가지 태도가 있었다.
하나는 열린 마음이다.
또 하나는 자세히 살피는 마음이다.
열린 마음이 없으면 새로운 빛을 받을 수 없다. 이미 알고 있는 틀 안에 모든 것을 가두게 된다. 반대로 자세히 살피는 마음이 없으면 아무 것이나 받아들이게 된다. 감동적인 말, 새로워 보이는 주장, 그럴듯한 이론에 쉽게 흔들리게 된다.
베뢰아 사람들은 둘 다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마음을 열었다.
그러나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말씀을 받았다.
그러나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태도도 이것이다.
창조과학의 열심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유신진화론의 지적 조정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성경 앞에 다시 서야 한다. 열린 마음으로, 그러나 간절하고 치밀한 마음으로 서야 한다.
창세기 1장 1절과 2절 사이에 놓인 깊은 간격을 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혼돈하게 창조하지 않으셨다는 말씀을 들어야 한다. 천사적 반역과 심판의 가능성을 성경 전체의 빛 안에서 살펴야 한다. 그리고 과학이 말하는 우주의 긴 역사와 성경의 창조 신앙이 반드시 충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볼 수 있어야 한다.
태초의 문 앞에서
결국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성경을 지키기 위해 과학을 억지로 부정할 필요는 없다.
과학을 존중하기 위해 성경을 신화로 밀어낼 필요도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깊다. 인간이 서둘러 만든 해석보다 깊다. 과학의 잠정적 결론보다도 깊고, 신앙인의 조급한 방어 논리보다도 깊다.
창세기 1장 1절은 여전히 선포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그 말씀은 흔들리지 않는다. 우주가 몇 억 년인지, 몇십 억 년인지에 따라 약해지지 않는다. 지구의 지질학적 역사가 길다고 해서 그 말씀이 희미해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 긴 시간은 하나님의 창조의 광대함을 더 깊이 느끼게 한다. 별빛이 수십억 년의 거리를 건너 우리 눈에 도착할 때, 우리는 단지 과학적 거리만 보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창조가 얼마나 장엄한지를 본다.
그러나 성경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 창조 세계 안에 반역이 있었다. 심판이 있었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운행하셨다. 하나님은 황폐한 곳 위에 다시 임하셨다. 어둠 위에 빛을 명하셨다. 혼돈을 질서로, 공허를 충만으로, 흑암을 빛으로 바꾸기 시작하셨다.
이것이 창세기 1장의 위대한 메시지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다.
하나님은 심판자이시다.
하나님은 회복자이시다.
그분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다.
또한 무너진 곳에서 다시 질서를 세우신다.
혼돈 위에 말씀하시고, 공허 위에 생명을 불어넣으시며, 흑암 가운데 빛을 부르신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 1절과 2절은 단순히 우주의 기원을 설명하는 문장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보여 주는 첫 장면이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계셨다.
하나님은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무너진 것을 다시 붙드셨다.
하나님은 어둠 속에서도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 말씀은 지금도 유효하다.
우리의 삶이 혼돈하고 공허할 때,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 하나님의 영은 여전히 그 수면 위에 운행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빛이 있으라.
그때 빛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다시 읽어야 한다. 자세히 읽어야 한다. 총체적으로 읽어야 한다. 두려움이 아니라 믿음으로 읽어야 한다. 과학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더 깊이 신뢰하며 읽어야 한다.
창조과학이 놓친 것을 보고, 유신진화론이 약화시킨 것을 붙들어야 한다.
하나님은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은 영원히 하늘에 굳게 서 있다.
하늘은 오래전부터 사람에게 말을 걸어왔다.
비가 오기 전의 냄새, 바람의 방향, 구름의 두께, 저녁 무렵 서쪽 하늘에 번지는 붉은빛. 사람들은 그것을 보며 다음 날의 날씨를 짐작했다. 농부는 밭으로 나갈지 말지를 결정했고, 어부는 배를 띄울지 말지를 생각했다. 하늘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 같지만, 자세히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늘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6장에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그들은 하늘을 읽을 줄 알았다. 저녁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을 것을 알았고, 아침 하늘이 붉고 흐리면 날이 궂을 것을 알았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께서 그 시대 가운데 보내시는 영적 신호는 읽지 못했다. 그들은 하늘의 색은 알았지만, 역사의 색은 보지 못했다. 날씨는 예측했지만, 하나님이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신지는 알지 못했다.
시대의 표적이란 그런 것이다.
그것은 반드시 천둥소리처럼 크게 울리지 않는다. 때로는 한 영화 속에, 한 노래 속에, 한 세대가 열광하는 문화 현상 속에 스며든다. 사람들은 그것을 단순한 유행이라고 부른다. 흥행작이라고 부르고, 콘텐츠라고 부르고, 트렌드라고 부른다. 그러나 깨어 있는 사람은 그 표면 아래에서 다른 흐름을 본다. 그 시대의 갈망, 두려움, 상처, 부르심,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세대에 던지시는 질문을 본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그런 작품처럼 보인다.
처음에는 그저 독특한 애니메이션처럼 보인다. 케이팝과 귀신 사냥꾼, 아이돌과 악령, 한국 문화와 판타지가 묘하게 뒤섞인 작품처럼 보인다. 그러나 조금 더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여러 겹의 메시지가 들어 있다. 음악을 통한 영적 전쟁이 있고, 기독교 세계관을 넓히라는 도전이 있고, 죄와 귀신의 관계가 있고, 상처를 직면해야 자유할 수 있다는 메시지가 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야 한다.
왜 이 작품은 단순한 흥행작으로만 보이지 않는가.
왜 이것은 이 시대의 교회와 한국 교회, 그리고 한민족을 향한 어떤 표적처럼 느껴지는가.
왜 세계는 지금 한국을 바라보고 있는가.
말라기 4장 5절과 6절은 마지막 때를 향해 이렇게 말씀한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이 말씀은 마지막 때의 깊은 심장과 같다.
주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하나님은 엘리야의 영을 보내신다. 그리고 그 사역의 핵심은 마음을 돌이키는 것이다.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자녀의 마음을 아버지에게로 돌이키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가정 안에서 부모와 자녀가 화해하는 이야기만이 아니다. 물론 그것도 포함한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넓다. 세대와 세대의 연결, 유업과 부르심의 회복, 끊어진 관계의 회복, 흩어진 것들의 재결합, 하나님 나라 안에서 잃어버린 하나 됨을 다시 찾는 일이다.
이 말씀은 한국 교회의 연합, 남북한의 통일, 이슬람권을 향한 영적 돌파, 이스라엘의 회복까지 관통하는 마지막 때의 말씀으로 읽을 수 있다.
결국 이 말씀의 중심에는 하나의 단어가 있다.
연합.
하나 됨.
에하드.
오래전 마음에 들어온 말씀
어떤 말씀은 한 번 듣고 지나간다.
그러나 어떤 말씀은 마음속에 들어와 자리를 잡는다.
그 말씀은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다. 책장 속에 꽂아 둔 오래된 책처럼 조용히 거기 있다. 평소에는 잊고 사는 것 같지만, 어느 순간 삶의 중요한 장면 앞에서 다시 펼쳐진다.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2006년 봄, 연합에 대한 두 번째 계시가 임했다. 하나님께서 네트워커로 부르신다는 음성을 들었다. 사람과 사람, 교회와 교회, 세대와 세대, 민족과 민족을 잇는 부르심이었다. 그때부터 말라기 4장 5절과 6절은 단순한 성경 구절이 아니라 삶의 중심을 붙드는 말씀처럼 자리 잡았다.
그 말씀은 한 교회의 표어나 한 사역의 방향 정도로 느껴지지 않았다. 더 큰 그림이 있었다. 마지막 때 하나님의 큰 경륜 속에서 아버지와 자녀가 연결되고, 유업이 회복되고, 끊어진 세대가 다시 이어지고, 흩어진 것들이 다시 하나 되는 그림이었다.
그때 마음속에 한 가지 확신이 생겨났다.
전 세계에서 이 말씀을 가장 먼저 풀어낼 민족이 한국인일 수 있다.
세계는 한국의 다음 세대가 일어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 생각은 쉽게 설명되지 않았다. 그러나 마음 깊은 곳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마치 아직 도착하지 않은 편지를 미리 받은 사람처럼, 그 내용이 무엇인지 다 알 수는 없지만 그것이 언젠가 열릴 것이라는 감각이 있었다.
2014년, 콜투올 대회를 준비하기 위해 마크 앤더슨이 한국에 왔다. 콜투올은 전 세계 수백 개의 선교 사역들이 연결된 거대한 선교 네트워크였다. 온누리교회 선교센터에서 첫 프리미팅이 열렸다. 회의실 안에는 한국의 여러 사역자들이 모여 있었고, 공기 중에는 국제 선교 대회를 준비하는 긴장감과 기대감이 섞여 있었다.
마크 앤더슨은 먼저 콜투올의 역사를 이야기했다. 그가 걸어온 길, 하나님께서 열방 가운데 어떻게 선교 네트워크를 세워 오셨는지, 세계 곳곳에서 어떤 부르심들이 연결되고 있는지를 말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이야기의 중심이 말라기 4장 5절과 6절로 옮겨 갔다.
그는 2012년 9월에 이 말씀에 대한 분명한 계시를 받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전 세계에서 이 말씀을 가장 먼저 풀어내는 사람들이 한국인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의 다음 세대가 이 유업을 들고 일어나 전 세계를 깨우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 순간 오래전 마음속에 들어와 있던 말씀이 다시 불타올랐다.
어떤 말은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듣는다. 그날 그 말씀이 그랬다. 오래전부터 마음속에 감추어져 있던 불씨에 누군가 숨을 불어넣은 것 같았다.
그는 말을 마친 뒤 마이크를 나에게 넘겼고, 기도가 시작되었다. 기도가 끝난 뒤 자리로 돌아왔을 때, 눈물이 쏟아졌다. 그것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었다. 오래전부터 마음속에 주어졌던 부르심이 다시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하나님은 때로 사람의 삶 속에 같은 말씀을 여러 번 보내신다.
처음에는 씨앗으로, 그다음에는 싹으로, 또 어느 날에는 불길처럼 보내신다.
이제 세계가 한국으로 오고 있다
지금까지 한류는 대개 한국에서 세계로 나아가는 흐름이었다.
한국 드라마가 세계로 갔다. 한국 음악이 세계로 갔다. 한국 영화와 음식과 언어가 세계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한국은 작은 나라였지만, 그 작은 땅에서 나온 콘텐츠들은 점점 더 넓은 바다로 흘러갔다.
그러나 케이팝 데몬 헌터스를 기점으로 무언가 흐름이 바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전에는 한국이 세계로 나아갔다면, 이제는 세계가 한국으로 몰려오고 있다.
한류의 시작을 말할 때 많은 사람들이 겨울연가를 떠올린다. 배용준의 미소와 눈 내리는 길, 조용한 피아노 선율과 멜로드라마의 정서가 일본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사람들은 한국을 찾기 시작했다. “욘사마의 나라”를 보고 싶어 했다. 드라마 속 장소를 걷고 싶어 했고, 한국 음식을 먹고 싶어 했고, 한국 사람들의 감정과 사랑의 방식을 알고 싶어 했다.
비슷한 시기에 보아가 일본에서 활동했고, 대장금은 아시아권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동방신기, 슈퍼주니어, 빅뱅, 원더걸스가 등장하며 한류의 파도는 조금씩 커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외국에서는 이것을 Korean Wave라고 불렀다. 파도였다. 한국에서 출발해 다른 곳으로 밀려가는 파도.
그러다가 2012년,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세계를 뒤흔들었다. 사람들은 가사를 몰라도 말춤을 췄다. 언어가 장벽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모두가 보았다. 그 이듬해 BTS가 데뷔했고, 이후 블랙핑크가 세계 무대 위에서 폭발적인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영화 기생충, 드라마 오징어게임은 한국 콘텐츠가 더 이상 변방의 문화가 아니라 세계 문화의 중심으로 들어왔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런데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또 다른 차원의 분기점처럼 보인다.
이 작품은 한국을 단순히 배경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한국적인 것을 통째로 보여 준다. 남산과 낙산공원, 호랑이와 까치, 사우나, 한의원, 컵라면, 떡볶이, 오뎅, 김밥, 김밥 위에 뿌려진 깨, 자르지 않고 통째로 먹는 김밥, 새우깡 같은 한국 과자들, 티슈 위에 수저를 놓는 모습, 분식집의 초록색 플라스틱 접시까지 나온다.
그것들은 거창한 상징이 아니다. 너무 작고 사소해서 한국인들은 오히려 잘 의식하지 않는 것들이다. 하지만 바로 그 사소한 장면들이 세계인의 눈에는 낯설고 매력적인 풍경이 된다.
루미와 진우 사이의 절제된 감정선도 그렇다.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지만 깊이 흐르는 마음, 어색함 속의 배려, 농담과 민망함 사이에 놓인 따뜻한 온도. 그것은 한국인의 정서가 가진 미묘한 결을 보여 준다.
오래전, 1977년이나 1978년쯤의 어느 날을 떠올릴 수 있다. 고등학생이던 시절, AFKN 드라마를 보다가 미국 여자 배우가 머리를 감고 헤어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리는 장면을 본 적이 있었다. 그때 한국의 많은 집에서는 머리를 감은 뒤 수건을 쓰고 선풍기 앞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화면 속 미국인은 헤어드라이어를 들고 자연스럽게 머리를 말리고 있었다.
그 장면 하나가 이상하게 신기했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갑자기 특별한 세계처럼 느껴졌다.
지금은 반대의 일이 일어나고 있다.
전 세계 사람들이 케이팝 데몬 헌터스를 보며 한국을 그런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한국의 음식, 공간, 정서, 생활 방식, 언어, 유머, 관계의 감각을 신기하고 매력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것은 단순한 문화 현상이 아니다.
시대의 표적이다.
부흥을 넘어 한 나라의 변화로
부흥이라는 말은 뜨겁다.
트랜스포메이션이라는 말은 넓다.
우리는 이 두 단어를 때로는 비슷하게 사용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조금 다르다. 부흥은 주로 영적인 변화를 말한다.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고, 교회가 새로워지고, 기도와 예배가 회복되는 것이다. 죽어 있던 영혼들이 살아나고, 식어 있던 교회가 다시 불붙는 것이다.
반면 트랜스포메이션은 그보다 더 넓다. 영적 변화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예술, 일상의 모든 영역으로 흘러 들어가 한 나라 전체를 바꾸는 것이다. 부흥이 불이라면, 트랜스포메이션은 그 불이 들판 전체로 번져 생태계를 바꾸는 일이다.
20세기와 21세기에 들어 전 세계 곳곳에서 놀라운 부흥들이 있었다. 중국, 인도네시아, 브라질, 아르헨티나, 콜롬비아, 우간다, 나이지리아. 수많은 나라에서 사람들이 하나님께 돌아왔다. 교회가 성장했고, 기도 운동이 일어났고, 복음이 확산되었다.
그러나 그 부흥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총체적 변화로 이어져 한 나라 전체의 트랜스포메이션을 일으킨 사례는 많지 않다. 그중 매우 독특한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가난했던 1960년대와 1970년대가 있었다. 격변의 1980년대와 1990년대가 있었다. 그리고 2000년대 이후 눈부신 변화가 있었다. 흙먼지 날리던 거리와 연탄 냄새, 좁은 골목과 오래된 시장을 기억하는 세대에게 오늘의 한국은 때로 비현실적인 풍경처럼 보인다.
초고층 빌딩, 세계적인 기업, K-팝, K-드라마, K-푸드, 반도체, 자동차, 의료, 교육, 문화 콘텐츠. 이 모든 변화는 너무 빠르게 일어나서 때로는 꿈을 꾸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어떻게 이 나라가 이렇게 되었는가.
작고 작은 남쪽 땅. 전쟁의 폐허에서 시작한 나라. 실질적으로 전 세계 유일한 분단국가라 할 수 있는 나라. 그 땅에 하나님은 왜 이런 은총을 부어 주셨는가.
이것을 단순히 경제 정책이나 교육열이나 국민성만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물론 그런 요소들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섭리와 한민족의 영적 부르심이 있다.
셈의 장막과 오래된 노래
창세기 9장에는 노아의 세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이 등장한다.
그중 셈은 특별한 축복을 받는다. 노아는 말한다.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그리고 이어지는 축복 속에서 하나님께서 셈의 장막에 거하실 것을 말한다. 우리 말 성경은 야벳이 셈의 장막에 거하는 것처럼 묘사하고 있지만 히브리어 원문으로 보면 셈의 장막에 거하는 주체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셈은 두 차원의 축복을 받은 셈이다.
첫째, 셈의 하나님 여호와가 찬송을 받으신다.
둘째, 하나님께서 셈의 장막에 거하신다.
창세기 10장 21절은 셈을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라고 말한다. 에벨에게서 벨렉과 욕단이 나온다. 벨렉의 후손은 유대 민족으로 이어지고, 욕단의 후손은 동쪽 산악 지역으로 이주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욕단의 첫째 아들은 알모닷이다. 그 이름은 “하나님은 나의 친구”라는 의미로 해석되기도 한다. 이 지점에서 오래된 한민족의 노래, “아리랑”이 떠오른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이 노래는 너무 오래되어 정확한 시작을 알기 어렵다. 누군가의 입에서 누군가의 입으로, 산길에서 들길로, 슬픔에서 기쁨으로, 이별에서 기다림으로 흘러왔다. 어떤 사람은 그 노래를 민요라고 부른다. 어떤 사람은 한민족의 영혼이 담긴 노래라고 말한다.
그 안에 “알이랑”, 곧 하나님과 함께 고개를 넘어간다는 오래된 기억과 영적 흔적이 담겨 있다고 보는 해석도 있다.
물론 이런 해석은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모든 사람이 쉽게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한민족의 깊은 뿌리 속에 하나님을 향한 오래된 흔적이 있다는 믿음은 결코 가볍지 않다.
수천 년의 역사 속에서 우리는 족장들의 신앙을 잃어버렸을 수 있다. 우상숭배로 어둠에 빠졌을 수 있다. 900번이 넘는 외침을 받았다고 말할 만큼 많은 고난을 겪었다. 침략과 가난, 분단과 전쟁, 눈물과 이별의 역사를 지나왔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이 민족을 버리지 않으셨다. 역사의 마지막 때까지 보존해 주셨다.
왜인가.
마지막 때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벨렉의 후손인 유대인은 예수님의 초림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그렇다면 욕단의 후손으로 이해되는 한민족은 예수님의 재림과 관련된 마지막 때의 부르심을 감당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리고 재림의 가장 중요한 열쇠는 연합이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7장 21절에서 기도하셨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마지막 때 세상이 예수님을 믿게 되는 중요한 표지는 교회의 하나 됨이다.
이것이 에하드의 부르심이다.
분열이 깊은 민족에게 주어진 연합의 부르심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역설이 나타난다.
한국인이 연합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하면 어떤 사람은 고개를 갸웃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웃을지도 모른다.
한국인이 연합이라니.
한국인이 얼마나 질투와 경쟁심이 강한 민족인데.
얼마나 잘 나뉘고, 얼마나 쉽게 편을 가르는데.
그 말에도 일리가 있다.
한국에는 외국인이 들으면 이해하기 어려운 속담이 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
남도 아니고 원수도 아니다. 사촌이다. 그런데 사촌이 잘되면 왜 배가 아픈가. 외국인은 이 정서를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한국인은 어느 정도 안다. 알고 싶지 않아도 안다. 비교와 시기, 경쟁과 자존심이 우리 안에 얼마나 깊이 스며 있는지를 안다.
20세기 후반 한국 교회는 기도와 전도, 교회 성장에서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동시에 분열이 심한 교회라는 이미지도 갖게 되었다. 한 미국 목사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전 세계에서 연합하지 않고 분열하면서도 성장하는 교회는 한국 교회밖에 없다.”
뼈아픈 말이다.
그렇다면 질문해야 한다.
이 갈등과 분열, 시기와 경쟁의 심리는 원래부터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에게 주신 것인가. 이것이 우리의 본래 데스티니인가.
그럴 리 없다.
하나님은 에하드의 하나님이시다. 신명기 6장 4절은 말한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시니.”
여기서 “하나”는 히브리어로 에하드다. 스가랴 14장 9절도 마지막 날에 여호와께서 온 땅의 왕이 되시고, 그 이름이 하나일 것이라고 말씀한다. 역사의 마지막에 선포되고 확증되는 하나님의 이름이 에하드와 연결되어 있다.
그렇다면 에하드의 하나님께서 어느 민족에게 갈등과 분열과 시기의 영을 부으실 리가 없다.
그렇다면 이것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오히려 한민족의 데스티니가 에하드이기 때문에, 사탄은 오래전부터 그것을 왜곡해 온 것이다. 부르심이 클수록 공격도 깊다. 원래의 목적이 연합이기 때문에, 원수는 분열을 심어 놓았다. 원래 하나 됨의 부르심이 있기 때문에, 원수는 시기와 경쟁과 프레임의 문화를 만들어 놓았다.
하나님께서 본래 우리 민족에게 주신 데스티니는 에하드다.
연합이다.
하나 됨이다.
함께 서는 것이다.
그러나 사탄은 그것을 왜곡하여 분열과 경쟁과 비교의 구조로 바꾸어 놓았다.
디아스포라, 흩어진 자들의 표적
이제 다시 케이팝 데몬 헌터스를 보아야 한다.
이 작품이 시대의 표적처럼 보이는 이유가 있다. 그 안에는 몇 가지 예언적 싸인처럼 보이는 요소들이 있다.
첫째, 감독 매기 강은 한국계 캐나다인이다. 이 작품을 만든 사람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한국계 디아스포라와 연결되어 있다.
이것은 우연처럼 보이지만,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지점이다.
180개가 넘는 나라에 흩어져 사는 코리안 디아스포라는 말라기 4장 5절과 6절의 말씀을 풀어낼 때 매우 중요한 통로가 될 수 있다. 한국 안에 있는 한국인만이 아니라, 세계 곳곳에 흩어진 한국인들이 마지막 때의 연합과 회복의 메시지를 들고 일어날 수 있다.
디아스포라는 흩어짐의 아픔을 가지고 있다. 고향을 떠난 사람들, 언어와 문화 사이에 서 있는 사람들, 두 세계에 속했지만 어느 한쪽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하는 사람들. 그러나 바로 그들이 열방과 연결되는 통로가 된다.
흩어진 자들이 다시 하나 됨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
이것은 말라기 4장의 그림과 닮아 있다. 끊어진 마음이 이어지고, 세대가 연결되고, 흩어진 유업이 다시 흐르는 그림이다.
하나님은 흩어진 자들을 통해 다시 하나 되게 하실 수 있다.
유업이 다음 세대에게 흘러갈 때
둘째, 이 작품의 음악과 관련된 인물 가운데 이재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는 미국에서 태어나 한국으로 와서 오랜 시간 SM 연습생으로 지냈고, 다시 미국으로 가서 음악을 공부했다. 그리고 그는 한국 영화계의 원로인 신영균 장로의 외손녀로 알려져 있다.
신영균 장로는 서울대 출신의 치과의사였고, 한국 영화계를 대표하는 배우였다. 신성일과 더불어 한국 영화사의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는 2010년 명보극장과 제주 영화박물관을 한국 영화예술 진흥을 위해 기부했다. 당시 시가로 매우 큰 규모의 기부였다.
그는 자신이 받은 유업을 다음 세대를 위해 흘려보낸 사람이다.
이것을 영적으로 보면 의미가 있다.
성경에서 아버지는 단순히 생물학적 아버지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조상, 유업, 영적 계승을 의미한다. 창세기에서 야곱은 말년에 요셉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자기 아들로 삼고 축복했다. 유업이 다음 세대로 흘러간 것이다.
이재가 할아버지 신영균의 유업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상징적 의미를 가진다. 마지막 때 다음 세대가 자신의 데스티니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아버지 세대의 유업이 필요하다.
아버지 세대의 축복.
헌신.
눈물.
씨앗.
그리고 때로는 자신이 다 거두지 못한 꿈.
그것이 자녀 세대 안에서 열매 맺는다.
이것이 말라기 4장 5절과 6절의 핵심이다.
아버지의 마음이 자녀에게로, 자녀의 마음이 아버지에게로 돌이키는 것이다.
프레임이 깨지는 자리
셋째, 이 영화는 프레임을 깨뜨리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루미는 헌터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귀신의 문양이 있다. 진우는 사자보이즈의 리더로 데몬들과 함께 있다. 그러나 그는 본질적으로 인간이다. 상처받은 인간이고, 죄책감에 묶인 인간이며, 여전히 구원을 갈망하는 인간이다.
프레임으로 보면 모든 것은 간단하다.
루미는 헌터다.
진우는 데몬 편이다.
루미는 선이고, 진우는 악이다.
루미는 보호자이고, 진우는 적이다.
그러면 이야기는 단순해진다. 선은 악을 제거하면 된다. 헌터는 데몬을 죽이면 된다. 질문은 필요 없다.
그러나 영화는 그 단순한 프레임을 깨뜨린다.
루미 안에는 숨겨진 문양이 있다. 진우 안에는 아직 죽지 않은 인간성이 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상처를 발견하고, 서로를 받아들이며, 프레임 너머의 진짜 얼굴을 보게 된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메시지를 던진다.
우리는 사람을 너무 쉽게 규정한다. 보수냐 진보냐, 어느 교단이냐, 어느 지역 출신이냐, 어느 학교를 나왔느냐, 어느 세대냐, 어떤 문화적 취향을 가졌느냐에 따라 사람을 판단한다. 한두 가지 특징으로 그 사람 전체를 설명해 버린다.
그러나 한 사람 안에는 우주가 담겨 있다.
한 사람은 하나의 라벨로 설명되지 않는다. 누군가는 문화사역자로 볼 수 있고, 누군가는 방송 진행자로 볼 수 있고, 누군가는 성령사역자로 볼 수 있고, 누군가는 부흥운동가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중 하나만으로 한 사람 전체를 설명할 수 없다.
사람은 프레임보다 크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 안에 넣어 두신 부르심과 가치와 가능성은 우리가 붙이는 라벨보다 훨씬 크다.
그러므로 우리는 프레임을 벗어나야 한다. 그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일치하는 것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함께 연합해야 한다.
“우리”라는 말의 따뜻함과 위험
한국어에는 이상한 아름다움이 있다.
우리는 내 것인데도 “우리”라고 말한다.
내가 다니는 회사인데 “우리 회사”라고 말한다. 상대방은 그 회사에 다니지 않는데도 그렇게 말한다. 내가 키우는 강아지인데 “우리 강아지”라고 말한다. 내가 사는 동네인데 “우리 동네”라고 말한다.
심지어 내 아버지와 어머니도 “우리 아빠”, “우리 엄마”라고 한다. 모르는 남과 대화하면서도 “우리 남편”, “우리 아내”라고 말한다. 문자 그대로라면 이상하다. 그러나 한국어 안에서는 너무 자연스럽다.
왜 우리는 이렇게 “우리”라는 말을 자주 사용할까.
한국인은 개인보다 관계를 먼저 느끼는 경향이 있다. 내가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 저 사람은 어디에 속해 있는지, 나와 어떤 공통분모가 있는지를 중요하게 여긴다.
그래서 처음 만나면 묻는다.
고향이 어디예요.
어느 학교 나오셨어요.
어디 사세요.
어느 회사 다니세요.
혹시 누구 아세요.
혈액형이 뭐예요.
MBTI가 뭐예요.
상대가 어느 그룹에 속한 사람인지 알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나와 공통분모를 찾으면 갑자기 마음의 거리가 가까워진다.
“어, 나도 거기 나왔는데.”
“어, 나도 그 사람 아는데.”
“어, 우리 같은 고향이네.”
그 순간 낯선 사람은 조금 덜 낯선 사람이 된다.
이것은 공동체성의 장점이다. 한국인은 정이 있다. 함께 먹고, 함께 울고, 함께 버틴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가족처럼 달려드는 힘이 있다.
그러나 이 공동체성에는 그림자도 있다.
우리 안에 들어오면 따뜻하지만, 우리 밖에 있으면 차갑다. 우리 편에게는 관대하지만, 다른 그룹에 속한 사람에게는 쉽게 경계심을 가진다. “우리”라는 말이 아름답지만, 그 “우리”가 너무 작아지면 곧바로 “그들”을 만들어 낸다.
이것이 프레임의 시작이다.
작은 우리가 많아질수록 큰 우리는 사라진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에하드는 작게 쪼개진 우리들 사이에서 길을 잃는다.
왜곡된 공동체성을 넘어 에하드로
하나님께서는 우리 민족에게 마지막 때를 위한 에하드의 데스티니를 주셨다.
그러나 사탄은 그 부르심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고, 오래전부터 우리 안에 왜곡된 공동체성을 심어 놓았다.
그 결과 우리는 집단주의적 관계성으로 잘게 나뉘었다. 호남과 영남, 보수와 진보, 남성과 여성, 기성세대와 다음 세대, 장로교와 감리교, 어느 교단, 어느 학교, 어느 지역, 어느 사역 그룹으로 끝없이 나뉘어 왔다.
겉으로는 공동체성을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더 큰 하나 됨을 가로막는 작은 울타리들이 되어 버렸다.
“우리”라는 말은 아름답다. 그러나 그 “우리”가 너무 작아지면 배척의 언어가 된다.
이제 우리는 우리 민족에게 주신 하나님의 데스티니로 돌아가야 한다. 왜곡된 공동체성의 틀을 벗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 됨으로 돌아가야 한다. 교단과 교파, 신학적 해석의 차이, 문화적 관점의 차이를 넘어 진리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손을 잡아야 한다.
물론 이것은 진리를 포기하자는 말이 아니다. 아무 것이나 다 받아들이자는 말도 아니다. 그러나 본질이 아닌 것 때문에 서로를 정죄하고 배척하는 태도는 내려놓아야 한다.
서로의 다름이 불신과 비방의 이유가 아니라, 오히려 에하드의 이유가 되어야 한다.
연합은 모든 사람을 똑같이 만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창조하지 않으셨다. 눈의 결정체가 모두 다르듯이, 사람마다 기질과 관점과 성향이 다르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에하드가 필요하다.
다르기 때문에 함께해야 한다.
서로 다르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를 더 풍성하게 드러낼 수 있다.
하나님 나라는 우주보다 크고 다양하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를 섬기는 사람들도 서로의 다양성을 통해 더 큰 하나 됨을 이루어야 한다.
케데헌이 던지는 마지막 질문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단순한 애니메이션이 아니다.
이 작품은 우리 시대를 향한 하나의 표적처럼 보인다. 한국 문화가 세계로 퍼져 나가는 것을 넘어, 이제 세계가 한국의 정서와 이야기와 감각 안으로 들어오고 있다.
그리고 그 작품의 중심에는 영혼을 둘러싼 전쟁, 상처의 직면, 프레임의 붕괴, 서로 다른 존재들의 연합이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루미와 진우는 서로 다른 프레임 안에 갇혀 있었다. 루미는 헌터였고, 진우는 데몬의 세계에 속한 존재처럼 보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서로를 알아가면서 프레임 너머에 있는 진짜 사람을 보게 된다.
상처를 본다.
갈망을 본다.
아직 꺼지지 않은 빛을 본다.
이것이 오늘 한국 교회와 한민족에게 필요한 메시지다.
우리는 서로를 너무 쉽게 규정해 왔다. 너무 쉽게 나누어 왔다. 너무 쉽게 정죄해 왔다. 그러나 하나님은 마지막 때에 에하드의 부르심으로 우리를 다시 부르고 계신다.
프레임을 깨뜨리라.
상처를 직면하라.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라.
자녀의 마음을 아버지에게로 돌이키라.
이것이 말라기 4장 5절과 6절의 메시지다.
에하드를 위해 기도하라
이제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에하드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우리 안에 만들어진 프레임을 깨뜨려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사람을 너무 쉽게 판단하고 규정하는 마음을 내려놓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내가 속한 작은 “우리”를 넘어, 하나님 나라의 더 큰 “우리”를 보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은 마지막 때에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시고, 자녀들의 마음을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신다.
이것은 세대의 회복이다.
유업의 회복이다.
부르심의 회복이다.
그리고 연합의 회복이다.
한국 교회는 이제 분열의 이미지에서 벗어나야 한다. 한민족은 왜곡된 공동체성을 넘어 에하드의 부르심으로 나아가야 한다.
디아스포라와 본토가 연결되어야 한다.
아버지 세대와 자녀 세대가 연결되어야 한다.
교단과 교파가 진리 안에서 연결되어야 한다.
남과 북이 하나님의 때에 연결되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데스티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에게 주신 마지막 때의 부르심이다.
그리고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그 부르심을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시대의 표적과 같은 작품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시대의 표적 앞에서 깨어 있어야 한다.
한국이 주목받는 것을 단순한 자랑거리로만 삼아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왜 이 작은 나라를 세계 앞에 드러내고 계시는지를 물어야 한다. 왜 세계가 한국을 바라보게 하시는지를 분별해야 한다.
그리고 그 부르심 앞에 겸손히 서야 한다.
에하드를 위해 기도하자.
내 안의 프레임을 깨뜨리자.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자.
아버지의 마음이 자녀에게로, 자녀의 마음이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는 마지막 때의 회복을 위해 기도하자.
하나님은 우리를 분열의 민족으로 끝내지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에하드의 민족으로 부르고 계신다.
그리고 그 부르심을 붙드는 자들을 통해 열방을 깨우실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상처를 가지고 살아간다. 겉으로는 괜찮아 보이지만, 마음 깊은 곳에는 말하지 못한 아픔이 있다. 어떤 상처는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남아 있고, 어떤 상처는 실패의 기억으로 남아 있으며, 어떤 상처는 죄책감과 수치심의 형태로 남아 있다.
사람들은 그 상처를 잘 드러내지 않는다. 감춘다. 숨긴다. 잊은 척한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환경이 바뀌면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성공하면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면 더 이상 아프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상처는 숨긴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외면한다고 치유되지 않는다. 오히려 숨기면 숨길수록 더 깊이 우리 안에 자리 잡는다. 그리고 어느 순간 우리의 목소리를 잠기게 하고, 우리의 자유를 빼앗고, 우리의 잠재력을 억누른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보여 주는 중요한 메시지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상처는 직면할 때 치유된다. 마주하지 않으면 바로잡을 수 없다.
헌트릭스와 혼문의 이야기
이 작품의 기본 스토리는 고대로부터 이어지는 영적 전쟁의 이야기다. 귀마는 데몬들을 통해 사람들의 영혼을 사로잡아 자신에게로 끌고 가려고 한다. 그러나 시대마다 노래를 통해 이들을 물리치고 사람들을 자유케 하는 헌터들이 등장한다. 이 헌터들의 사명은 계승되어 왔다.
현대에 그 사명을 받은 이들이 루미, 미라, 조이다. 이들은 세계적인 걸그룹 헌트릭스의 멤버들이다. 겉으로는 화려한 케이팝 스타들이지만, 실제로는 노래로 데몬들을 물리치고 사람들의 영혼을 자유케 하는 헌터들이다.
이들의 활동을 통해 혼문이 점점 완성되어 간다. 혼문이 완성되어 닫히면 더 이상 귀마와 데몬들은 인간 세상에 들어올 수 없다. 그러므로 헌트릭스의 사명은 단순히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노래는 영적 전쟁의 무기이며, 그들의 사명은 사람들의 영혼을 지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세 명 중 리더인 루미에게는 감추어진 비밀이 있다.
루미가 숨기고 있는 문양
영화의 앞부분에는 어린 시절 루미가 등장한다. 루미는 어머니의 무덤 앞에 앉아 노래를 부른다. 그 곁에서 함께 노래를 부르며 루미의 머리를 빗겨 주는 사람이 셀린이다. 루미의 어머니 무덤의 비석을 보면, 어머니의 이름은 류미영이다. 그녀 역시 헌터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때 어린 루미가 셀린에게 묻는다.
“셀린, 헌터는 데몬이면 다 죽여요?”
셀린은 대답한다.
“그래.”
그러자 루미가 다시 묻는다.
“문양이 있으면 다요?”
그리고 자신의 옷소매를 걷는다. 그 안에는 데몬의 문양이 있다. 루미는 얼른 소매를 내려 그것을 숨긴다.
루미는 헌터의 딸이다. 그런데 동시에 그녀에게는 데몬의 문양이 있다. 이것은 루미의 정체성 안에 깊은 갈등이 있음을 보여 준다. 그녀는 헌터로 부름받았지만, 자기 안에는 데몬과 연결된 흔적이 있다. 사람들을 자유케 하는 사명을 받았지만, 자기 안에는 숨겨야 할 어둠이 있다.
귀마는 루미를 향해 말한다. 헌터들 가운데 나와 똑같은 문양을 가진 아이가 있다. 그런데 그를 물리칠 방법이 없다. 이 설정을 보면 루미는 귀마와 헌터였던 류미영 사이에서 태어난 딸로 추정된다. 영화는 아직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다. 아마도 이 작품은 2편과 3편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루미는 자신 안에 있는 문양을 숨기고 살아간다.
셀린은 루미에게 말한다. “너는 헌터야. 이 문양을 공개하면 안 돼. 미라와 조이에게도 비밀로 해야 해. 지금 인기가 절정에 이르고 혼문이 완성되면 이 문양은 사라질 거야. 그러니 그때까지는 숨겨야 해.”
이 말은 그럴듯해 보인다. 조금만 더 참으면 된다. 조금만 더 숨기면 된다. 사명을 완수하면 상처는 없어질 것이다. 성공하면 문제는 해결될 것이다. 혼문이 완성되면 문양은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반대의 일이 일어난다. 루미가 숨기면 숨길수록 그녀의 목소리는 잠기기 시작한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노래해야 하는 사람이 노래하지 못하게 된다. 그로 인해 멤버들 사이에 갈등이 생기고, 혼문은 오히려 열리며 데몬들이 더 많이 쏟아져 나온다.
숨긴 상처는 사라지지 않는다. 숨긴 어둠은 약해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의 목소리를 막고, 관계를 무너뜨리고, 사명을 방해한다.
진우의 상처와 죄책감
한편 악령들의 세계에서는 한 존재가 비파를 연주하며 등장한다. 그는 진우다. 귀마는 헌트릭스를 무너뜨리기 위해 보이그룹을 만들고, 그들이 혼문을 완성하지 못하도록 사자보이즈를 세운다. 그 중심에 진우가 있다.
진우에게도 깊은 상처가 있다. 400년 전, 그는 극심한 기근과 흉년 속에서 살고 있었다. 어머니와 어린 여동생을 먹여 살려야 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는 비파를 들고 거리로 나가 노래했지만 아무도 그의 노래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아무도 그를 주목하지 않았다. 아무도 그의 고통을 알아주지 않았다.
그때 한 목소리가 들린다.
“너는 지금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너는 네 가족들을 살릴 수 없어. 내가 도와줄게.”
그것은 귀마의 유혹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 날부터 사람들은 진우의 노래에 열광하기 시작한다. 그는 어머니와 여동생을 데리고 궁으로 들어가 호의호식하며 살게 된다. 겉으로는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진우의 몸에는 악령의 문양이 올라온다. 그는 점점 악령들의 세계로 끌려가게 되고, 결국 데몬들의 세계에서 살게 된다. 그가 떠난 뒤 어머니와 여동생은 궁에서 쫓겨나 더 비참한 삶으로 전락한다.
귀마는 이 사건을 이용해 진우를 조종한다. “너는 가족들을 저버렸다.” 이 죄책감은 진우를 묶는 사슬이 된다. 그는 자신이 사기꾼인지 괴물인지 알 수 없어 괴로워한다. 자신 안에 있는 어둠을 미워하면서도, 그 어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루미는 자신의 문양을 숨기고 있고, 진우는 자신의 죄책감에 묶여 있다. 두 사람 모두 상처를 가지고 있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진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한다.
Free: 마주하지 않으면 바로잡을 수 없다
헌트릭스와 사자보이즈가 대립하는 가운데, 진우는 루미에게 데몬의 문양이 있음을 발견하고 연락한다. 두 사람은 만나기 시작하고, 티격태격하면서도 조금씩 서로의 배경을 이해하게 된다.
그러던 중 헌트릭스와 사자보이즈의 사인회 장면이 나온다. 루미와 진우가 같은 테이블에서 사인을 하고 있을 때, 한 여자아이가 진우에게 자신이 그린 그림을 건넨다. 그 그림 속 진우에게는 천사의 날개가 달려 있다. 아이는 말한다.
“당신의 영혼은 아름다워요.”
진우는 자신을 괴물이라고 생각한다. 귀마에게 속았고, 가족을 저버렸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한 아이는 그의 영혼이 아름답다고 말한다. 이것은 진우 안에 아직 완전히 죽지 않은 선함과 갈망이 있음을 보여 준다.
이후 북촌 한옥마을 기와지붕을 배경으로 루미와 진우가 함께 부르는 노래가 나온다. 그 노래가 “Free”다. 이 노래는 이 영화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노래 가운데 하나다.
루미는 고백한다. 숨기려 했지만, 뭔가 고장 난 것 같다고. 노래하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고. 그 말이 계속 목에 걸려 나오지 않았고, 웃으려 했지만 숨이 막혔다고. 그러나 진우 곁에서야 비로소 숨을 쉴 수 있다고 말한다.
진우도 고백한다. 자신 안에 누구도 뚫을 수 없을 것 같았던 어둠이 있었지만, 루미가 그 어둠을 뚫고 다가왔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이 사기꾼인지 괴물인지 혼란스럽다고 말한다. 그러나 동시에 처음으로 누군가를 믿어보고 싶다고 말한다.
그리고 두 사람은 함께 노래한다.
“대면하지 않으면 바로잡을 수 없어.
마주하지 않는다면 바로잡을 수 없어.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면
우리는 자유가 될 거야.”
이 가사는 이 작품의 핵심 메시지다. 대면하지 않으면 바로잡을 수 없다. 마주하지 않으면 자유할 수 없다.
상처는 숨긴다고 치유되지 않는다
우리 모두에게는 상처가 있다. 문제는 상처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다. 문제는 그 상처를 어떻게 대하느냐이다.
사람들은 상처를 감춘다. 왜냐하면 드러내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나를 이상하게 볼까 봐 두렵다. 내가 무너질까 봐 두렵다. 하나님께서 나를 책망하실까 봐 두렵다. 그래서 괜찮은 척한다. 웃는다. 사역한다. 노래한다. 열심히 살아간다. 그러나 속에서는 숨이 막힌다.
루미가 그랬다. 그녀는 헌터로서 노래해야 했지만, 숨긴 문양 때문에 목소리가 잠겼다. 진우도 그랬다. 그는 사람들을 사로잡는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졌지만, 내면 깊은 곳에서는 죄책감과 수치심에 묶여 있었다.
사람의 상처는 숨긴다고 없어지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면 잊혀질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환경이 바뀌면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어떤 사람은 진우처럼 “나는 어쩔 수 없어” 하고 포기하며 산다. 어떤 사람은 루미처럼 “혼문이 완성되면 내 문양은 없어질 거야” 하며 미래의 어떤 사건이 자신을 자동으로 치유해 줄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러나 상처는 그렇게 치유되지 않는다. 직면해야 한다. 마주해야 한다. 빛 가운데로 가지고 나와야 한다.
부활하신 주님과 베드로의 상처
요한복음 21장은 상처를 직면하게 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 준다.
예수님은 이미 부활하셨다. 부활하신 날 저녁에 제자들을 찾아오셨고, 그들 가운데 베드로도 있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평강을 선포하시고 떠나셨다.
그런데 베드로에게는 아직 풀리지 않은 짐이 있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지만, 베드로의 마음은 여전히 무거웠다. 왜냐하면 그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기 때문이다.
유월절 만찬 자리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오늘 밤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그때 베드로는 자신 있게 말했다.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습니다. 죽기까지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다. 그냥 모른다고 한 정도가 아니었다. 저주하며 맹세하면서 예수님을 부인했다. 그리고 닭이 울었을 때, 그는 자신의 실패를 깨달았다.
예수님은 부활하셨다. 그러나 베드로의 실패의 기억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는 용서받았을지 모르지만, 아직 자기 안의 상처와 수치심을 직면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다시 갈릴리 호수로 나가 고기를 잡는다. 마치 예전의 자리로 돌아가려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때 예수님이 찾아오신다.
숯불 앞에서 다시 만난 주님
요한복음 21장 9절은 이렇게 말씀한다.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여기서 매우 중요한 단어가 나온다. “숯불”이다. 헬라어로는 안드라키아라는 단어다. 이 단어는 요한복음 전체에서, 더 나아가 신약성경 전체에서 딱 한 번 더 등장한다. 바로 요한복음 18장이다.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의 집 뜰에서 심문을 받으실 때였다. 그때 베드로는 그 뜰 안에 들어갔다. 문 지키는 여종이 묻는다.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베드로는 대답한다. “나는 아니라.”
요한복음 18장 18절은 그때 상황을 이렇게 묘사한다.
“그 때가 추운 고로 종과 아랫사람들이 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
여기서 “불”이 바로 숯불, 안드라키아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했던 그 자리에는 숯불이 있었다. 그리고 요한복음 21장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베드로를 다시 숯불 앞으로 부르신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실패를 모른 척 넘어가지 않으신다. “괜찮다. 잊어버려라.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다”라고만 하지 않으신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그의 실패의 기억과 마주하게 하신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했던 숯불. 그 수치와 실패와 두려움의 기억이 담긴 숯불. 예수님은 바로 그 숯불 앞에서 베드로를 다시 만나신다.
왜인가? 대면하지 않으면 바로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마주하지 않으면 치유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상처를 외면하지 않으신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정죄하기 위해 숯불 앞으로 부르신 것이 아니다. 베드로를 부끄럽게 만들고 망신 주기 위해 부르신 것도 아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회복시키기 위해 그 자리에 부르셨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부인했던 그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하신다. 그러나 그 기억을 떠올리게 하시는 이유는 베드로를 무너뜨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기억 속에 묶여 있는 베드로를 풀어 주시기 위해서다.
사람들은 자신의 상처를 직면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직면하면 너무 아플 것 같기 때문이다. 무너질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직면하는 상처는 우리를 죽이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를 살린다.
예수님 없는 직면은 절망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하는 직면은 치유가 된다. 주님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방식으로 상처를 들추지 않으신다. 사랑으로 다가오시고, 회복시키기 위해 만지신다.
상처를 핥으시는 하나님
스위스 의사이자 기독교 상담가였던 폴 투르니에는 사람의 상처를 다루는 데 깊은 통찰을 남긴 인물이다. 그의 책 가운데 한국어로는 『귀를 핥으시는 하나님』이라고 번역된 책이 있다. 원제의 의미는 “우리의 상처를 핥으시는 하나님”에 가깝다.
이 표현은 매우 인상적이다. 동물의 몸에 상처가 생기면 어미나 가까운 동물이 그 상처를 핥아 주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애정의 표현이면서 동시에 치유의 행위다. 하나님께서도 그런 분이시다. 하나님은 차갑게 진단만 하시는 분이 아니다. 멀리서 “네가 잘못했다”고 꾸짖기만 하시는 분도 아니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가까이 오셔서 우리의 상처를 다정하게 어루만지시는 분이다.
그런데 왜 한국어 제목은 “귀를 핥으시는 하나님”이라고 번역되었을까? 이것도 의미가 있다. 자신의 진짜 모습을 직면하기 힘들어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내 안의 깊은 상처를 말씀하실까 봐 두렵다. 내가 외면하고 싶은 것을 드러내실까 봐 두렵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우리에게 강압적으로 밀고 들어오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부드럽게 마음을 두드리신다. 마치 귀를 핥으시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이 열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준비시키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정죄하기 위해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치유하기 위해 말씀하신다.
직면의 고통과 죄의 고통
사람들은 상처를 직면하는 것이 괴로워서 외면한다. 그러나 직면의 고통은 일시적인 고통이다. 순간적인 고통이다. 반면 외면의 고통은 오래 간다. 숨겨진 상처는 계속해서 삶을 눌러 버린다. 관계를 왜곡하고, 사명을 막고, 목소리를 잠기게 한다.
이것은 죄의 원리와 정반대다. 죄는 순간적인 쾌락을 준다. 그러나 그 뒤에는 큰 고통이 따라온다. 죄책감, 수치심, 좌절, 중독, 더 깊은 수렁이 따라온다. 죄는 처음에는 달콤하지만 나중에는 쓰다. 처음에는 자유처럼 보이지만 나중에는 감옥이 된다.
반대로 상처를 직면하는 일은 처음에는 아프다. 그러나 그 아픔은 우리를 자유로 이끄는 아픔이다. 잠깐의 고통을 지나면 빛이 들어온다. 숨겨진 것이 드러날 때, 그것은 더 이상 어둠의 힘을 갖지 못한다.
그래서 에베소서 5장은 이렇게 말씀한다.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그들이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들이라.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은 빛으로 말미암아 드러나나니 드러나는 것마다 빛이니라.”
드러나는 것마다 빛이 된다. 이것이 복음의 원리다. 어둠 속에 감추어 두면 그것은 우리를 지배한다. 그러나 빛 가운데 드러나면 그것은 치유의 자리로 들어간다.
하나님 앞에 드러난 상처는 더 이상 우리를 파괴하는 어둠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빛을 받는 자리가 된다.
말씀 앞에서 자신을 직면하라
그러므로 우리는 상처를 핥으시는 하나님께 마음을 열고 나아가야 한다. 날마다 마음을 다해 말씀 앞에 서야 한다.
성경은 우리가 읽는 책이다. 그러나 동시에 성경은 우리를 읽는 책이다. 처음에는 내가 성경을 읽는다고 생각한다. 내가 말씀을 묵상하고, 내가 본문을 이해하고, 내가 하나님의 뜻을 찾는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마음을 쏟아 말씀 앞에 머물다 보면 어느 순간 알게 된다. 성경이 나를 읽고 있다는 것을.
내가 말씀을 보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나를 보고 있다. 내가 본문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본문이 내 마음을 해석하고 있다. 내가 숨기고 있던 것, 내가 말하지 못했던 것, 내가 외면하고 있던 것들을 말씀이 비추기 시작한다.
히브리서 4장은 이렇게 말씀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다. 말씀은 우리의 겉모습만 보지 않는다. 혼과 영,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듯 우리의 깊은 곳을 비추신다.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신다. 하나님 앞에는 숨겨진 것이 없다. 모든 것이 벌거벗은 것처럼 드러난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를 부끄럽게 만들기 위한 폭로가 아니다. 이것은 정죄가 아니다. 이것은 단순한 징계도 아니다. 이것은 우리를 치유하고 자유케 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드러내시지만, 망신 주기 위해 드러내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직면하게 하시지만, 무너뜨리기 위해 직면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진짜 모습을 보게 하심으로 우리를 회복시키신다.
베드로처럼 다시 숯불 앞에 서라
베드로는 숯불 앞에서 실패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를 다시 숯불 앞으로 부르셨다. 실패의 기억이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예수님은 베드로를 다시 만나셨다.
그 자리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물으신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은 베드로의 실패보다 사랑을 물으셨다. 그의 부인보다 관계를 물으셨다. 그의 수치보다 사명을 다시 세우셨다.
베드로는 그 자리에서 회복된다. 예수님은 그에게 다시 말씀하신다. “내 양을 먹이라.” 실패한 베드로를 버리지 않으시고, 다시 사명의 자리로 부르신다.
이것이 예수님의 치유다. 예수님은 우리의 상처와 실패를 모른 척 덮어 버리시는 분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우리를 끝장내시는 분도 아니다. 주님은 우리가 직면하게 하시고, 회복시키시고, 다시 사명으로 보내신다.
그러므로 우리도 숯불 앞에 서야 한다. 내가 실패했던 그 자리, 내가 부인했던 그 자리, 내가 무너졌던 그 자리, 내가 숨기고 싶었던 그 기억 앞에 주님과 함께 서야 한다.
혼자 서면 두렵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 서면 치유가 시작된다.
상처를 직면하는 용기를 가지라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Free”는 우리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던진다.
“대면하지 않으면 바로잡을 수 없어.
마주하지 않는다면 바로잡을 수 없어.”
이 말은 단지 영화 속 노래 가사가 아니다. 영적인 원리다. 상처는 외면한다고 치유되지 않는다. 수치심은 숨긴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죄책감은 시간이 지난다고 저절로 풀리지 않는다. 어둠은 빛 가운데 드러날 때 힘을 잃는다.
루미는 자신의 문양을 숨겼고, 그럴수록 목소리를 잃어 갔다. 진우는 자신의 죄책감에 묶였고, 그럴수록 귀마에게 조종당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한 기억을 안고 있었고, 주님은 그를 다시 숯불 앞으로 부르셨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부르신다. 숨기지 말라고 하신다. 도망치지 말라고 하신다. 외면하지 말라고 하신다. 그러나 그 부르심은 정죄의 부르심이 아니다. 치유의 부르심이다. 자유의 부르심이다. 다시 사명으로 세우시는 부르심이다.
상처를 직면하는 것은 아프다. 그러나 그 아픔은 우리를 살리는 아픔이다. 빛 앞에 서는 것은 두렵다. 그러나 그 빛은 우리를 태워 버리는 불이 아니라, 우리를 회복시키는 은혜의 빛이다.
그러므로 상처를 핥으시는 하나님께 마음을 열고 나아가라. 하나님의 말씀 앞에 정직하게 서라. 말씀이 나를 읽게 하라. 내 안에 숨겨진 상처와 수치와 두려움을 주님 앞에 드러내라.
드러나는 것마다 빛이 된다.
빛 가운데 나온 상처는 더 이상 나를 묶지 못한다.
주님 앞에 직면한 실패는 더 이상 내 인생의 마지막 장면이 아니다.
예수님은 그 자리에서 나를 다시 만나시고, 다시 회복시키시고, 다시 부르신다.
상처를 직면하는 용기를 가지라.
마주하지 않으면 바로잡을 수 없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 마주하면, 우리는 자유할 수 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0장 10절에서 말씀하셨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그 말씀은 짧다. 그러나 그 안에는 영적 세계의 구조가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도둑은 다른 목적을 가지고 오지 않는다. 잠시 들러 인사를 나누러 오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의 형편을 살피기 위해 오는 것도 아니다. 도둑은 훔치러 온다. 빼앗으러 온다. 결국 무너뜨리러 온다.
사탄과 귀신들의 목적도 그렇다.
그들은 사람의 기쁨을 훔친다. 평안을 훔친다. 정체성을 훔친다. 믿음을 훔친다. 그리고 결국 사람을 죽음과 멸망의 자리로 몰고 간다.
반대로 예수님은 생명을 주러 오셨다. 단지 죽지 않게 하시는 정도가 아니다. 겨우 숨만 붙어 있는 삶이 아니라,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신다.
그러므로 영적 전쟁의 본질은 생명과 멸망의 싸움이다.
하나님은 살리신다.
마귀는 죽인다.
하나님은 회복시키신다.
마귀는 파괴한다.
하나님은 자유롭게 하신다.
마귀는 묶는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보여 주는 세 번째 중요한 메시지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귀신들은 사람의 죄를 먹고 산다.
한류의 흐름과 케데헌 세대
21세기에 들어와 한류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 가운데 하나는 배용준이 출연한 겨울연가였다.
2000년대 초반, 일본에서 겨울연가가 인기를 얻으면서 한국 드라마와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사람들은 한국을 찾기 시작했다. “욘사마의 나라”라는 표현이 생겼고, 한국 음식과 한국 여행지에 대한 관심이 번져 갔다.
비슷한 시기에 보아가 일본에서 활동하며 한국 가수의 가능성을 열었다. 대장금은 아시아권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후 동방신기, 슈퍼주니어, 빅뱅, 원더걸스 같은 그룹들이 등장했다. 한국 대중문화는 조금씩 더 먼 지역으로 흘러갔다. 그때까지만 해도 외국에서는 이것을 주로 Korean Wave라고 불렀다.
그러다가 2012년,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등장했다. 그 노래와 뮤직비디오는 전 세계 사람들이 따라 하는 문화적 현상이 되었다. 가사를 몰라도 사람들은 리듬을 따라 움직였다. 그 이듬해 BTS가 데뷔했고, 이후 블랙핑크가 세계적인 그룹으로 성장했다. 그때부터 한류는 단순한 Korean Wave를 넘어 Hallyu라는 고유명사처럼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후 영화 기생충, 드라마 오징어게임 등을 거치며 한국 콘텐츠는 세계 문화의 중심부 안으로 깊이 들어갔다.
그 흐름 속에서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또 하나의 분기점처럼 보인다.
이 작품 안에는 남산이 있다. 낙산공원이 있다. 호랑이와 까치가 있고, 사우나가 있고, 한의원이 있다. 컵라면, 떡볶이, 오뎅, 김밥이 있다. 김밥 위에 뿌려진 깨가 있고, 자르지 않고 통째로 먹는 김밥이 있다. 새우깡을 비롯한 한국 과자들이 등장하고, 티슈 위에 수저를 놓는 모습도 나온다. 분식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초록색 플라스틱 접시도 있다.
단순히 한국을 배경으로 삼은 정도가 아니다. 한국인의 생활감, 정서, 유머, 음식, 공간, 감정선이 작품 안에 스며 있다.
루미와 진우 사이의 절제된 로맨틱한 감정선도 그렇다. 데이트처럼 보이는 장면에서 팔찌를 파는 아주머니가 나타나 “여자친구한테 하나 사 줘라”고 말한다. 진우가 화들짝 놀라며 “여자친구 아니에요”라고 말하자, 아주머니는 “못난 친구, 이런 친구하고는 사귀지 마세요” 하며 팔찌를 그냥 선물해 준다.
그 장면에는 한국적인 유머가 있다. 민망함과 정, 오지랖과 따뜻함이 뒤섞인 장면이다. 한국 사람이라면 그 분위기를 어렵지 않게 알아챈다.
이런 점에서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단순히 또 하나의 한류 콘텐츠가 아니다. 전 세계가 한국적 감성과 문화를 따라 하기 시작하는 새로운 계기가 될 수 있다. 말하자면 케데헌 세대, KDH Generation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을 문화 현상으로만 볼 수는 없다.
그 안에는 중요한 영적 메시지가 담겨 있다.
무속적 요소를 넘어서는 기독교적 메시지
지난 시간에는 케이팝 데몬 헌터스 안에 무속적인 요소가 등장한다는 점을 살펴보았다.
초대 헌터스의 배경에는 무당의 이미지가 있다. 악령을 막는 혼문이라는 설정도 등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이 작품을 기독교적으로 위험하게 볼 수 있다.
그 반응은 이해할 수 있다. 무속, 귀신, 악령, 저승사자 같은 요소들은 기독교적 감각 안에서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을 조금 더 넓은 기독교 세계관 안에서 볼 필요가 있다.
나니아 연대기에는 마녀, 요정, 사티로스, 드라이어드가 등장한다. 반지의 제왕에는 엘프와 마법사와 신화적 존재들이 나온다. 그러나 그 작품들은 단순히 신화나 마법을 찬양하는 작품으로만 읽히지 않는다. 그 안에는 선과 악, 희생과 구속, 유혹과 순종, 빛과 어둠의 싸움이 담겨 있다.
마찬가지로 케이팝 데몬 헌터스에도 무속적 요소가 부분적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그것만 보고 작품 전체를 배제해 버리면, 이 작품이 담고 있는 중요한 기독교적 메시지를 놓칠 수 있다.
이 작품이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핵심 메시지 가운데 하나는 이것이다.
귀신들은 사람의 죄를 먹고 산다.
영혼을 먹고 사는 존재들
작품 속 귀신들은 사람들의 영혼을 빼앗아 가려 한다. 그러나 그 시도는 번번이 헌트릭스에 의해 막힌다. 그러자 어둠의 세계는 고민한다.
어떻게 헌트릭스를 무너뜨릴 수 있을까.
어떻게 사람들의 영혼을 다시 빼앗을 수 있을까.
그때 한 인물이 아름다운 비파를 퉁기며 등장한다. 진우다. 그는 악마화된 존재, 곧 demonized 된 존재로 나타난다.
작품 속 노래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머나먼 옛날 강한 마왕이 살았지. 절대적인 힘을 지닌, 영혼을 먹고 사는 존재였어. 그러던 어느 날 헌터들이 노래를 불렀고, 그는 굶주려야 했어.”
여기서 중요한 영적 원리가 드러난다.
영혼을 먹고 사는 존재.
이 표현은 단순한 판타지적 설정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성경적 원리가 담겨 있다.
귀신들은 스스로 강해지지 못한다. 그들이 몸을 단련하거나, 무술을 배우거나, 전투 훈련을 해서 강해지는 것이 아니다. 어둠의 영들은 무엇을 먹고 강해지는가.
사람의 영혼을 먹고 강해진다. 더 정확히 말하면, 사람의 죄와 상처와 중독과 파괴를 통해 힘을 얻는다.
사탄과 귀신들은 사람을 살리는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사람을 이용한다. 사람의 욕망을 자극한다. 죄를 미끼로 던진다. 그 죄를 통해 사람의 영혼을 묶는다. 그리고 결국 그 사람을 무너뜨리고 파괴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도둑이 오는 목적은 분명하다.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다.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역사
목회 현장에서는 설명하기 어려운 일들을 보게 된다.
어떤 사람은 반복적으로 어둠의 압박을 받는다. 어떤 사람은 귀신 들림과 같은 현상을 경험한다. 어떤 사람은 오래된 상처와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점점 더 깊은 절망 속으로 끌려 들어간다. 어떤 사람은 결혼하고 임신한 상태에서도 감당할 수 없는 어둠의 압박 속에서 극단적인 선택으로 내몰리기도 한다.
물론 자살이나 정신적 고통을 단순하게 말해서는 안 된다. 거기에는 심리적 요인, 환경적 요인, 의학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을 수 있다. 고통당하는 사람을 정죄해서도 안 되고, 유가족에게 함부로 상처를 주어서도 안 된다.
그러나 성경적 세계관으로 볼 때, 사람을 절망과 죽음과 멸망으로 몰아가는 배후에는 분명히 어둠의 역사가 있다.
사탄은 생명을 미워한다.
귀신들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을 미워한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을 속인다. 묶는다. 고립시킨다. 수치심에 빠뜨린다. 결국 죽음으로 몰고 가려 한다.
이것이 요한복음 10장 10절이 말하는 도둑의 일이다.
도둑은 사람의 생명을 도둑질한다.
정체성을 도둑질한다.
소망을 도둑질한다.
그리고 결국 죽이고 멸망시키려 한다.
반면 예수님은 생명을 주신다.
그러므로 이 싸움의 본질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죄는 단순한 실수가 아니다. 죄는 어둠의 영들이 사람을 붙잡는 통로가 된다.
진우의 비극과 죄의 거래
진우의 배경 이야기는 이 원리를 잘 보여 준다.
400년 전, 그는 극심한 가난 속에 살고 있었다. 그의 곁에는 어머니와 어린 여동생이 있었다. 진우는 거리에서 비파를 연주하며 노래를 불렀지만 아무도 그에게 주목하지 않았다.
그는 인정받고 싶었을 것이다. 가족을 먹여 살리고 싶었을 것이다. 자신의 재능이 빛나기를 원했을 것이다. 누군가가 자기 노래를 듣고 멈추어 서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때 귀마가 찾아온다.
귀마는 그를 유혹한다. 거래를 제안한다.
그리고 하룻밤 사이에 모든 상황이 바뀐다. 사람들은 진우의 노래에 주목하기 시작한다. 그는 가족과 함께 궁중에 들어간다. 겉으로 보면 그의 삶은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가난에서 벗어났고, 인정받았고, 가족을 살린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대가가 있었다.
그의 몸과 영혼에 악령의 문양이 점점 퍼져 나가기 시작한다. 죄의 기운이 그를 삼키기 시작한다. 결국 그는 악령들의 세계로 끌려가 살게 된다. 그리고 그가 떠난 뒤 어머니와 여동생은 궁에서 쫓겨나 더 힘든 삶으로 떨어진다.
이것이 죄의 거래다.
처음에는 달콤하다.
처음에는 무언가를 얻는 것처럼 보인다.
인정, 돈, 성공, 쾌락, 위로, 힘, 영향력, 복수의 만족을 주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결국 죄는 사람을 삼킨다.
죄는 사람에게 무언가를 주는 척하다가, 마지막에는 그 사람의 영혼을 빼앗아 간다.
진우는 단순히 악한 인물이 아니다. 그는 유혹을 받았다. 거래했다. 그리고 그 거래의 결과로 악마화된 존재가 되었다.
그의 이야기는 죄가 사람을 어떻게 삼키는지를 생생하게 보여 준다.
죄가 문에 엎드려 있다
창세기 4장은 죄에 대한 중요한 장면을 보여 준다.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하나님은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지만,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다. 그러자 가인은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했다.
그때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이 말씀은 이상하다.
하나님은 죄를 마치 인격적인 존재처럼 묘사하신다. 죄가 문에 엎드려 있다. 죄가 너를 원한다. 죄가 너를 지배하려 한다.
하지만 죄 자체는 인격적인 존재가 아니다. 죄는 행위이고 상태이며 하나님을 거역하는 방향이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죄를 마치 살아 있는 짐승처럼, 사람을 덮치려는 존재처럼 말씀하셨을까.
그 이유는 죄의 배후에서 실제로 역사하는 영적 존재들이 있기 때문이다.
죄 자체가 인격은 아니지만, 죄의 배후에는 사탄과 악령들의 역사가 있다. 죄는 문 앞에 엎드린 짐승처럼 사람을 기다린다. 사람이 마음을 열고 죄를 선택하는 순간, 그 죄를 통해 어둠의 영들이 역사하기 시작한다.
문 앞에 엎드린 짐승이 있다.
아직 방 안으로 들어오지는 않았다. 그러나 기다리고 있다. 숨을 죽이고 있다. 문이 열리기를 기다린다. 사람이 자기 손으로 그 문을 조금 열어 주는 순간, 그것은 안으로 들어온다.
죄는 그렇게 들어온다.
우상은 말 못하지만 끌고 간다
고린도전서 12장 2절에서도 비슷한 표현이 나온다.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 갔느니라.”
우상은 말하지 못한다. 나무나 돌이나 금속으로 만든 형상 자체에는 아무 힘이 없다. 그런데 바울은 사람들이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끌려갔다고 말한다.
왜 그렇게 표현했을까.
우상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우상숭배의 배후에는 귀신들의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 10장에서 바울은 이방인들이 제사하는 것이 귀신에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상은 겉으로 보이는 형상이다. 그러나 그 배후에서 사람을 끌고 가는 존재는 악한 영들이다.
죄도 마찬가지다.
죄 자체는 인격이 아니다. 그러나 죄의 배후에서 사탄과 귀신들이 역사할 때, 사람은 마치 죄가 자신을 끌고 가는 것처럼 느낀다.
원하지 않는데도 끌려간다.
끊고 싶은데 끊어지지 않는다.
미워하면서도 다시 행한다.
이것이 죄의 무서움이다.
중독의 배후에 있는 영적 원리
귀신들은 사람의 죄를 통해 역사한다.
사람이 죄를 반복해서 범하면, 귀신들은 점점 더 강하게 역사한다. 그리고 그 사람의 의지는 점점 더 약해진다. 처음에는 자신이 선택하는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나면 자신이 끌려가는 것처럼 된다.
세상은 이것을 중독이라고 부른다.
중독은 단순한 습관의 문제가 아니다. 물론 뇌의 보상 체계, 심리적 결핍, 환경적 요인도 중요하다. 그러나 성경적 관점에서 보면, 중독의 배후에는 죄를 미끼로 사람의 영혼을 끌고 가는 어둠의 역사가 있다.
처음에는 사람이 죄를 선택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죄가 사람을 선택하는 것처럼 된다.
처음에는 사람이 죄를 즐긴다.
그러나 나중에는 죄가 사람을 조롱한다.
처음에는 죄가 위로처럼 보인다.
그러나 나중에는 죄가 감옥이 된다.
그래서 중독된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만두고 싶은데 그만둘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나를 망치는 줄 아는데도 다시 하게 됩니다.”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사람에게는 죄가 마치 인격적인 존재처럼 느껴진다. 사실은 그 죄의 배후에서 어둠의 영들이 역사하기 때문이다.
로마서 7장의 처절한 고백
로마서 7장은 이런 상태에 있는 사람의 처절한 고백을 보여 준다.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바울은 계속해서 말한다.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이것이 죄 아래 묶인 인간의 상태다.
선을 원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원한다. 하나님의 법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다.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한다. 그런데 내 지체 속에 있는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운다. 그리고 나를 죄의 법으로 사로잡는다.
그래서 바울은 절규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것은 단순한 도덕적 실패의 고백이 아니다.
죄의 법 아래 사로잡힌 인간의 절규다.
자기 힘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고백이다.
의지만으로는 벗어날 수 없다는 고백이다.
자신을 건져낼 구원자가 필요하다는 고백이다.
인간 안에는 깊은 균열이 있다.
선을 알면서도 선을 행하지 못한다. 악을 미워하면서도 악을 반복한다. 끊고 싶은데 다시 돌아간다. 돌아오고 싶지만 다시 끌려간다.
그 균열 앞에서 인간은 결국 묻게 된다.
누가 나를 건져낼 것인가.
죄는 귀신들의 밥이다
목회 현장이나 축사 사역의 현장에서는 이런 표현을 들을 때가 있다.
오랫동안 우상숭배와 제사를 드리던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그것을 중단하면, 축사 과정에서 악한 영들이 “예수쟁이가 되어 제사를 안 드려 우리가 오랫동안 굶었다”는 식의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험은 하나의 영적 원리를 생각하게 한다.
죄는 귀신들의 밥이다.
사람이 죄를 범하면 어둠의 영들은 그것을 통해 힘을 얻는다. 사람이 우상숭배를 계속하면 그 배후의 악한 영들은 더 강하게 역사한다. 사람이 음란, 탐욕, 미움, 거짓, 중독, 분노, 원한, 교만을 반복하면 그 죄를 통로로 귀신들의 영향력이 더 깊어진다.
그러므로 죄는 가볍게 볼 문제가 아니다.
죄는 단순히 “내가 조금 실수했다” 정도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다. 죄는 문을 여는 것이다. 어둠의 영들이 역사할 수 있는 통로를 내어 주는 것이다. 자신의 영혼을 먹이로 내어 주는 것이다.
죄는 결코 혼자 오지 않는다.
죄는 늘 무엇인가를 데리고 온다.
축사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 원리를 모르면 영적 전쟁을 잘못하게 된다.
죄로 인해 귀신들이 역사하고 있는데, 귀신들만 상대해서 싸우려 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마치 무릎이 깨져 피가 철철 흐르는 아이가 울고 있는데, 큰 반창고로 그 아이의 입만 틀어막는 것과 같다.
아이가 우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상처가 문제다.
입을 막는다고 상처가 낫지 않는다.
피가 흐르는 원인을 치료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귀신의 역사만 꾸짖고 죄의 문제를 다루지 않으면, 일시적인 자유함은 있을 수 있어도 근본적인 회복은 어렵다.
귀신을 쫓아내는 것도 필요하다. 그러나 동시에 죄를 회개해야 한다. 죄의 문을 닫아야 한다. 죄의 통로를 끊어야 한다.
이 원리를 모르고 축사만 반복하면 어떻게 되는가.
잠시 개운해진다.
잠시 자유로운 것 같다.
그러나 죄를 업신여기고 그대로 두면 다시 묶인다.
그러다가 또 축사를 받는다.
또 잠시 개운해진다.
그리고 또 죄를 반복한다.
이 과정이 반복되면 사람은 점점 더 영적인 기형 상태로 빠질 수 있다.
그러므로 참된 해방은 두 가지가 함께 가야 한다.
죄를 회개해야 한다.
그리고 어둠의 영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꾸짖어 쫓아내야 한다.
두 개의 법이 우리 안에서 싸운다
로마서 7장 25절에서 바울은 말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우리 안에는 두 개의 법이 있다.
하나는 죄와 사망의 법이다.
또 하나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다.
죄와 사망의 법은 사람을 아래로 끌어내린다. 반복되는 죄, 반복되는 중독, 반복되는 수치심, 반복되는 절망으로 끌고 간다.
중독의 구조는 대체로 이렇게 움직인다.
죄가 주는 일시적인 쾌락이나 위로가 있다. 그러나 그 뒤에는 고통이 찾아온다. 수치심이 찾아온다. 공허함이 찾아온다.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해 다시 더 큰 중독으로 들어간다. 그러면 더 큰 고통이 온다. 다시 더 강한 자극을 찾는다.
중독은 그렇게 사람을 점점 더 깊은 수렁으로 끌고 간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있다.
고통이 찾아오는 것은 단순한 저주가 아니다. 때로 그 고통은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초청이다.
돌아오라.
여기서 멈추라.
이 길은 생명의 길이 아니다.
회개하고 내게로 돌아오라.
하나님은 고통을 통해서라도 사람을 깨우신다.
회개하면 죄의 배후에서 역사하던 귀신들이 약해진다. 묶였던 의지가 풀려나기 시작한다. 전에는 도저히 끊을 수 없을 것 같던 것에 대해 이상하게 마음이 식기 시작한다.
전에는 그렇게 갈망하던 것인데,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이 든다.
왜 이것을 그렇게 원했을까.
그 순간은 은혜의 순간이다.
그리고 그때가 기회다.
생명의 성령의 법을 따라가라
로마서 8장은 복음의 위대한 선언으로 시작된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 말씀은 죄를 가볍게 여기라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죄와 정죄와 사망의 감옥에서 나올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뜻이다.
사탄은 죄를 짓게 한 뒤 정죄한다.
너는 끝났다.
너는 더럽다.
너는 하나님께 갈 수 없다.
너는 또 실패할 것이다.
그러나 복음은 말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그리고 이어서 말씀한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사람에게는 죄와 사망의 법보다 더 강한 법이 필요하다. 그것이 생명의 성령의 법이다.
의지만으로는 죄의 법을 이길 수 없다. 결심만으로는 중독을 끊을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역사하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될 수 있다.
그러므로 회개한 뒤에는 생명의 성령의 법을 따라가야 한다.
죄가 주던 자극을 거부해야 한다. 성령께서 주시는 생명의 갈망을 따라가야 한다. 말씀을 붙들어야 한다. 기도해야 한다. 찬양해야 한다. 공동체 안에 머물러야 한다. 죄의 통로를 끊어야 한다. 다시 묶으려는 환경과 관계와 습관을 정리해야 한다.
해방은 한순간에 시작될 수 있다.
그러나 자유는 계속 걸어가야 한다.
성령의 법을 따라 계속 걸어가야 한다.
귀신을 굶기고 성령을 따르라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상징적으로 중요한 메시지를 보여 준다.
어둠의 영들은 영혼을 먹고 산다. 그들은 사람의 죄와 상처와 중독과 절망을 통해 힘을 얻는다. 그리고 사람을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끌고 가려 한다.
성경도 같은 원리를 보여 준다.
죄가 문에 엎드려 있다.
죄가 너를 원한다.
말 못하는 우상이 사람을 끌고 간다.
죄의 법이 사람을 사로잡는다.
이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죄의 배후에서 역사하는 어둠의 영적 실재를 보여 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죄를 가볍게 여기면 안 된다.
죄는 귀신들의 밥이다.
죄를 반복하면 어둠의 영들은 강해지고, 사람의 의지는 약해진다. 그러나 회개하면 어둠의 영들은 약해진다. 죄의 문이 닫힌다. 묶였던 의지가 풀려난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다시 일으킨다.
도둑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생명을 주러 오셨다.
더 풍성한 생명을 주러 오셨다.
그러므로 오늘 선택해야 한다.
죄와 사망의 법에 끌려갈 것인가.
생명의 성령의 법을 따라갈 것인가.
귀신들에게 먹이를 줄 것인가.
회개함으로 그들을 굶길 것인가.
어둠의 문을 열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 문을 닫을 것인가.
복음은 선언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였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죄의 종으로 살지 않아도 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자유 안에서 더 풍성한 생명을 누릴 수 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케이팝 데몬 헌터스를 통해 음악을 통한 영적 전쟁이라는 주제를 살펴보았다.
그 작품은 단순히 케이팝을 소재로 한 애니메이션이 아니었다. 적어도 그렇게만 보기에는 무언가 더 깊은 것이 있었다. 노래가 사람의 마음에 어떻게 스며드는지, 음악이 영혼을 어디로 데려갈 수 있는지, 그리고 인간이 얼마나 쉽게 어떤 소리에 사로잡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고 있었다.
노래는 사람을 미혹할 수 있다.
노래는 사람을 자유롭게 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 작품을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또 하나의 질문이 생긴다. 조용히, 그러나 피할 수 없는 질문이다.
이 작품 안에는 무속적인 요소가 있다.
귀신을 물리치는 여성들이 등장한다. 그 배경에는 한국의 오래된 무속적 전통이 암시된다. 저승사자 같은 이미지도 나온다. 사람의 영혼을 빼앗는 악령들이 있고, 그것을 막는 영적 방패 같은 설정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작품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무속적인 요소가 나오기 때문에 무조건 배척해야 하는가.
아니면 그 안에 담긴 더 깊은 메시지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하는가.
오늘 우리가 함께 생각하려는 주제는 이것이다.
기독교 세계관을 넓히라.
이 말은 아무 것이나 받아들이라는 뜻이 아니다. 세상 문화를 아무 분별 없이 수용하라는 뜻도 아니다. 오히려 더 깊이 보라는 뜻이다. 더 성경적으로, 더 넓게, 더 섬세하게 분별하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문화와 이야기와 상상력 속에서도 어떻게 복음의 접촉점을 열어 가시는지를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무속적 모티프와 영적 상상력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앞부분에는 헌트릭스의 기원과 배경이 짧게 소개된다.
오래전 한국의 어느 시대, 악령들이 사람들을 공격했다. 그들은 사람들의 영혼을 빼앗아 귀마에게 바쳤다. 마치 어둠 속에서 사람의 숨결을 수집하는 존재들처럼, 그들은 인간의 마음을 사냥했다.
그때마다 그 악령들을 물리치고 사람들을 보호하는 존재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세 명의 여성이었다. 그중 중심적인 인물은 무당과 연결된 존재로 묘사된다.
감독 매기 강은 과거 무당이 행했던 굿을 하나의 공연으로 보았던 것 같다. 사람들이 함께 모이고, 노래하고, 춤추고,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행위. 그것은 한 사회 안에서 음악과 몸짓과 영적 감각이 하나로 뒤섞인 오래된 무대였을지도 모른다.
작품은 그 상상력에서 출발한다.
노래와 춤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는다. 그렇게 모인 마음이 악령들이 뚫고 들어올 수 없는 거대한 방패가 된다. 작품은 그것을 혼문이라고 부른다.
이 역할은 시대마다 지명된 세 명의 여성들을 통해 이어져 왔다. 그리고 지금 이 시대에 그 부름을 받은 이들이 루미, 미라, 조이, 곧 헌트릭스다.
여기서 분명히 무속적인 요소가 등장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 지점에서 불편함을 느낄 수 있다. 그 반응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무속을 복음과 혼합해서는 안 된다. 귀신을 쫓는 능력이 무당에게서 나오는 것처럼 말해서도 안 된다. 성경적 관점에서 악한 영을 이기는 권세는 오직 하나님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십자가의 승리 안에 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이 작품이 무속을 신앙의 대상으로 권하는 것인가.
아니면 무속적 이미지를 하나의 문화적 모티프로 사용하여, 선과 악, 빛과 어둠, 영혼의 구원과 사로잡힘이라는 더 큰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는가.
이 구분은 중요하다.
매우 중요하다.
저승사자와 사자보이즈
작품에는 헌트릭스에 맞서기 위해 만들어진 보이그룹이 등장한다. 사자보이즈다.
그들은 한국의 무속적 설화 속 저승사자 이미지를 차용하고 있다. 저승사자는 사람이 죽을 때 그 영혼을 저승으로 데려가는 존재로 알려져 있다. 검은 옷, 낯선 얼굴, 피할 수 없는 부름. 한국인의 상상력 속에서 저승사자는 죽음과 경계의 상징이었다.
작품은 그 이미지를 악령적 존재와 연결한다. 사자보이즈는 겉으로는 매력적인 보이그룹이다. 무대 위에서 그들은 빛난다. 사람들은 그들에게 열광한다. 그러나 그들의 본질은 다르다. 그들은 사람들을 홀리고, 영혼을 빼앗는 존재들이다.
성경을 보면 죽음 이후 영혼이 옮겨지는 장면이 나온다. 누가복음 16장에서 거지 나사로가 죽었을 때, 그는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간다. 의인이 죽을 때 천사들이 그를 데려간다는 성경적 이미지가 있다면, 반대로 악인이나 불신자의 죽음 이후 악한 영들이 그 영혼을 끌고 가는 이미지도 상징적으로 상상해 볼 수 있다.
성경이 그것을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영적 세계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으로는 충분한 개연성이 있다.
그래서 사자보이즈가 저승사자 같은 모습으로 등장해 사람들의 영혼을 미혹하는 보이그룹으로 그려지는 것은 흥미롭다. 그들은 매력적이다. 그러나 그 매력의 끝에는 사로잡힘이 있다.
이것은 오늘날 대중문화 속 우상화, 팬덤, 집착, 영혼의 사로잡힘이라는 문제를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문제는 소재가 아니라 메시지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생긴다.
헌트릭스의 뿌리가 무당과 연결되어 있고, 사자보이즈가 저승사자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면, 이 작품은 기독교적으로 완전히 배척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소재와 메시지를 구분해야 한다.
어떤 작품에 무속적 소재가 등장한다고 해서 그 작품이 반드시 무속을 찬양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어떤 작품에 기독교적 소재가 등장한다고 해서 그 작품이 반드시 복음적인 것도 아니다.
영화 파묘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그 영화에는 기독교인 감독과 배우들이 관련되어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었고, 촬영 과정에서 기도했다는 말도 있었다. 그러나 많은 기독교인들은 이 작품을 심각하게 비판했다. 왜냐하면 그 영화가 기독교를 우스꽝스럽고 무력한 종교처럼 보이게 하고, 어둠의 힘을 굉장히 강력하고 매력적인 것으로 묘사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반면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무속적 요소를 모티프로 사용하지만, 전체 구도는 다르다.
악령은 악령으로 묘사된다.
사람의 영혼을 빼앗으려는 어둠의 세력은 부정적으로 그려진다.
그리고 그 악령의 세력에 맞서 사람들을 지키고 자유롭게 하는 싸움이 중심에 있다.
다시 말해 문제는 무속적 이미지가 등장하느냐 자체가 아니다. 그 이미지가 어떤 메시지를 위해 사용되느냐이다.
소재만 보고 판단하면 많은 것을 놓칠 수 있다.
메시지를 보아야 한다.
방향을 보아야 한다.
그 이야기가 사람의 마음을 어디로 데려가는지를 보아야 한다.
나니아와 반지의 제왕을 떠올려 보라
이 지점에서 우리는 C. S.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와 J. R. R. 톨킨의 반지의 제왕을 떠올릴 수 있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은 이 두 작품을 기독교 세계관을 담은 위대한 문학 작품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처음부터 모든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본 것은 아니었다.
나니아 연대기에는 마녀가 나온다. 요정도 나오고, 페가수스도 나오고, 사티로스도 나오고, 드라이어드도 나온다. 사티로스는 반인반수의 존재이고, 드라이어드는 나무의 정령이다.
반지의 제왕에도 엘프가 나오고, 난쟁이가 나오고, 마법사 간달프가 나온다. 거대한 신화적 세계가 펼쳐진다.
이런 요소들은 북유럽 신화, 켈트 신화,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온 것들이다. 그래서 1950년대에 이 작품들이 나왔을 때, 미국과 영국의 일부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은 이 작품들을 비판했다. 아이들에게 참된 기독교 신앙에 혼동을 줄 수 있다는 이유였다.
사실 오늘 우리도 처음 나니아 연대기를 볼 때, 마녀와 마법과 요정이 등장하는 장면에서 멈칫할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많은 기독교인들은 그 작품들의 깊은 메시지를 보게 되었다.
나니아 연대기에서 아슬란은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그의 희생과 부활은 복음의 핵심을 동화적 상상력 안에서 보여 준다. 반지의 제왕은 절대 권력의 유혹, 악의 파괴성, 작은 자들의 순종과 희생, 섭리의 신비를 장대한 서사로 보여 준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작품 안에 신화적 요소가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다.
그 요소들이 어떤 세계관 속에서 사용되고 있느냐이다.
톨킨의 하위 창조
J. R. R. 톨킨은 어릴 때부터 라틴어와 헬라어를 배웠다. 자연스럽게 그리스-로마 신화를 접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을 가장 깊이 사로잡은 것은 북유럽과 게르만 신화였다.
그는 영웅들의 이야기를 사랑했다. 특히 니벨룽겐의 노래와 지그프리트가 용을 죽이는 장면은 그에게 깊은 흔적을 남겼다. 그는 그 이야기가 자신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자신의 삶을 바꾸어 놓았다고 고백했다.
그런데 톨킨은 단순히 신화를 좋아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평생 가톨릭 신앙 안에서 살았던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는 인간의 상상력과 신화 창작을 “하위 창조”라고 보았다.
하나님만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참된 창조주이시다. 그것이 상위 창조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은 하나님께 받은 상상력으로 이야기를 만들고 세계를 그려 낸다. 이것이 하위 창조다.
톨킨에게 신화는 단순한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이 영원과 신성을 향해 더듬어 가는 상상력의 산물이었다.
물론 신화 자체가 복음은 아니다.
그러나 신화 속에는 인간이 하나님을 찾고, 구원을 갈망하고, 악을 이기는 선을 기다리는 마음이 반영될 수 있다.
루이스의 젠주흐트
C. S. 루이스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그는 어머니를 잃은 뒤, 어린 시절부터 깊은 상실과 갈망을 안고 살았다. 마음속 어딘가에 채워지지 않는 공간이 있었다. 설명할 수 없고, 이름 붙이기 어려운 공간이었다.
그러던 중 그는 북유럽 신화를 읽으며 자기 영혼을 흔드는 강렬한 갈망을 경험했다. 그는 그것을 독일어로 젠주흐트라고 불렀다.
Sehnsucht.
단순한 그리움이 아니다. 이 세상 안에서는 완전히 채워지지 않는 갈망이다. 멀리 있는 무엇인가를 바라보며 찾는 마음이다. 이 땅의 어떤 것으로도 완전히 만족되지 않는, 사라지지 않는 영원의 갈망이다.
전도서 3장 11절은 이렇게 말씀한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사람 안에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지으셨다.
루이스는 훗날 깨닫게 된다. 이 세상에서는 채워지지 않는 갈망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만을 위해 창조된 존재가 아니라는 증거라는 것을.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지음 받은 존재다.
그러므로 이 땅의 아름다움과 이야기와 음악과 신화가 우리 안에 깊은 갈망을 깨울 때, 그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갈망일 수 있다.
신화가 복음으로 완성되다
1931년 9월, 옥스퍼드에서 톨킨과 루이스, 그리고 휴고 다이슨이 함께 산책하며 긴 대화를 나누었다.
밤이었을 것이다.
영국의 공기는 조금 습했을 것이고, 가로등 불빛은 오래된 길 위에 희미하게 떨어졌을 것이다.
그들은 걷고, 말하고, 멈추었다가 다시 걸었을 것이다.
그날의 대화는 루이스가 무신론에서 기독교 신앙으로 돌아오는 데 매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톨킨은 루이스에게 말했다. 이교도의 신화들은 신성을 향한 인간 상상력의 진정한 꿈들이라고. 여러 신화 속에는 죽음과 부활, 희생과 구원, 악을 이기는 선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부분적이고 상징적인 꿈이었다.
그런데 복음 안에서는 그 꿈들이 실제 역사 속에서 현실이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십자가, 부활은 신화적 상상이 아니다. 그것은 역사 속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사건이다.
루이스는 이 말을 들으며 자신이 북유럽 신화와 그리스-로마 신화를 읽을 때 느꼈던 그 설명할 수 없는 갈망이 사실은 하나님을 찾고 있는 내면의 갈망이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신화는 복음의 대체물이 아니다.
그러나 신화는 복음을 향한 갈망을 깨우는 하나의 길이 될 수 있다.
이것이 기독교 세계관을 넓히는 일이다.
세상의 이야기들을 무조건 복음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 안에 있는 갈망과 질문과 상징을 통해 사람들을 복음으로 인도할 수 있어야 한다.
바울이 아덴에서 본 것
사도행전 17장은 이 문제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본문이다.
바울은 아덴에 도착했다. 그 도시는 그리스 철학과 예술과 종교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동시에 수많은 우상으로 가득한 도시였다. 거리를 걸을 때마다 신들의 형상이 보였을 것이다. 돌과 금속과 이름 없는 제단들이 도시 곳곳에 서 있었을 것이다.
성경은 바울이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한 첫마디를 보라.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바울은 그들의 우상숭배를 보고 분노했다. 그러나 그들과 대화할 때는 그들의 종교성을 접촉점으로 삼았다.
그는 이렇게 시작하지 않았다.
“너희는 다 틀렸다.”
“너희의 문화는 전부 쓰레기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그들 안에 있는 종교적 갈망을 인정하며 대화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이 세워 둔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는 제단을 보았다고 말했다.
그것은 분명히 우상숭배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그것을 모티프로 삼아 참된 하나님을 증거했다.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이것이 바울의 탁월함이다.
그는 우상숭배를 인정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상숭배 속에서도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인간의 왜곡된 갈망을 보았다. 그리고 그것을 복음의 접촉점으로 사용했다.
알지 못하는 신에서 창조주 하나님으로
바울은 아덴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이렇게 소개한다.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바울은 그들의 제단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그들을 그 제단에 머물게 하지 않았다.
그는 그들을 창조주 하나님께로 인도했다.
하나님은 인간이 만든 신전 안에 갇혀 계신 분이 아니다.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아야만 존재하시는 분도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분이다.
그리고 바울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까지 증거한다.
이것이 중요하다.
문화적 접촉점은 출발점이지 결론이 아니다.
신화와 예술과 음악과 대중문화는 복음으로 가는 대화의 문이 될 수 있지만, 그것 자체가 복음은 아니다.
결국 우리는 그 문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나아가야 한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를 어떻게 볼 것인가
이제 다시 케이팝 데몬 헌터스로 돌아와 보자.
지난 시간에 우리는 이 작품 안에 음악을 통한 영적 전쟁이라는 메시지가 있음을 보았다. 사탄은 음악을 통해 사람들의 영혼을 미혹할 수 있다. 반대로 하나님께 드려지는 거룩한 음악, 찬양은 어둠의 세력을 물리치는 영적 무기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이 작품에는 그것 말고도 또 다른 중요한 기독교적 메시지들이 담겨 있다.
선과 악의 대결.
영혼을 빼앗기지 않기 위한 싸움.
공동체가 하나 되어 어둠을 막는 장면.
자기 안의 어둠과 수치를 직면하고 진실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
이 모든 요소들은 기독교적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만일 우리가 이 작품 안에 무속적 소재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이것은 기독교적일 수 없다. 무조건 잘못된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많은 것을 잃어버리게 된다.
바울이 아덴 사람들의 “알지 못하는 신” 제단을 보고 그것을 복음의 접촉점으로 사용했던 것처럼, 우리도 이 시대의 문화 속에서 복음의 접촉점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루이스가 말한 동화적 장치
C. S. 루이스는 자신이 왜 동화 속에 마법과 신화적 요소를 사용했는지 설명한 적이 있다.
그는 아이들에게 마법을 믿으라고 가르치기 위해 마법을 쓴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것을 동화적 장치로 사용했다. 그 장치는 아이들의 상상력을 열고, 그 상상력 안에서 선과 악, 희생과 구속, 용기와 믿음을 배우게 하는 도구였다.
나니아 연대기를 읽는 아이들은 상상 속 세계에서 선과 악의 싸움을 경험한다. 아슬란의 희생을 통해 대속의 의미를 느낀다. 부활의 기쁨을 동화적 언어로 맛본다.
마법과 요정은 메시지의 본질이 아니다.
그것들은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상징적 도구다.
이 관점에서 보면 케이팝 데몬 헌터스 안의 무속적 요소도 단순히 배척만 할 것이 아니라 분별해야 한다.
그것이 무속 신앙을 권하는 것인가.
아니면 한국적 문화의 상징을 빌려 영적 전쟁과 구원과 공동체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장치인가.
우리는 그것을 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사용하신다
왜 하나님은 이런 것들조차 사용하셔서 사람들을 당신께로 이끄시는가.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마음 때문이다.
디모데전서 2장 4절은 말한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베드로후서 3장 9절도 말한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나님은 한 사람도 멸망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모든 사람이 진리를 알고 구원받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다양한 통로를 사용하신다.
자연을 통해 말씀하시고, 양심을 통해 말씀하시고, 고난을 통해 말씀하시고, 때로는 문화와 예술과 이야기 속에서도 사람의 마음을 두드리신다.
물론 문화가 곧 계시라는 뜻은 아니다. 성경만이 하나님의 특별계시이며, 복음의 기준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일반은총의 세계 속에서도 사람들의 마음에 질문을 일으키신다.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깨우신다. 복음을 향한 길을 준비하신다.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바울
바울은 고린도전서 9장에서 복음을 전하는 자신의 태도를 이렇게 설명한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바울은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과 같이 되었다.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율법 아래 있는 자처럼 되었다. 율법 없는 자들에게는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되었다. 약한 자들에게는 약한 자와 같이 되었다.
그 이유는 하나였다.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었다.
이것은 타협이 아니었다. 바울은 복음의 본질을 양보하지 않았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상대의 언어와 문화와 상황 속으로 들어갔다.
이것이 선교적 지혜다.
사도행전 16장에서 바울은 디모데를 데리고 선교 여행을 떠나기 전에 그에게 할례를 행했다. 바울은 율법으로 구원받는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갈라디아서에서는 할례를 구원의 조건으로 삼는 것을 강하게 반대했다.
그러나 디모데의 아버지가 헬라인이라는 사실을 그 지역 유대인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복음 전파에 불필요한 장애물이 생기지 않도록 그에게 할례를 행한 것이다.
이것이 바울의 태도다.
복음의 본질은 결코 양보하지 않는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자신의 문화적 고집은 내려놓을 수 있다.
트로트에도, 헤비메탈에도 복음을 담을 수 있다
이 원리를 오늘 우리에게 적용해 보자.
어떤 사람이 노래를 좋아하는데 오로지 트로트만 좋아한다고 해 보자. 그렇다면 우리는 트로트에 복음을 담을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사람이 헤비메탈을 좋아한다면, 그 장르 안에서도 복음을 담을 방법을 고민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세대가 케이팝에 열광한다면, 우리는 케이팝이라는 문화적 언어를 통해 그들에게 복음의 메시지를 전할 길을 찾아야 한다.
물론 모든 장르와 모든 문화가 자동으로 거룩한 것은 아니다. 어떤 음악은 분명히 죄를 미화하고, 정욕을 부추기고, 폭력과 허무를 확산시킬 수 있다. 그런 것은 분별해야 한다.
그러나 장르 자체를 무조건 악으로 규정해서는 안 된다.
문제는 그 안에 무엇을 담느냐이다.
어떤 영이 그것을 이끌고 있느냐이다.
어떤 메시지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느냐이다.
기독교 세계관이 좁아지면 우리는 세상을 두려워만 하게 된다. 그러나 기독교 세계관이 넓어지면 우리는 세상을 분별하면서도 그 안에서 복음의 길을 찾게 된다.
창조주 하나님과 인간의 갈망
하나님은 온 세상의 창조자이시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그분이 창조하신 것이다. 인간의 목소리도 하나님이 만드셨고, 리듬과 선율을 느끼는 감각도 하나님이 주셨다. 색채와 이야기와 상상력도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선물이다.
죄는 이 모든 것을 왜곡한다.
음악이 우상숭배의 도구가 될 수 있다. 예술이 정욕과 교만을 섬기는 도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죄가 왜곡했다고 해서 창조 세계 자체가 사탄의 소유가 되는 것은 아니다.
창조 세계의 주인은 여전히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문화를 볼 때 두 가지를 동시에 보아야 한다.
하나는 죄로 인한 왜곡이다.
다른 하나는 그 안에 남아 있는 창조의 흔적이다.
인간이 아름다움을 갈망하고, 구원을 꿈꾸고, 악을 이기는 선의 이야기에 감동하고, 죽음을 넘어서는 생명을 상상하는 것은 그 안에 하나님께서 주신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 갈망을 사용하신다.
그 갈망을 깨워 복음으로 이끄신다.
신화도, 음악도, 이야기들도, 때로는 대중문화도 그 통로가 될 수 있다.
기독교 세계관을 넓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기독교 세계관을 넓혀야 한다.
이것은 세상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이라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더 성경적으로, 더 깊이, 더 넓게 보라는 말이다.
좁은 세계관은 소재만 보고 판단한다.
무당이 나오면 무조건 나쁘다.
마법사가 나오면 무조건 틀렸다.
신화적 존재가 나오면 무조건 위험하다.
그러나 넓은 기독교 세계관은 소재만 보지 않는다. 메시지와 방향을 본다.
이 이야기가 사람을 어디로 이끄는가.
어둠을 미화하는가, 아니면 어둠을 폭로하는가.
우상숭배를 권하는가, 아니면 우상숭배의 위험을 드러내는가.
인간의 영혼을 절망으로 끌고 가는가, 아니면 구원과 희망을 갈망하게 하는가.
바울은 아덴의 우상들 앞에서 복음의 문을 보았다.
톨킨과 루이스는 이교 신화 속에서 복음을 향한 인간의 갈망을 보았다.
우리는 오늘 대중문화 속에서도 이 시대 사람들의 두려움과 갈망과 질문을 읽어야 한다. 그리고 그 질문에 복음으로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모든 것을 복음을 위한 통로로 보라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우리 시대의 흥미로운 문화 현상이다.
이 작품에는 무속적 요소가 있다. 그러나 동시에 영혼을 빼앗으려는 어둠의 세력, 음악을 통한 미혹, 공동체의 연합, 선과 악의 싸움,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 노래라는 주제도 있다.
이것을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읽어 낼 수 있다면, 이 작품은 복음적 대화를 여는 하나의 도구가 될 수 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모든 것을 사용하신다.
문화도 사용하신다.
예술도 사용하신다.
이야기와 음악도 사용하신다.
사람 안에 있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 곧 이 세상 것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깊은 갈망을 깨우셔서 결국 창조주 하나님께로 이끄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움으로 세상을 피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
분별 없이 세상을 받아들여서도 안 된다.
우리는 바울처럼 보아야 한다.
우상이 가득한 아덴에서도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는 제단을 복음의 접촉점으로 삼았던 바울처럼, 이 시대의 문화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갈망의 흔적을 찾아야 한다.
기독교 세계관을 넓히라.
세상을 사랑해서 세상에 동화되라는 말이 아니다.
세상을 두려워해서 도망치라는 말도 아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세상 속에 있는 갈망과 질문을 복음으로 해석하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 모든 길의 마지막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셔야 한다.
신화가 아니라 복음으로.
상상이 아니라 역사로.
상징이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의 실제 사건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사람들을 인도해야 한다.
하나님은 오늘도 사람들의 마음속에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깨우신다.
그리고 그 갈망의 끝에서 사람들은 마침내 참된 창조주, 참된 구원자, 참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한다.
예수님은 어느 날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을 향해 말씀하셨다.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그들은 하늘을 읽을 줄 알았다.
저녁 하늘이 붉으면 다음 날 날씨가 좋을 것을 알았다. 서쪽 하늘에 구름이 적고, 대기가 안정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반대로 아침 하늘이 붉으면 날이 흐릴 가능성이 컸다. 서쪽에서 구름과 비구름이 몰려올 수 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하늘의 색을 보고 내일의 날씨를 짐작했다.
붉은 하늘을 보고 우산을 준비할지, 밭에 나갈지, 길을 떠날지를 결정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물으셨다.
너희는 하늘은 읽으면서, 왜 시대는 읽지 못하느냐.
천기는 분별하면서, 왜 하나님의 표적은 분별하지 못하느냐.
시대의 표적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한 시대를 향해 주시는 신호다. 하나님께서 역사의 어느 지점에서 사람들에게 보내시는 메시지다. 구약 시대에는 주로 선지자들의 입술을 통해 그런 표적이 주어졌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때때로 영화나 드라마, 음악과 같은 대중문화 속에서도 한 시대의 영적 흐름이 드러난다.
문화는 단순히 소비되는 것이 아니다.
문화는 시대의 꿈을 비추는 거울이다.
때로는 사람들의 두려움을 드러내고, 때로는 감추어진 욕망을 드러내며, 때로는 한 세대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조용히 보여 준다.
그래서 우리는 물어야 한다.
지금 이 시대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무엇에 열광하고 있는가.
무엇을 노래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 노래는 사람들의 영혼을 어디로 데려가고 있는가.
시대의 표적을 읽어야 한다
넷플릭스를 통해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던 대표적인 한국 콘텐츠가 있었다. 오징어게임이다.
달고나.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초록색 트레이닝복.
거대한 인형.
어린 시절의 놀이와 죽음의 공포가 이상하게 뒤섞인 그 세계는 세계인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그런데 그 뒤에 또 다른 작품이 나타났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
말하자면 “케이팝 귀신 사냥꾼”이다.
처음 제목만 보면 조금 이상하다. 케이팝과 데몬, 아이돌과 귀신, 무대와 영적 전쟁이 한 문장 안에 나란히 놓여 있다.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 한 테이블에 앉아 있는 느낌이다. 처음에는 또 하나의 오컬트 영화가 나온 줄 알았다. 귀신, 악령, 주술, 퇴마 같은 어두운 소재를 자극적으로 다루는 작품일 것 같았다.
“아, 또 대중문화를 통해 영적으로 어지럽히는 작품이 나왔구나.”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작품을 들여다보면 조금 다르다. 이 애니메이션은 단순히 오컬트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작품이 아니다. 물론 기독교 작품은 아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성경적 세계관과 연결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중요한 시대적 메시지가 담겨 있다.
이 작품은 한국적인 것들을 하나둘 보여 주는 수준을 넘어선다. 케이팝 아이돌이 등장하고, 수건으로 양머리를 하고 사우나에 앉아 있는 장면이 나온다. 한약방, 김밥, 컵라면, 떡볶이, 한국 과자, 한옥, 남산타워, 낙산성곽, 한국 민화 속 호랑이와 까치가 등장한다.
한국 문화가 조각조각 들어간 것이 아니라, 한국이라는 세계 전체가 애니메이션 안으로 들어가 있다.
더 주목할 만한 것은 그 주제곡이다. “Golden.” 이 노래는 영국 Official Singles Chart와 미국 Billboard Hot 100에서 모두 1위를 기록했다. 단순한 애니메이션 삽입곡이 아니라, 음악과 영상과 한국 문화가 결합된 하나의 세계적 현상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단순한 유행일까.
아니면 시대의 표적일까.
우리는 여기서 멈추어야 한다.
잠깐 멈추어, 이 작품이 왜 이렇게 사람들의 마음을 붙잡는지 물어야 한다.
노래로 싸우는 두 그룹
이 작품의 중심에는 두 그룹이 있다.
하나는 3인조 걸그룹 헌트릭스다. 루미, 미라, 조이. 이들은 겉으로 보면 세계적인 케이팝 아이돌이다. 화려한 무대에 서고, 사람들의 함성을 받고, 빛나는 의상과 음악 속에서 노래한다.
그러나 그들은 단순한 스타가 아니다.
그들은 헌터다.
노래를 통해 악령들을 물리치고 사람들의 영혼을 지키는 존재들이다.
다른 한쪽에는 5인조 보이그룹 사자보이즈가 있다. 이들도 겉으로는 매력적인 아이돌처럼 보인다. 팬들을 사로잡고, 무대 위에서 완벽하게 움직이며, 사람들의 마음을 홀린다.
그러나 그들의 정체는 다르다.
그들은 인간의 영혼을 노리는 악령들이다.
갓을 쓰고 까만 도포를 입은 저승사자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고, 노래를 통해 사람들의 마음을 유혹한다.
한쪽은 노래로 영혼을 자유롭게 한다.
다른 한쪽은 노래로 영혼을 사로잡는다.
이 작품의 중심 구도는 결국 음악을 통한 영적 전쟁이다.
이것은 단순한 판타지가 아니다. 성경적으로 볼 때 음악은 단순한 예술의 영역에만 머물지 않는다. 음악은 사람의 감정과 생각, 기억과 갈망을 깊이 움직인다. 어떤 음악은 사람을 하나님께로 이끌고, 어떤 음악은 사람을 더 깊은 어둠의 세계로 끌고 간다.
노래는 공기처럼 흘러 들어온다.
귀로 들어와 마음에 머문다.
그리고 마음에 오래 머문 것은 결국 삶의 방향을 바꾸기 시작한다.
사탄의 타락과 음악의 문제
음악과 영적 세계의 관계를 생각할 때, 우리는 사탄의 타락을 떠올리게 된다.
이사야 14장은 원래 바벨론 왕을 향한 심판의 노래다. 그러나 오랜 전통 속에서 많은 해석자들은 그 배후에 있는 사탄적 교만과 타락의 원리를 함께 보았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그는 마음속으로 말했다.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여기서 사탄적 교만의 핵심이 드러난다.
피조물이 하나님처럼 되려는 욕망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리에 있어야 할 존재가, 자기 자신을 높이려 한다. 받은 빛을 반사해야 할 존재가, 스스로 빛의 근원이 되려 한다. 거기서 타락이 시작된다.
흥미로운 것은 이사야 14장 11절에 이런 표현이 나온다는 것이다.
“네 영화가 스올에 떨어졌음이여, 네 비파 소리까지로다.”
비파.
현악기의 소리.
추락한 영광과 함께 떨어진 음악의 이미지가 거기 있다.
에스겔 28장에도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두로 왕을 향한 애가 속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네가 지음을 받던 날에 너를 위하여 소고와 비파가 준비되었도다.”
소고는 타악기적 요소를 떠올리게 하고, 비파는 히브리어로 볼 때 관악기적 해석된다. 물론 이 본문들을 가지고 사탄이 원래 천상의 찬양대장이었다고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은 조심해야 한다.
그러나 적어도 성경은 교만과 타락, 영광과 음악의 이미지를 함께 보여 준다.
그리고 역사 속에서 음악은 실제로 두 방향으로 사용되어 왔다.
하나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거룩한 도구다.
다른 하나는 인간의 욕망과 우상숭배를 부추기는 도구다.
음악은 중립적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그 안에 어떤 영이 담기느냐에 따라 사람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끈다.
대중음악과 영혼의 사로잡힘
오늘날 대중음악의 영향력은 엄청나다.
음악은 단순히 귀로 듣는 것이 아니다. 반복해서 듣는 노래는 사람의 정서와 생각 속으로 들어온다. 가사는 가치관을 형성하고, 리듬은 몸과 감각을 움직인다. 그리고 스타를 향한 팬덤은 때때로 숭배에 가까운 형태로 발전한다.
그래서 “아이돌”이라는 단어 자체도 영적으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영어의 idol은 우상이라는 뜻이다. 물론 현대 대중문화에서 아이돌은 단순히 인기 있는 가수나 스타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그러나 단어가 가진 원래 의미를 생각하면, 이 시대의 스타 문화가 얼마나 쉽게 우상화의 구조로 흘러갈 수 있는지 보게 된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에서 사자보이즈가 부르는 노래 “Your Idol”은 그런 점에서 매우 상징적이다.
그 노래는 말한다.
내가 너의 아이돌이 되겠다고.
너를 통제하고 집착하게 만들겠다고.
너는 이미 내게 마음을 주었으니, 이제 영혼을 가져갈 차례라고.
그 말들은 단순한 팬송의 언어가 아니다.
그것은 영혼을 사로잡는 우상숭배의 언어처럼 들린다.
사람은 반복해서 바라보는 것을 닮아간다.
반복해서 듣는 것에 마음이 물든다.
계속해서 열광하는 대상에게 자기 정체성의 일부를 내어준다.
그래서 음악은 단순한 취향의 문제가 아니다.
음악은 영적인 방향성과도 연결될 수 있다.
누구의 노래를 듣고 있는가.
그 노래는 내 안에 무엇을 깨우는가.
그 리듬은 내 마음을 어디로 데려가는가.
그 가사는 내 영혼에 어떤 문장을 심는가.
이 질문은 가볍지 않다.
다윗의 수금과 악령의 떠남
성경은 음악이 영적 세계와 연결될 수 있음을 분명히 보여 준다.
사무엘상 16장에서 사울은 하나님께 버림받은 뒤 악령으로 인해 번뇌한다.
“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그를 번뇌하게 한지라.”
사울의 신하들은 수금을 잘 타는 사람을 구하자고 제안한다. 그리고 다윗이 사울 앞에 불려온다. 다윗은 수금을 들고 와서 손으로 탄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사울이 상쾌하여 낫고 악령이 그에게서 떠나더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한 음악 치료 효과만이 아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기름 부음 받은 사람이었다. 그의 연주는 단순한 기술이 아니었다. 그 안에는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있었고, 기름 부음이 있었다.
그가 수금을 탈 때, 악령의 역사가 물러갔다.
이것이 성경이 보여 주는 음악의 영적 차원이다.
음악은 단순히 분위기를 만드는 도구가 아니다.
하나님께 드려질 때 음악은 찬양이 된다.
그리고 찬양은 영적 전쟁의 무기가 된다.
찬양은 성도의 칼이다
시편 149편은 찬양과 영적 전쟁의 관계를 매우 강하게 보여 준다.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성도의 모임 가운데에서 찬양할지어다.”
처음에는 예배의 장면처럼 들린다. 성도들이 모여 하나님께 노래하는 장면이다. 그러나 시편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들의 입에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있고, 그들의 손에는 두 날 가진 칼이 있도다.”
입에는 찬양이 있고, 손에는 칼이 있다.
이것은 이상한 장면이다. 노래와 칼이 함께 있다. 예배와 전쟁이 함께 있다. 그러나 영적 세계에서는 이것이 낯선 일이 아니다.
찬양은 단순한 감정 표현이 아니다. 찬양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선포하는 행위다. 찬양은 어둠의 권세 앞에서 하나님의 통치와 승리를 선언하는 영적 행위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찬양할 때, 어둠의 권세가 묶인다. 거짓된 왕들과 귀인들이 결박된다. 하나님의 판결이 집행된다.
그러므로 찬양은 예배 순서의 앞부분을 채우는 노래가 아니다.
찬양은 성도의 칼이다.
입술에 들린 영적 무기다.
십자가로 이미 승리하신 그리스도
그러나 여기서 반드시 붙들어야 할 중심이 있다.
음악 자체가 악령을 이기는 것이 아니다.
찬양 자체가 주술처럼 작동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의 승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나온다.
골로새서 2장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을 분명히 말한다.
그분은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던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셨다. 그것을 제하여 버리셨다. 십자가에 못 박으셨다. 그리고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의 빚을 지우셨다.
우리를 정죄하던 증서를 십자가에 못 박으셨다.
그리고 어둠의 권세들을 무력화하셨다.
그러므로 찬양의 능력은 음악적 완성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찬양의 능력은 십자가의 승리를 선포하는 데서 나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기셨기 때문에, 성도의 찬양은 승리의 선언이 된다.
사이렌의 노래와 오르페우스의 노래
이 주제는 그리스 신화 속에서도 흥미롭게 나타난다.
호메로스의 이야기에는 사이렌이 등장한다. 사이렌은 아름다운 노래로 뱃사람들을 유혹해 죽음으로 이끄는 존재다. 그들의 노래는 아름답지만, 그 아름다움의 끝에는 파멸이 있다.
스타벅스 로고에 등장하는 인어 형상의 이미지도 이 사이렌 전승과 연결되어 있다.
오디세우스는 사이렌의 노래를 듣고 싶었다. 그러나 죽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는 부하들의 귀를 밀랍으로 막게 하고, 자신은 돛대에 몸을 묶었다. 유혹의 노래를 들으면서도 몸이 묶여 있었기 때문에 죽음으로 끌려가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또 다른 이야기에는 오르페우스가 등장한다.
오르페우스는 더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함으로써 사이렌의 노래를 압도한다. 거짓된 유혹의 노래를 이기는 방법은 단지 귀를 막는 것만이 아니었다. 더 강하고 더 아름다운 노래가 필요했다.
이것은 영적으로도 중요한 통찰을 준다.
세상의 노래가 사람의 영혼을 사로잡는 시대에 교회는 단지 “듣지 마라”라고만 말해서는 안 된다. 물론 분별해야 한다. 그러나 더 나아가 교회는 더 강력한 찬양, 더 깊은 예배, 더 아름다운 복음의 노래를 회복해야 한다.
어둠의 노래를 이기는 것은 침묵만이 아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새 노래다.
새 노래를 부를 백성
이사야 43장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하나님은 광야에 길을 내시는 분이다.
사막에 강을 내시는 분이다.
막힌 곳에 길을 만드시고, 마른 곳에 물을 흐르게 하시는 분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목적은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려는 데 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찬양하는 존재다. 문제는 찬양하느냐 하지 않느냐가 아니다. 누구를 찬양하느냐이다.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으면 인간은 반드시 다른 것을 찬양한다. 돈을 찬양하고, 성공을 찬양하고, 스타를 찬양하고, 자기 자신을 찬양한다.
결국 영적 전쟁의 핵심은 예배의 대상에 있다.
누가 우리의 마음을 차지하는가.
누가 우리의 노래를 받는가.
누가 우리의 열광과 사랑과 헌신을 받는가.
이것이 영적 전쟁의 본질이다.
음악을 분별하고 찬양을 회복하라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단순한 애니메이션으로만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시대의 표적을 분별하는 눈으로 보면, 이 작품은 오늘날 음악과 영혼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노래가 사람을 살릴 수도 있다.
노래가 사람을 사로잡을 수도 있다.
음악이 예배가 될 수도 있고, 우상숭배의 통로가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대중음악을 무조건 정죄하는 태도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동시에 아무 분별 없이 받아들이는 태도도 위험하다.
중요한 것은 영적 분별이다.
이 음악이 내 영혼을 어디로 이끄는가.
이 가사가 내 마음에 어떤 갈망을 심는가.
이 리듬과 분위기가 내 안에 어떤 정서를 반복적으로 형성하는가.
이 스타와 팬덤 문화가 나를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게 하는가, 아니면 다른 대상을 우상화하게 하는가.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교회가 찬양의 능력을 회복하는 것이다.
세상의 음악이 점점 더 강력한 방식으로 사람들의 감정과 정체성을 사로잡는 시대라면, 교회는 더 깊은 예배와 더 순전한 찬양을 회복해야 한다. 하나님을 향한 새 노래가 다시 성도들의 입술에서 터져 나와야 한다.
시대의 표적 앞에서 깨어 있으라
예수님은 천기는 분별하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하지 못하는 세대를 책망하셨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문화 현상을 단순한 유행으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그 안에 흐르는 영적 메시지를 분별해야 한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세계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는 사실은 단순히 한국 문화의 성공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음악, 아이돌, 영혼, 악령, 전쟁, 찬양이라는 주제가 전 세계인의 상상력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뜻이다.
이 시대가 알든 모르든, 영적 세계에 대한 감각을 다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는 더 깨어 있어야 한다.
세상의 노래가 영혼을 사로잡는 시대에, 우리는 하나님의 새 노래를 불러야 한다. 어둠의 권세가 사람들의 마음을 유혹하는 시대에, 우리는 십자가의 승리를 선포해야 한다. 아이돌이 우상이 되는 시대에,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이 찬양받으실 분임을 증거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셨다.
그리고 우리를 지으신 목적은 분명하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성도는 노래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아무 노래나 부르는 사람이 아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승리를 노래하는 사람이다.
성도는 십자가로 어둠의 권세를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 찬양은 이 시대의 영적 전쟁 가운데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주신 거룩한 무기다.
세상에는 진짜가 있고, 진짜가 있기 때문에 가짜가 있다.
아무도 가치 없는 것을 위조하지 않는다.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를 정교하게 위조하는 사람은 없다. 위조지폐가 존재하는 이유는 진짜 지폐가 있기 때문이다. 가짜 명품이 만들어지는 이유는 진짜 명품이 있기 때문이다. 가짜 메시아가 등장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참 메시아가 계시기 때문이다.
성경은 역사의 마지막에 한 악한 존재가 등장할 것을 여러 차례 말한다. 다니엘서는 그를 말하고, 복음서는 그를 암시하며, 바울서신은 그를 설명하고, 요한계시록은 그를 마지막 무대 위에 세운다. 성경은 그를 적그리스도라고 부른다.
적그리스도. 헬라어로는 안티크리스토스다.
‘안티’라는 말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대적한다는 뜻이다. 다른 하나는 대신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보통 첫 번째 뜻에 익숙하다. 적그리스도는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존재다. 맞다. 그는 그리스도를 대적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는 그리스도를 대신하려는 존재이기도 하다.
이것이 더 무섭다.
그는 완전히 낯선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누구나 보자마자 “저 사람은 악하다”고 말할 수 있는 모습으로만 오지 않는다. 그는 어느 정도 그리스도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온다. 메시아처럼 보이고, 구원자처럼 보이고, 세상의 문제를 해결할 사람처럼 보인다. 사람들은 그를 보고 안심할 것이다. 마치 오래 기다린 사람이 마침내 도착한 것처럼 느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참 메시아가 아니다. 그는 가짜다.
자기 땅에 오신 참 메시아
요한복음 1장 11절은 이렇게 말한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이 한 문장은 조용하지만, 그 안에는 깊은 슬픔이 흐른다.
예수님은 자기 땅에 오셨다. 자기 백성에게 오셨다. 자기 집에 돌아온 주인처럼 오셨다. 그러나 그 집의 사람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다. 문은 열리지 않았다. 식탁은 차려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분은 낯선 사람처럼 취급받으셨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메시아로 오셨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된 분으로 오셨다.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다. 선지자들이 기다리던 분으로 오셨다. 그러므로 예수님 자신도 유대인으로 태어나셨다. 그분의 족보는 이스라엘의 역사 속으로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그런데 자기 백성은 그분을 영접하지 않았다.
이것은 단순한 역사적 비극이 아니다. 이것은 앞으로 일어날 더 큰 미혹의 그림자이기도 하다. 참 메시아를 거절한 자들이, 언젠가 가짜 메시아를 받아들이게 될 것이라는 어두운 예고다.
다른 이름으로 오는 자
예수님은 요한복음 5장 4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하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참 이상한 말씀이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셨다. 그러나 사람들은 영접하지 않았다. 그런데 다른 자가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할 것이라고 하신다.
여기서 “다른 자”는 누구인가?
그는 그리스도를 대신해서 오는 자다. 참 메시아가 거절당한 자리에 들어오는 가짜 메시아다. 자기 이름으로 오는 자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지 않고, 자기 이름으로 온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영광을 취한다. 십자가의 길이 아니라 자기 높임의 길을 간다.
성경은 “다른”이라는 말을 여러 방식으로 사용한다. 헬라어에는 헤테로스가 있고 알로스가 있다. 헤테로스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을 말한다. 완전히 다른 종류다. 반면 알로스는 같은 종류 안에서 다른 것을 말한다. 모양은 다르지만 본질적으로 유사한 범주 안에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다른 자”는 전혀 무관한 어떤 이방의 괴물이 아니다. 그는 메시아적 기대 안으로 들어오는 존재다. 그리스도와 비슷한 옷을 입고, 그리스도와 비슷한 말투를 흉내 내며, 그리스도와 비슷한 자리에 앉으려는 존재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이 생긴다.
참 메시아가 유대인으로 오셨다면, 그리스도를 대신하려는 가짜 메시아는 어디에서 등장할 것인가?
조상들의 하나님을 버리는 왕
다니엘서 11장은 마지막 때 등장할 악한 왕을 말한다. 그는 자기 마음대로 행한다. 스스로를 높인다. 모든 신보다 자신을 크게 여긴다. 신들의 신을 대적하는 비상한 말을 한다. 그리고 다니엘서는 그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가 모든 것보다 스스로 크다 하고 그의 조상들의 신들과 여자들이 흠모하는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며 어떤 신도 돌아보지 아니하고.”
여기서 눈에 들어오는 표현이 있다.
“그의 조상들의 신들”이다.
이 말은 가볍지 않다.
히브리어 표현으로 보면, 단순히 이방의 여러 신들을 말하는 것 이상으로 읽힐 수 있다. 이 표현은 히브리어로 엘로헤이, 곧 엘로힘과 같은 계열의 단어를 사용한다.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이라는 의미로 볼 수 있다.
만일 이 인물이 이방인이라면 “그의 조상들의 신들”이라는 표현이 일반적인 다신교적 신들을 가리킬 수도 있다. 그러나 다니엘서의 문맥과 마지막 때의 메시아적 흉내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 표현은 유대인의 조상들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악한 왕은 유대인의 혈통과 연결된 인물로 볼 수 있다.
그 왕은 자기 조상들의 하나님을 돌아보지 않는다.
또한 “여자들이 흠모하는 것”도 돌아보지 않는다. 이 표현은 창세기 3장 15절의 여자의 후손, 곧 메시아의 약속과 연결해서 볼 수 있다.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참 메시아에 대한 오래된 기다림, 그 갈망마저도 그는 돌아보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다. 메시아를 기다리지 않는다. 어떤 신도 돌아보지 않는다. 그는 자기 자신을 가장 높은 자리에 올려놓는다.
이것이 적그리스도의 영이다.
그는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의 폭군으로만 등장하지 않을 수 있다. 오히려 조상들의 하나님을 알 만한 배경을 가진 자, 메시아적 언어를 사용할 줄 아는 자, 유대인의 기대를 이용할 수 있는 자로 등장할 가능성이 있다.
단 지파라는 어두운 그림자
유대인들은 자신의 지파에 대한 의식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바울도 빌립보서 3장에서 자신이 베냐민 지파라고 말한다. 혈통과 지파는 단순한 행정적 분류가 아니었다. 그것은 정체성이고 기억이며 언약의 자리였다.
그렇다면 적그리스도가 유대인 가운데서 등장한다면, 그는 어떤 지파에서 나올 것인가?
오래전부터 교회가 주목해 온 지파가 있다. 단 지파다.
창세기 49장에서 야곱은 죽기 전에 아들들을 불러 예언한다. 그중 단에 대한 예언은 유난히 어둡고 의미심장하다.
“단은 이스라엘의 한 지파 같이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로다. 단은 길섶의 뱀이요 샛길의 독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 자를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
단은 이스라엘의 한 지파다. 바깥에서 온 적이 아니다. 내부에 있다. 그런데 그가 그의 백성을 심판한다. 내부에서 백성을 흔드는 자처럼 묘사된다.
더구나 단은 뱀이다. 길섶의 뱀이요 샛길의 독사다. 성경에서 뱀은 단순한 동물이 아니다. 창세기 3장의 뱀은 인간을 미혹했다. 요한계시록은 옛 뱀을 마귀요 사탄이라고 부른다. 뱀은 미혹과 배반과 사탄적 지혜의 상징이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 자를 뒤로 떨어지게 한다”는 말도 의미심장하다. 창세기 3장 15절에서 하나님은 뱀이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발꿈치를 무는 것. 뒤에서 넘어뜨리는 것. 배반과 기습의 이미지가 거기 있다.
야곱은 이 예언을 말하다가 갑자기 이렇게 고백한다.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
마치 어두운 밤길을 걷다가 멀리서 무엇인가를 본 사람처럼, 야곱은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린다고 말한다. 단 지파와 관련된 어떤 깊은 어둠을 본 것처럼 보인다.
우상숭배의 통로가 된 단
사사기 18장을 보면 단 지파의 어두운 역사가 나타난다. 단 지파 사람들은 라이스로 올라가 그곳을 점령하고 정착한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미가의 집에 있던 우상과 제사장을 가져간다. 그리고 자신들의 땅에 우상숭배의 체계를 세운다.
이후 북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단은 우상숭배의 중요한 중심지가 된다. 여로보암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는 벧엘에, 하나는 단에 세운다. 단은 북이스라엘의 우상숭배가 퍼져 나가는 문이 된다.
단은 이스라엘 안에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하나님께로 이끄는 통로가 아니라 우상숭배로 이끄는 통로가 되었다. 내부에 있으면서 백성을 어둠으로 이끄는 지파가 된 것이다.
이 모습은 마지막 때 이스라엘 내부에서 등장해 백성을 미혹할 적그리스도의 그림자처럼 보인다.
요한계시록의 침묵
요한계시록 7장에는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 인침을 받은 14만 4천 명이 나온다. 각 지파에서 1만 2천 명씩 인침을 받는다. 그런데 그 명단을 읽다 보면 이상한 점이 있다.
단 지파가 빠져 있다.
대신 요셉과 므낫세가 들어간다. 에브라임은 요셉의 유업을 대표하는 지파로 볼 수 있고, 므낫세가 따로 언급된다. 그러나 단은 없다.
성경은 왜 단이 빠졌는지 직접 설명하지 않는다. 침묵한다. 그러나 성경의 침묵이 때로는 말보다 더 크게 들릴 때가 있다. 많은 초기 교회 해석자들은 이 침묵을 주목했다. 단 지파가 마지막 때 인침 받은 지파 명단에서 빠진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본 것이다.
그들은 창세기 49장의 단 예언, 사사기 18장의 우상숭배, 요한계시록 7장의 단 지파 누락을 함께 보았다. 그리고 적그리스도가 단 지파에서 나올 수 있다는 해석을 제시했다.
이것을 절대적인 교리로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매우 오래된 해석이며, 결코 가볍게 지나칠 수 없는 성경적 단서이다.
초기 교회가 보았던 것
이 가르침은 초기 교회 안에서 상당히 널리 알려져 있었다. 2세기의 변증가 이레니우스는 적그리스도와 단 지파의 관련성을 언급했다. 그의 영향을 받은 히폴리투스도 이 견해를 발전시켰다. 히폴리투스는 초기 교회에서 적그리스도 연구와 관련해 중요한 인물이었다. 이후 암브로시우스와 같은 교부들의 흐름 속에서도 이 주제는 계속 언급되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 가르침은 점점 희미해졌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4세기에 기독교는 거대한 전환을 맞이한다.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가 공인되었고, 380년에는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었으며, 391년에는 이방 종교가 금지되었다. 박해받던 교회가 제국의 중심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 과정에서 로마 제국과 결합한 기독교 체제가 형성되었다. 이것이 훗날 로마 가톨릭 체제로 발전했다.
문제는 요한계시록의 상징들이 로마 제국과 너무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요한계시록 13장은 짐승과 거짓 선지자를 말하고, 요한계시록 17장과 18장은 바벨론 음녀와 세상 권세의 결탁을 말한다. 종교개혁 시대의 많은 개혁자들은 이러한 본문을 로마 가톨릭, 특히 교황 체제와 연결해서 해석했다.
그러나 로마 제국과 결합한 교회는 그런 해석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자신들이 서 있는 체제 자체가 계시록의 심판 구조와 연결될 수 있다는 해석은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그래서 점차 요한계시록은 상징적으로만 읽히기 시작했고, 적그리스도에 대한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해석도 약화되었다.
그 과정에서 적그리스도가 유대인, 특히 단 지파에서 나올 수 있다는 초기 교회의 해석도 점점 뒤로 밀려나게 되었다.
그러나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 상황은 다시 바뀌었다. 많은 종교개혁자들은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의 체계를 로마 가톨릭, 특히 교황 제도와 연결해서 보았다. 이후 근대와 현대의 성경 교사들 가운데서도 적그리스도가 유대인 가운데서 등장할 것이라고 본 이들이 있었다. 아더 핑크와 찰스 라이리 같은 이들이 그러한 흐름 속에 있다.
세부적인 해석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큰 흐름은 분명하다. 적그리스도는 단순히 교회 밖에서, 기독교와 전혀 무관한 방식으로만 등장하지 않는다. 그는 참 메시아를 흉내 낸다. 그는 그리스도를 대신하려 한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메시아로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그들의 기대와 가까운 자리에서 등장할 가능성이 있다.
위조품은 진짜를 가리기 위해 존재한다
적그리스도는 위조품이다. 가짜 메시아다.
그러나 위조품이 있다는 것은 진짜가 있다는 뜻이다. 가짜가 존재한다는 것은 진짜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다. 사탄은 가치 없는 것을 위조하지 않는다. 참 메시아가 계시기 때문에 가짜 메시아를 만든다.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이시기 때문에 적그리스도는 그 생명을 가리려 한다.
가짜의 목적은 단순하다. 진짜를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 대신 다른 이름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다. 십자가 대신 영광을, 회개 대신 번영을, 순종 대신 자기실현을, 하나님 나라 대신 인간 왕국을 붙들게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4장에서 말씀하셨다.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마지막 때의 핵심은 미혹이다. 미혹은 대개 노골적인 거짓말로 오지 않는다. 미혹은 진실과 비슷한 얼굴을 하고 온다. 익숙한 단어를 사용한다. 성경적인 표현을 빌린다. 메시아적 기대를 이용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속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짜를 분별해야 한다.
그러나 가짜를 분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가짜를 끝없이 연구하는 것이 아니다. 진짜를 깊이 아는 것이다.
진짜를 만져 본 사람은 가짜를 안다
위조지폐 감별사들은 가짜 지폐만 연구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들은 진짜 지폐를 반복해서 본다. 만진다. 빛에 비추어 본다. 질감을 익힌다. 냄새와 무게와 촉감을 기억한다. 진짜에 익숙해진 사람은 가짜를 만났을 때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을 안다.
영적인 분별도 그렇다.
적그리스도를 분별하려면 그리스도를 알아야 한다. 가짜 메시아를 분별하려면 참 메시아를 깊이 알아야 한다. 예수님의 음성에 익숙해야 한다. 예수님의 성품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의 길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마음 깊이 새겨야 한다.
요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성경을 연구하면서도 예수님께 오지 않을 수 있다. 이것은 무서운 말씀이다. 성경을 읽지만 주님을 모를 수 있다. 교리를 알고, 예언을 알고, 마지막 때의 시나리오를 알고, 적그리스도에 대해 말할 수 있지만, 정작 예수께 가까이 가지 않을 수 있다.
그러면 위험하다.
성경은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책이다. 율법도 그리스도를 향하고, 선지서도 그리스도를 향하고, 시편도 그리스도를 향하고, 복음서와 서신서와 요한계시록도 그리스도를 향한다. 적그리스도에 대한 연구도 결국 그리스도를 더 선명하게 보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가짜를 폭로하는 목적은 진짜를 사랑하기 위해서다.
예수를 바라보는 사람
히브리서 12장 2절은 말한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결국 우리의 시선은 예수께 머물러야 한다.
적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아는 것은 중요하다. 마지막 때의 미혹을 분별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의 중심은 적그리스도가 아니다. 우리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다.
예수님은 참 메시아이시다. 유대인의 메시아로 오셨지만, 동시에 온 세상의 구원자로 오셨다. 자기 백성에게 거절당하셨지만, 그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적그리스도는 자기 이름으로 온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셨다.
적그리스도는 자기를 높인다. 예수님은 자기를 낮추셨다.
적그리스도는 십자가 없는 영광을 약속한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부활의 영광으로 들어가셨다.
적그리스도는 사람들을 미혹하여 자기에게 속하게 한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생명으로 인도하신다.
가짜 메시아는 지배한다.
참 메시아는 구원한다.
가짜 메시아는 사람을 자기 왕국의 재료로 삼는다.
참 메시아는 자기 생명을 주어 사람을 살린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를 바라보아야 한다. 성경을 읽을 때 예수를 만나야 한다. 예언을 연구할 때도 예수께 더 가까이 가야 한다. 마지막 때를 말할 때 두려움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참 메시아이신 예수께 더 깊이 뿌리내려야 한다.
가짜 메시아의 시대에 참 메시아를 붙들라
마지막 때에는 많은 미혹이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빌려 등장할 것이다. 많은 사람이 자신을 구원자처럼 포장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적그리스도가 등장할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를 대적하면서도 그리스도를 대신하려 할 것이다.
그는 유대인들이 영접할 수 있는 모습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 유대적 배경을 가지고, 메시아적 기대를 이용하며, 참 메시아 대신 자신을 세우려 할 것이다. 다니엘서의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창세기 49장의 단 지파 예언, 요한계시록 7장에서 단 지파가 빠진 점, 초기 교회의 해석 전통은 모두 이 가능성을 생각하게 만든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면 안 된다.
적그리스도 연구의 끝은 적그리스도가 아니다. 그 끝은 예수 그리스도다. 가짜에 대해 말하는 이유는 진짜를 더 분명히 보기 위해서다. 어둠을 말하는 이유는 빛을 붙들기 위해서다. 미혹을 경고하는 이유는 진리를 사랑하기 위해서다.
가짜가 있다는 것은 진짜가 있다는 뜻이다.
적그리스도가 있다는 것은 참 그리스도께서 계시다는 뜻이다.
미혹이 강해진다는 것은 우리가 더욱 진리에 뿌리내려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알아야 한다. 성경을 단지 교리적으로만 읽지 말고, 그 안에서 그리스도를 만나야 한다. 예수님의 성품과 길과 십자가와 부활에 익숙해져야 한다. 그래야 가짜가 등장할 때 흔들리지 않는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가짜 메시아의 시대에 참 메시아를 붙들자.
적그리스도의 미혹이 강해질수록 그리스도께 더 깊이 뿌리내리자.
성경이 증언하는 예수께 나아가자.
그분만이 참 메시아이시다.
그분만이 생명이시다.
그분만이 우리의 구원이시다.
손성무 목사의 신학적 견해에 관한 공식 입장문
1. 본 문서의 목적과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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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본인의 신학적 위치
본인은 성경을 신앙과 사역의 최종 권위로 삼는 복음주의 신앙 위에 서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의 구속, 은혜에 의한 구원, 교회의 공공성과 공동체적 책임을 신앙의 핵심으로 고백한다.
성령 사역에 대해서는 성경에 기록된 성령의 역사와 은사가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행하실 수 있음을 믿는다. 동시에 모든 성령 사역은 성경의 가르침, 교회의 공동 분별,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에서 이해되고 분별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은사와 표적은 복음의 중심이 아니라 복음에 종속되어야 하며, 교회의 질서와 덕을 세우는 방식으로 다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본인의 사역은 한국 교회 안에서 성령 사역에 대한 건강한 이해와 균형 있는 분별을 돕는 것을 목적으로 진행되어 왔다.
3. 신사도 운동에 대한 신학적 입장
본인은 이른바 ‘신사도 운동(New Apostolic Reformation, NAR)’으로 불리는 신학적 흐름에 속하지 않으며, 해당 운동의 핵심 주장들에 동의하지 않는다.
특히 다음과 같은 지점들에 대해 신학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
1) 현대 교회 안에서 사도·선지자 직분이 교회 위에 초교파적 권위를 행사한다는 주장
2) 특정 개인·네트워크가 초교파적 권위를 가지고 교회를 대표하거나 지배하는 구조
3) 계시나 예언이 성경과 동등하거나 우선적 권위를 가진다는 이해
4) 은사·표적을 과도하게 강조하거나, 성령의 열매 및 교회의 덕을 약화시키는 경향
5) 정복주의적(지배주의적) 관점으로 교회의 사명과 사회 참여를 이해하는 경향
본인은 이러한 요소들이 성경적 교회론과 긴장 관계에 있다고 판단하며, 이에 대해 공개적·사역적 차원에서 동조하거나 참여한 바가 없다.
4. 공적 판정에 관한 사실 관계 정리
일부 주장에서는 특정 방송사 또는 공적 기관이 본인에 대해 신학적 판정을 내렸다고 언급된 바 있으나, 그러한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본인은 현재까지 어떠한 교단, 방송사, 공적 기관으로부터도 이단 또는 문제적 신학으로 판정된 사실이 없다.
5. 일부 매체 분류와 관련한 사실 정리
과거 일부 매체 자료에서는 본인이 신사도 운동으로 분류된 사례가 있었던 바 있다.
그러나 해당 분류는 제3자의 일방적 자료에 근거해 이루어진 것으로, 이후 해당 매체 발행인과의 소통 과정에서 해당 게재가 충분한 신중한 검토를 거치지 못한 상태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이 공유되었다.
본인의 신학적 입장과 사역은 현재까지 어떠한 공적 판정에서도 문제로 규정된 바가 없다.
6. 사역명 사용에 대한 안내
본인의 법적 이름은 손종태이며, 2017년경부터 사역 현장에서는 ‘손성무’라는 사역명을 사용하고 있다. 이는 신학적 입장이나 정체성 변경과는 무관하다.
빌립보서 2장 5절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자기 비움(“he made himself nothing”)의 의미를 사역적 다짐으로 삼기 위한 취지에서 사용해 온 이름이다.
법적·행정적 영역에서는 기존의 법적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으며, 사역명 사용은 신학 노선이나 사역 방향의 변화와는 관련이 없다.
7. 사역 구조 및 명칭 변천에 대한 안내
본인의 사역은 특정 신학 노선이나 정체성 변경에 따라 전환된 것이 아니라, 사역의 성격과 기능에 따라 명칭과 운영 형태가 조정되어 온 과정이다.
초기에는 지역 교회 공동체로서 ‘예수촌교회’라는 명칭을 사용하였고, 이후 연합적인 기도의 집 성격으로 ‘원띵하우스’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이후 사역의 초점이 다시 지역 교회 목회로 모아지면서 ‘진행교회’와 ‘처음그교회’로 운영되었으며, 현재는 조직적 운영과는 구분되는 예배·기도·훈련 중심 사역으로서 ‘에하드하우스(Ehad House)’라는 이름으로 사역이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명칭 및 구조의 변화는 사역의 기능과 범위를 명확히 하기 위한 조정이며, 본 문서에 서술된 신학적 입장과 사역의 기본 방향은 전 과정에서 일관되게 유지되어 왔다.
8. 교단 소속에 대한 사실 안내
본인은 1997년부터 2025년까지 한국독립교회선교단체연합회(KAICAM)에 소속되어 사역하였다. 이후 행정적 소속을 정리하고, 2026년부터는 그리스도의 교회에 소속되어 사역하고 있다.
본인의 신학적 입장과 사역 방향은 교단 소속의 변경과 무관하게 일관되게 유지되어 왔다.
9. 현재의 공식 입장
본인은 현재도 다음의 원칙을 유지하며 사역하고 있다.
1) 성경을 신앙과 사역의 최종 권위로 삼는다.
2) 성령 사역은 성경과 교회의 공동 분별 안에서 이해한다.
3) 신사도 운동 및 그와 관련된 어떠한 네트워크에도 속하거나 소속되어 사역한 바가 없다.
4) 교회의 공공성과 공동체적 책임을 존중한다.
본 문서에 기술된 입장은 과거뿐 아니라 현재에도 유효한 공식 입장이다.
10. 맺음말
본 문서는 논쟁을 종결하고 장기간 누적된 혼란을 정리하기 위한 공식 기록이다.
본 사안과 관련된 모든 참고와 판단은 본 문서를 기준으로 이루어진다.
본 문서의 목적은 방어가 아니라 명확성이며, 분열이 아니라 질서의 회복에 있다.
발행일: 2026년 1월 23일
발행 주체: 에하드하우스
대표: 손성무 목사
(법적 이름: 손종태)
손성무 목사의 신학적 견해에 관한 공식 입장문.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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